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언어론
배 상 식(대구교대)
[한글 요약]
하이데거의 철학적 근본과제는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 곧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존재의 의미를 분석·해명하려는 그의 사유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개념에 관한 것이다. 흔히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는 그의 후기 사상에서만 드러나는 것으로 간주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사상 초기 때부터 언어는 존재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이다. 비록 그의 초기 저작 속에서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을 지라도, 언어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을 파악하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특히 그는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사유에서, '언어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인간 현존재의 본질(실존)과 근원적인 실존범주인 말을 연관지어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회이후, {존재와 시간}에서 말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현존재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단념하고, 현존재는 단지 언어가 말하는 현장(Da)이라는 견해를 수립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후기사유에서는 언어에 대한 통찰이 전기사유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언어의 근원인 (존재)언어가 말하는 것이며,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언어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후기 입장에서는 존재에 대한 물음, 곧 존재에로의 접근방식으로서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詩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더욱이 언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 해석은 언어를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개시되는 하나의 지평으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자 인간 본질의 거처가 된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비밀은 바로 '언어의 본질'에 있으며, 또한 이러한 언어의 본질은 곧 존재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주제분야 : 현상학적 존재론, 언어철학, 해석학
주 제 어 : 존재, 언어, 현존재, 詩作, 말
1. 들어가는 말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혼자서 독백을 하거나 아니면 침묵할 때조차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비록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되지 않을 지라도 우리의 사고활동이 말과 함께 수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말(언어)은 우리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나 도구로 소유한다기보다는 우리 자신과 불가분리적인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말과 결코 어떤 식으로든지 무관할 수 없는 그러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과 함께, '인간은 언어(logos)를 가진 동물이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지니며, 또한 언어는 이제 인간을 동물과 구별지어주는 특징 중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는 어떻게 발생하였을까? 사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며, 다만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언어의 역사도 시작되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바는, 소위 언어학에서 다루는 언어의 기원, 변천사, 문법적 형태 등이 아니다. 우리의 논의는 하이데거의 철학에 있어서 '존재'와 함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되고 있는 '언어'에 대해 그 본질을 탐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 중의 하나는 바로 '언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특히 현대 분석철학에서 언어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언어에 대한 분석철학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언어란 외부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뇌와 신경조직 활동의 영향을 받아서 발성기관으로부터 뜻을 가진 단어들이 산출되는 것이라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달 수단이나 장치로부터의 아무런 영향 없이 한 사람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기호와 상징들의 체계, 즉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전달체계로서의 언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상학적·해석학적 입장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분석철학의 언어이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하이데거는 많은 언어철학자들이 언어를 단지 의사전달을 위한 일종의 상징체계나 혹은 도구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지, 언어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기존 언어학이나 언어철학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즉 "결국 철학적 탐구는, 언어일반에는 도대체 어떤 존재양식이 속하는가를 한번은 물어 볼 결의(entschlie en)를 해야만 한다. 언어는 세계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언어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갖는 것인가, 혹은 이 양자 중 어떤 것도 아닌가? (…) 우리는 언어학이라는 것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 언어학이 주제로 삼고 있는 언어라고 하는 존재자의 존재는 분명하지가 않다. 심지어 언어라는 주제를 탐구하려는 물음을 위한 지평마저도 은폐되어 있다." 이와 같이 기존 언어관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하이데거의 사유는 새로운 언어관을 형성하게 된다.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목표가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지만, 존재의 의미를 분석·해명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언어'개념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기존 형이상학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낯선 용어, 즉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고, 또 이미 사용 중인 형이상학적 용어를 새롭게 변형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이 전체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그만큼 난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언어의 문제가 그의 철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바로 이 언어라는 것은 존재와의 관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핵심주제인 존재에 관한 문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언어에 관한 문제와 뒤얽혀있게 마련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가 존재와의 공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든가 "언어는 밝히며 감추며 오는 존재의 도래"라는 말이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같이 '언어'에 대한 하이데거의 각별한 관심은 주로 {언어에의 도상}, {휄더린 詩에 대한 해명}, [휴머니즘에 관한 서한] 등을 비롯한 후기 저작에서 대부분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그의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은 언어를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는 하나의 지평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하나의 지평으로서 간주하는 '언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 논문은 바로 이러한 '하이데거의 언어론'을 그의 사유과정 속에서 해명해 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법은 그의 언어론을 전기사유와 후기사유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며, 아울러 전회(Kehre)를 기점으로 전·후기 사유로 나누어 살펴보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2. 전기사유에서의 언어론
흔히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의 문제는 그의 후기사상에서만 드러나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언어'는 그의 사상의 초기 때부터 존재의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언어와 존재에 대한 숙고는 초기부터 나의 사유의 길을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구는 배후에 가장 큰 가능성으로 머물러 있었다." 하이데거의 초기 저작들에 있어서는 이처럼 존재와 언어의 관계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그 자신의 관심은 지속적인 것이었다. 하이데거의 전기사유에서 언어의 문제는 사실 그의 주저인{존재와 시간}에서 대부분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전기사유에서 드러나는 언어론에 대해 먼저 해명해 보고자 한다.
