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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교만과 겸손

by 이덕휴-dhleepaul 2018. 12. 16.

말씀: [고전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 가지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18절 말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그 도는 헬라어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은 그걸 이치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말씀으로, 현대어 영어성경은 메시지로, 루터는 말씀(Wort)으로 번역했습니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언어, 가치, 이성, 근거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로고스는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영성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23, 24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반복해서 짚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구절에서도 18절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사건이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8절이 말하는 멸망하는 자들과 23절이 말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건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정 받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개죽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대표적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을 거론했습니다.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 즉 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원했습니다. 구약성서에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 이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능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고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아는 것, 깨닫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연을 알려고 노력했고,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서양에서 물리학도 발전하고, 심리학도 발전했습니다. 오늘의 모든 학문은 다 이런 철학의 열매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십자가로 죽은 예수는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학문을 깊이 알고 제자들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큰 스승이라는 말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십대 초반에 십자가 선고를 받고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운명에 대한 말을 듣고 뜯어말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시대정신을 거슬러서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게 되었으니 당연하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을 좀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그렇게 당연한 대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지혜가 뭔지를 묻고 있습니다. 본문에 지혜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가 대립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적으로 이로울 수 있지만, 자못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를 안다는 걸 내세우는 겁니다. 그런 지혜를 바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지혜는 오히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입니다.

교만은 일 만 악의 근원입니다.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20절 말씀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위 구절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거론됩니다. 지혜 있는 자, 선비, 변론가는 당시 로마시대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승, 학자, 웅변가, 변호사, 정치인, 제사장, 선지자 등등입니다. 누구나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법과 종교의 권위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실정법이나 종교법 모두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 실정법과 종교법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시켰습니다. 그게 세상의 지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이 그걸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력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의 도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지혜에 묶여 있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7절과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세상에서 미련한 사람들로 취급받던 기독교인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기독교인들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자기합리화나 자격지심에 불과한 것일까요? 성경말씀을 냉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말씀이거니 하고 지나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 요즘 말로 ‘루저’들이 모여서 아무리 떠들어도 권력과 명예와 돈이 있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눈 깜빡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 진술은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이 진술은 종말론적인 관점입니다. 지금 당장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숨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그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게 드러나는 순간에 그걸 무시했던 이들은 모두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잘난 척하던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 종말론적 관점은 오늘 우리에게 현실로 앞당겨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신분과 조건에 관계없이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참된 지혜라는 사실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런 뜻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본문과 다릅니다. 우리는 당시 교회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하층민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모두 가난하거나 지식이 없거나 명예가 없이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분파주의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분파주의는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결국 자기 자랑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게 없다는 사실을 29절에서 짚었고, 31절에서는 렘 9:23절을 인용하면서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빌 3:7,8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능력과 지혜는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즉 삶의 능력이요, 삶의 지혜입니다. 이 사실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걸 좀더 실질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낮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운명에 떨어졌던 예수님을 택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단순히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깨닫고 믿는 사람은 자기에 임하는 어떤 운명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게 삶의 능력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절대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는 돈은 삶의 방편은 되지만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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