1) 근원적 실존범주로서의 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면서, 언어 자체를 분석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언어를 독자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와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존재의 의미'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언어의 본질은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자인 현존재를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실존범주'라는 용어를 통해서 인간의 존재, 즉 자신을 초출하여 존재의 부름에로 마중 나가면서 존재의 진리를 언어 속에 깃들게 하는 존재, 곧 현존재를 분석·해명해 보이고자 한다. 여기서의 언어는 결코 인간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적·도구적·대상적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개시성의 실존론적 구성틀(SZ, 214)"로서, 현존재의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에서 그의 핵심과제는 항상 '말(Rede)'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현존재의 말을 통해 언어의 본질을 이끌어내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에서 말(Rede)이나 언어(Sprache)에 대한 하이데거의 직접적인 논의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는 제 34절에서 언어를 직접적으로 주제화하기에 앞서 이미 '처해있음(Befindlichkeit)'과 '이해(Verstehen)' 그리고 '해석(Auslegung)'을 분석하는 과정(29절-33절)에서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암시적으로 다루고 있기는 하나, 겨우 제34절인 "현존재와 말, 언어(Da-sein und Rede. Die Sprache)"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제7절과 68절에서 언어(말)에 대한 그의 입장을 대부분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간결한 논의에서 그의 주장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처해있음' 및 '이해'와 함께 '말'이라는 현존재의 실존범주들을 해명해 보면서, 그의 언어론을 좀더 엄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 현존재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처해있음(Befindlichkeit)'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기분(Stimmung)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현존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다' 함은 바로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어떤 기분으로 있다'든지 혹은 '어떤 기분에 젖어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람이 어떤 상태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존재를 그의 '現(Da)' 속으로 맞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처해 있음'이다. 기분 내에서 개시되어 있는 존재를 통하여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를 개시한다. 현존재로서 인간의 이런 존재성격이 '현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파악되며, 이를 가리켜 인간 현존재가 그의 現 내에 '던져져 있음(Geworfenheit, 피투성)'이라고 말한다(SZ, 135참조). 그리고 처해있음과 더불어 동근원적으로 '이해(Verstehen)'가 現을 구성하고 있다(SZ, 142참조). 하이데거도 지적하듯이 우리가 흔히 '어떤 것을 이해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일을 주관할 수 있다', '그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 '어떤 것을 할 수 있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실존범주로서의 '이해'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어떤 무엇이 아니라 바로 실존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즉 이해에는 실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이라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존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추가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일차적으로 '가능존재(M glichsein)'를 말하는 것이다(SZ, 143참조).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의 '이해'에 의해 비로소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 있어서 바로 그 존재 자체가 그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존재자(SZ, 42)"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의 가능성은 '기투(Entwurf)'에 의하여 개시된다. 여기서 '기투'라고 하는 것은 계획에 맞추어 자기의 존재를 정돈하는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존재하는 한, 제 가능성을 기본으로 하여 그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제 가능성을 앞서 기획하여 미래에 투사시키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해는 기투로서 현존재가 그의 제 가능성으로서 존재시키는 현존재의 존재양식인 것이다(SZ, 145)."
이와 같이 인간은 세계 속에 현사실적으로 처해있는 자신의 개시적인 존재방식 속에서 그때마다 기분에 젖어든 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실존가능성에로 내맡겨지며, 이렇게 내맡겨진 세계-내-존재의 피투된 실존가능성을 수용하여 그런 가능성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존재이해를 열어 밝히며 확장시켜 나간다. 처해있음과 이해가 실존론적으로 동근원적인 존재방식이라는 사실은 이 두 가지 존재방식이 저마다 각각 세계-내-존재의 전체적인 개시성을 열어 밝히는 실존범주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실존범주로 '말(Rede)'이 있다. 물론 말도 처해있음과 이해와 더불어 실존론적으로 동근원적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이 처해있음 및 이해와 더불어 동근원적이라는 언급에서 나타나는 동근원성은 앞에서 처해있음과 이해의 동근원성과 같은 의미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처해있음과 이해는 동근원적으로 말에 의해서 규정된다(SZ, 133)"고 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말이 처해있음과 이해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존범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가지 실존범주보다 더욱 근원적이면서도 탁월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게 된다.
말은 처해있음이나 이해와 동등한 제 3의 실존범주가 아니라 앞의 두 가지 실존범주를 근원적으로 포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시성의 근원적인 실존범주(SZ, 161)"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말은 처해있음과 이해와 더불어 실존론적으로 동근원적이다. 이해성(Verst nd- lichkeit)은 해석을 통해 수용되기에 앞서서 언제나 이미 분절되어 있다. 말은 이해성을 분절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말은 이미 해석과 진술의 근저에 놓여 있다(이 부분은 필자의 강조임). 해석에서, 따라서 보다 근원적으로 이미 말에서 분절 가능한 것을 우리는 '의미'라고 명명하였다(SZ, 213-214).
이러한 주장에서 드러나듯이, '말'은 처해있는 피투성과 기투하는 이해라는 이 두 가지 실존론적인 존재방식과는 원천적으로 구별된 독자적인 작용공간을 지닌 그런 실존범주가 아니라, 오직 피투된 채 기투하는 실존의 수행과정 속에서 개시되어 이해된 존재자 전체의 존재의미를 근원적으로 분절하여 언어적 차원에서 마디구성하며 규정하는 존재론적 특성을 지닌 실존범주인 것이다. 요컨대 말은 처해있는 피투성과 기투하는 이해와 더불어 현존재의 現을 실존론적으로 구성하는 이른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방식, 즉 근원적인 실존범주인 것이다.
2) 말과 언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제34절의 주제를 "현존재와 말, 그리고 언어"라고 하여, 말과 언어의 관계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말은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SZ, 213)"이며, "말이 밖으로 언표된 것이 언어(SZ, 214)"라고 하여 말과 언어가 용어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태적으로도 명확히 구분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양자의 구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언어는 음성적 告示(stimmlich Verlautbarung)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적 표현이다. 그리고 말은 고시된 언어의 실존론적 본질이며, 이 본질에 의해 고시된 언어는 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의 실존론적 본질인 말은 언어가 告示를 통해 드러나듯이 그렇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고시된 언어는 마치 땅에서 성장하여 줄기와 잎사귀와 꽃을 피움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그런 식물과 같은 것이며, 고시된 언어의 뿌리격인 '말'은 식물의 뿌리가 흙 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거나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하이데거는 말의 두 가지 양태로서 '들음(H ren)'과 '침묵(Schweigen)'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떤 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들음'은 말함을 구성한다. 그리고 언어의 음성적 告示가 말에 근거하듯이, 음향의 지각은 '들음'에 근거한다. 따라서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공동존재로서의 현존재가 타자에 대해 실존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현존재가 말을 듣는 것은 이해하기 때문이다(SZ, 217참조). 타자와 함께 이해하고 있는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는 공동 현존재 및 자기 자신에게 귀기울이고, 이 귀기울임에 있어서 공동 현존재 및 자기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현존재는 서로 듣고 聽從하는 가운데 공동존재가 형성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귀기울임'이라는 구조를 근거로 해서 단체구성이나 사회형성 등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들음과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는, 즉 말의 또 하나의 본질적인 가능성을 '침묵'이라고 부른다. 침묵은 들음과는 다른 말함의 양태이다. 침묵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잡담(Gerede)'에 의해 이해된 것을 은폐시키는 일, 즉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올바른 이해를 드러내기 위해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SZ, 219참조). 그래서 진정한 말속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현존재는 말해야 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침묵에서는 말함이나 들음에서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 대화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 자신을 본래적이고 풍부하게 마음대로 개시할 수 있음(SZ, 219)"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침묵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침묵은 말의 한 존재양식으로서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를 밖으로 말함이다.
이처럼 침묵도 자기를 밖으로 말하는 말의 한 양태인 것이며, 내가 다른 사람이 말한 것에 귀기울이는 '들음'을 통해서 대화의 내용을 들을 수 있듯이, 그렇게 나는 침묵과 그 침묵 속에 들어있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인간 현존재의 본질(실존)과 근원적인 실존범주인 말을 연관지어 해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언어의 본질문제를 크게 두 가지 방식에서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언어의 개시성'이라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은폐성'이라는 측면이다. 원래 그가 강조하는 언어 현상은 "현존재의 개시성의 실존론적 틀에 뿌리박고 있기(SZ, 213)" 때문에, 현존재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그렇지만 흔히 세상 사람들의 한 특징으로 지적되는 '잡담(Gerede, 빈말)'과 같은 경우에는, 언어의 본래적 의미 곧 로고스(logos)로서의 의미가 은폐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말하자면 잡담의 경우에는 언급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가 성취되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모든 새로운 질문과 모든 논쟁 가능성을 억제하고 또한 그것을 특유의 방법으로 누르고 지연시키게 되는 것이다(SZ, 225참조). 이러한 하이데거의 언어의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해석학적 통찰은 현존재의 실존 안에서 비로소 접근가능하며, 이러한 사태연관을 이해하고 있어야 비로소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적인 지평에서 말과 언어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말의 구조의 존재론적-실존론적 전체를 현존재 분석론에 근거하여 해명하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전기사유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3. 후기사유에서의 언어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현존재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단념하고, 현존재는 단지 언어가 말하는 현장(Da)이라는 견해를 수립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의 후기사유에서는 언어에 대한 통찰이 전기사유와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언어의 근원인 (존재)언어가 말하는 것이며,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이 언어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후기사유에서는 존재에 대한 물음, 곧 존재에로의 접근방식으로서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詩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더욱이 언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 해석은 언어를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는 하나의 지평으로 규정한다. 이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자 인간 본질의 거처가 된다.
1) 詩作과 언어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을 "언어의 본질에서 생기하는 詩作"으로 규정한다. 만일 그의 주장처럼 모든 예술이 그 본질에 있어서 詩作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럴 경우 건축예술, 조형예술은 물론이고 음성예술 등 아마도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詩(Poesie)'로 환원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더욱이 이것이 전부 환원되어야 한다고 간주할 경우, 모든 예술이 詩作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자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예술의 본질이 곧 詩作'이라고 하는 주장은 언어예술을 포함하는 '광의의 詩作'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다양한 예술 분야 중에서 특히 언어예술, 곧 협의의 詩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詩라는 언어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협의의 의미에서 詩作의 활동영역은 '언어'에 의해 제약될 수밖에 없다. 즉 詩라고 하는 예술작품은 곧 언어작품인 셈이다. 그래서 본래적 언어, 즉 본질(존재)의 언어(Sprache des Wesen)는 처음으로 인간에게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비로소 개시해 주는 가장 근원적인 가능성인 까닭에, 이같이 언어를 재료로 하는 협의의 詩作은 예술의 분야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탁월한 위치는 언어와 존재자의 비은폐성 사이에서 드러나는 본질연관을 갖게 된다. 언어를 의사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소위 통상적인 언어 이해는 그러한 본질연관에 대해 결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언어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언어는 담화(Unterredung)나 협의(Verabredung)를 할 때처럼,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을 위해 사 용된다. 그러나 언어는 꼭 전달해야 할 것에 대한 음성적이고 문자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 며, 일차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언어는 개시되어 있는 것이든 은폐되어 있는 것이든, 단지 그것을 의미된 것으로서 비로소 단어와 문장을 통해 계속 전달해 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존재자를 비로소 처음으로 열려진 場 가운데로 데려온다. 그래서 돌, 식물, 그리고 동물의 존재에서처럼, 언어가 현존하지 않는 그러한 곳에서는 존재자의 어떠한 개시성도, 그와 더 불어 비존재자(Nichtseiende)나 공허한 것의 어떤 개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HW, 61).
이처럼 언어를 이해 전달의 매개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언어관에서는 언어의 본질에로 이르지 못한다. 즉 언어란 그 본질에서 볼 때 하나의 의미와 연결된 언표적 표현만은 아니며, 언어에 대한 그런 규정은 언어의 본질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언어의 파생적 성격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의 본질은, 그것이 언표를 통해 은폐된 것을 비로소 비은폐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의미에서 먼저 광의의 詩作을 예술의 본질이라고 규정하며, 심지어 "언어 자체가 본질적 의미에서 詩作(HW, 62)"이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詩作이 곧 原詩作(Urdichtung)이기 때문에 언어가 詩作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詩作의 근원적인 본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詩가 언어 속에서 발생한다(HW, 61)"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詩는 분명히 존재를 비은폐시키고 언어를 통해 드러난 것을, 그리고 언어가 목표로 하는 것을 완성한다. 말하자면 하이데거에 있어서 예술은 존재의 개시성 속에서의 특별한 詩作이다. 우리가 그것을 전적으로 깨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언어 속에 그것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넓은 의미에서 詩作을 언어의 본질적인 내적 통일 속에서 숙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詩作이 가능하기 위한 근거로서 제시된 '언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2) 언어의 본질
(1) 언어의 말하기
우리는 흔히 언어를 일상생활 속에서 필요에 따라 자유로이 만들기도 하고, 또 만들어진 언어가 역사 속에서 소멸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 언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수단으로 사용되는 도구적 의미나 인간의 활동과 관련된 인간학적·문학적 의미의 언어가 결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언어의 의미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의 언어는 인간이 자유로이 혹은 임의로 필요에 따라 만들거나 소멸시킬 수 있는 도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가능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근원적인 生起(Ereignis)로서 해석된다.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돌이나 식물, 그리고 동물의 존재에서처럼, 언어가 있지 아니한 곳에서는 따라서 존재자의 개시도 없으며, 언어가 존재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자가 언어에게로 오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HW, 60참조). 즉 존재 개시성의 터전에서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이해의 온갖 내용은 오직 언어의 본질을 통해서만 밝혀지며 개방되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이 근본적으로는 존재 개시성을 구성할 뿐 아니라, 또한 이렇게 유의미하게 구성된 존재 개시성으로부터 우리가 관계하는 개방가능한 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참되게 이해되고 해석된 존재자로서 우리에게 개방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언어가 있는 곳에만 세계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언어는 언명이라는 기능을 통해 세계 안의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에 있어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강연 논문인 [언어(Die Sprache)]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는데, 그는 이 논문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인간은 말한다. 우리는 깨어있을 때나 혹은 꿈을 꿀 때도 [언제나] 말한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다만 듣거나 혹은 [무언가를] 읽을 때에도 우리는 항상 말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듣거나 읽 지도 않고 도리어 가만히 작업을 하거나 한가롭게 쉴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든지 계속해서 말한다(US, 9).
여기서는 먼저 '인간이 말한다(Der Mensch spricht)'라는 사실에서 그의 논의를 전개하지만, 결국 '언어가 말한다(Die Sprache spricht)'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이 말한다'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자명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말한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언어가 말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이것은 '언어의 말하기'가 '인간의 말하기'의 가능적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이른바 언어에 관한 하이데거의 새로운 해석이다. 그는 이러한 해석을 먼저 '주관주의 언어관'과 대비시킨다. 즉 그 당시에, 말하기(Sprechen)란 무엇을 알리거나 경청하는 것과 같은 도구적인 의미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물론 하이데거도 지적했듯이,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행적 이해를 우리는 단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생물학과 철학적 인간학, 사회학과 정신 병리학, 신학과 시학 등에서도 [이러한] 언어 현상에 대해 더욱 포괄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US, 12-13)." 그렇지만 언어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방법(Betrachtungsweisen)은 언어로서의 언어, 곧 언어의 본질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언어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US, 13참조). 따라서 하이데거는 과학적인, 그리고 주관적인 언어이해에 반대해서 새롭게 "언어의 말하기"를 규정하고자 한다. 그가 규정하고자 하는 언어의 말하기는 이미 말해진 것(Gesprochen) 속에서, 그것도 순수하게 말해진 것, 즉 詩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를테면 게오르그 트라클의 "어느 겨울 저녁(Ein Winterabend)"이라는 시의 순수함을 통하여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詩에서 우리는 아마도 어떤 사실적인 것으로서의 겨울 저녁에 대한 기술·묘사를 기대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詩는 어떠한 곳에서 가끔 일어날 수 있는 겨울 저녁에 대한 묘사도, 또한 장차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겨울 저녁에 대한 단순한 묘사도 아니다(US, 16참조). 그렇다면 이 詩, 즉 말해진 것 속에서의 언어의 말하기는 어떠한 방식으로 生起하는가?
이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문학적 접근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언어가 말한다는 본래적·근원적 의미의 철학적 접근(인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를테면 트라클의 시에서 첫 번째 연의 두 행을 보면, 이 시는 창, 눈, 종소리를 불러내고 있다. 이렇게 불러냄으로써 불려진 것을 우리들 가까이에 오게 한다. 말하자면 사물들이 와서 사물로서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평소에 그러한 사물들과 또한 그것들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시인의 '말'에 의해서 그것들의 존재를 깨닫게 되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의 말이란 존재자들을 더욱더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존재자들을 명명함으로써 존재자들(사물들)을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먼저 이미 언어가 말을 구성하고 있고, 우리 인간은 단지 자신의 (존재)언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난 후, 우리가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경청해야 하고 언어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말하도록 허용해야만 한다(US, 9-10참조).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양식이 이미 언어의 말함에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언어가 그의 말함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영역 속에 우리가 속해 있는 정도로만 우리는 언어의 말함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언어에 관해서 숙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와 함께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우리 자신 안이 아니라 언어의 말함 안에 머물도록 하기 위하여 언어의 말함 안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US, 10)." 언어는 오직 언어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만 언어의 말함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해 줄 것이다. 인간이 말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계속되는 이 인정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는 실제로 "언어 자체가 말한다"는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언어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본래적인 말함을 인정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2) 말과 사물
주지하듯이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Das Wesen der Sprache)]과 [말(Das Wort)]이라는 논문에서 슈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가 쓴 "말(Das Wort)"이라는 詩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 시를 그는, 시인이 언어와 함께 겪는 경험, 곧 시인이 언어의 본질을 깨닫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US, 149참조). 그렇지만 이러한 언어와 더불어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실험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한번쯤 언어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주목해 본다(US, 149)"는 태도를 의미하며,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어 속에다 머무르게 함에 대해 반성해 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메타 언어나 메타 언어학적 의미에서 언어에 관한 그 어떤 지식을 모아들이는 일은 여기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그 자신의 물음이 근대 형이상학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제기된 적조차 없으며, 또 메타 언어라는 의미에서의 그런 연구조차 이러한 형이상학의 입장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메타언어학(Metalinguistik)이란 모든 언어를 철저히 기술화함으로써 오직 범세계적으로 기능하는 이른바 정보도구로 환원시키는 하나의 형이상학인 것이다(US, 150)."
그리고 우리가 언어와 더불어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의 길을 통해 어떤 것에 도달하기 하기 위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따르는 것(US, 149참조)"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제대로 언어에 주의하지 못하고 따라서 언어 자체를 직시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언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 그 언어를 신뢰하는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시인을 불러들인다. 그 이유는 시인이 언어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언어와의 관계를 가장 명백히 드러내 주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한 관계를 고유하게 언어화한다. 그러나 휄더린, 트라클 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러한 각별한 관심은 여하한 모든 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즉 일반적으로 시인들은 '언어'를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훌륭한 표상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에 따르자면, 시란 자신이 이미 표상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며, 이렇게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 詩的 대상들은 아름답게 빛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적 대상들은 언어와는 별개의 것이며, 언어 없이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관심을 가지는 시인들은 결코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시인들은, 진정으로 '소중한 것(사물)'에 적당한 이름을 발견할 수 없을 때, 결국 그 사물도 잃어버리게 되며, 바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비로소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시인들은 말이 없이는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체념을 배우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체념은 부정적 의미의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다루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이름이 바로 '체념(Verzicht)'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회상적 사유(Andenken) 속에서 '말'이라는 보물을 보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시인은 체념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체념되는 것은 시인이 언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관계(Ver- h ltnis)'이다. 다시 말해 처음 이 관계 하에서 사물은 말에 우선하는 것이었고, 시인은 사물에 대해 단지 적절한 말을 부여하는 자였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있어서 말은 사물에 대한 시인의 표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이데거는, 시인이 말을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도구로서 생각하던 기존의 입장에서 언어에 청종하는 입장에로 나아가도록 촉구한다. 따라서 이제 체념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주체로서의 입장, 즉 주체로서의 인간이며, 그 인간이 존재의 언어를 청종하는 현존재로 변화되는 것이다. 시인은 드디어 언어의 요구, 즉 말건넴(Zusage)에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US, 220참조).
베르나스코니의 견해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말]이라는 이 논문의 원래 제목은 [詩作과 사유(Dichten und Denken)]였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는 '시인과 사유가'가 근원적인 사유에 있어서는 서로 '가까움(동근원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근원적인 가까움은 바로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이른바 "관계(Verh ltnis)"의 의미로서, 일종의 공속성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과 사유가는 대화의 사건 속에 존재하는 이웃일 뿐만 아니라 "말"이라는 詩의 주제에서처럼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이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시인과 사유가 사이의 대화는 말과 사물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인 경험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가까움이며, 모든 위대한 시작품들이 이러한 사유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사유와 詩作의 '이웃함(Nachbarschaft, 인접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말함의 탁월한 두 방식인 시작하는 일과 사유하는 일은 각각 고유하게 탐구되어야 하는 것 이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이웃함에서 탐구되어야 한다(US, 175).
이처럼 시작과 사유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사유와 시작은 '동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공통된 뿌리는 언어의 본질이고 오로지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움직인다. 휄더린에 대한 하이데거의 많은 논문들이 그러하듯이, 마찬가지로 게오르게에 대한 그의 논문들도 이른바 "시인과 사유가 사이의 대화"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베르나스코니가 언급하듯이,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시인과 사유가의 대화는 하나의 시를 단지 철학적 언어로 해석한다거나, 한 시인의 내면적 뿌리를 특정 철학적 관점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는 사물들의 만남의 기초이고 그래서 그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언어는 사물들이 현전하는 것으로, 또 의미있는 것으로 만나질 수 있는 자리를 개시해 준다. 말하자면 "언어는 최초로 존재자들을 명명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자들을 말과 현존 속으로 가져다 주는 것이다(HW, 61)".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언어의 生起的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기하는 언어의 본질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다시 게오르게의 "말" 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으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나는 슬프게도 체념을 배웠다네 :
말이 결여된 곳에는 어떠한 사물도 없을 것이라는 체념을(US, 162).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사물들은 말, 언어 안에서 사물들이 되고 비로소 존재한다(EM, 16)"고 주장한다. 이 시에서도 바로 "말이 없는 곳에는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해석은, 우리에게 말은 사물을 그 사물로 부르고 또 명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부르고 명명하는 것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이름이란 단순히 어떤 것에 붙여진 지시 기호가 아니라, 가령 "왕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라고 하듯이(US, 154참조), 이것은 일종의 명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부름이 사물(존재자)로 하여금 그 사물로 있게 하며, 사물은 언어로 인하여 비로소 그 사물로서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해석에 의하면 "말과 사물은, 비록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것이다(US, 181)." 그러면 말과 사물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 하이데거도 지적하듯이, 말은 사물과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어학자들이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 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사물(W rterdinge)이라고 불렀던 것, 즉 말의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흔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메타언어학자 또한 이러한 말을 대상 또는 사물로서만 다루려고 한다. 즉 언어학자나 메타 언어학자는 '드러남'의 본래적인 의미에서부터 언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를 대상이나 사물로 다루려는 것은 말의 역동성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면을 숨기도 있는 말들에게 정적인 특징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말은 사물과는 다른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말이란, 시인으로 하여금 그가 사물을 그 사물의 존재 속에 간직하고 유지하는 자가 되도록, 그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US, 158)."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 말 건넴을 듣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언어가 자신의 본질을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 건네고 있기 때문이다(US, 169참조). 이제 우리의 물음은 다시 언어의 본질에로 옮겨진다. 그렇다면 언어가 건네는 그의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3) 언어의 본질과 본질의 언어
하이데거는 세 가지 강연(Vortr ge)을 싣고 있는 그의 논문 [언어의 본질]에서 "언어의 본질은 곧 본질의 언어이다(Das Wesen der Sprache : Die Sprache des Wesens)"라는 주도명제 하에서 언어를 사유적으로 경험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앞에서 우리가 언급했던, 게오르크의 "말"이라는 詩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시적인 체험을 숙고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사실 이러한 우회적인 설명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유는 詩作과 직접적인 '이웃함(Nachbarschaft)'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말함의 탁월한 두 가지 방식인 詩作과 사유함은 각각 저마다 고유하게 탐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이웃관계에서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US, 175참조). 하지만 사유와 詩作은 가까움(N he) 속에서 서로 관계함으로써, 이웃함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가까움은 거리 상으로 '약간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상호 간에 거리 상으로 별로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 자신을 이주시킨다고 해서 그 자신과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거리 상으로 상호 간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자신이 체류한다고 해서 이웃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하이데거는 비유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고립된 두 개의 농가는, 비록 한 시간이상 들판을 가로질러 가야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거리 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하여 도시의 두 가정은, 그들이 같은 거리에서 맞은 편에 살고 있을 지라도, 또는 심지어 같은 건물에 살고 있을 지라도 결코 이웃처럼 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US, 198).
이러한 하이데거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이웃함'이란 시간과 거리의 의미, 즉 시·공간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처럼 '이웃함'이 시·공간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과연 어떠한 종류의 관계(Verh lt- nis)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웃함'을 특징짓는 것은 "서로 마주 봄(Gegen-einander- ber)(US, 176, 199)"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이 '서로 마주 봄'은 결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사방세계(Geviert) 전체와 마찬가지로 세계사물의 관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가까움은 그것들이 이웃해 있는 '서로 마주 봄'에서 詩作과 사유뿐만 아니라 사방세계까지도 발생시킨다. 하이데거는 가까움이 이렇게 길을 트고 있는 것(Be-w gend)을 '인접성(Nah- nis)'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접성으로서 가까움(die N he als die Nahnis)의 본질은 "거리(Abstand)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세계의 영역이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길을 트는 데에 있다(US, 200)"고 강조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의 본질은 '말함'에 있다(US, 241참조). 그리고 이 말함은 "보여줌(Zeigen), 나타나게 함(Erscheinen lassen), 세계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서 밝히면서 감추는 관계에서 자유롭게 함(lichtend-verbergend- freigebend)"을 의미하는 것이다(US, 188, 202, 241). 이러한 언어의 본질로서의 말함은 결국 '가까움의 본질'로 되돌아간다. 그 이유는 '가까움의 본질'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방세계의 것들(곧 하늘과 땅, 가사자인 인간들과 신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詩作과 사유' 사이의 이웃함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가까움'과 '나타나게 함으로써의 말함'은 언어의 현존자(das Wesende)이다. 그러므로 '가까움'과 '나타나게 함으로써의 말함'은 언어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언어란 사방세계의 말함(die Sage)이며, 이것은 인간과 언어 사이에 존립하는 그 관계 - 우리가 말하는 과정 속에서 언어와 맺게 되는 그런 관계 - 의 단순한 하나의 관계 축이 아니다. 언어는 세계를 움직이는 말함이며, 모든 관계 중의 관계(das Verh ltnis aller Verh ltnisse)이다. 언어는 세계방역에 대하여 '서로 마주 봄(das Gegen-einander- ber)'과 조화를 이루어내면서 풍성하게 한다. 언어는, 언어 스스로가 (곧 말함이) 자신에게 머물고자함으로써, 세계방역을 간직하며 보호하는 것이다(US, 203).
이와 같이 언어는 사방세계를 벗어나서는 결코 그 어떤 식으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언어는 오직 사방세계 내에서 이 사방의 관계로서 존재한다. 즉 언어는 형이상학적으로 표상되듯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이미 하이데거가 '인접성'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사방 안에 편재하는 가까움(N he)이다. 이것을 좀 달리 표현해 보면, 언어란 '근원적인 모음(urspr ngliche Versammlung)'인 것이다. 그리고 사방세계의 서로 마주 봄이 길을 트고 있는 이른바 '인접성으로서의 가까움'은 언제나 언어적인 말함(Sage)으로서 완성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이제 하나의 변형(Wendung)이 일어난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변형'은 이른바 그의 주도적 명제인 "언어의 본질은 곧 본질의 언어"라는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이 명제의 첫 번째 문구에서 표현된 '본질'이란 말은 '그 무엇임(to ti estin)'을 뜻한다. 이 문구에서는 '언어'가 주어이며, 이 주어의 '본질(essentia)'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와 같이 이해된 본질은, 사태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할 경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저 개념이나 혹은 저 표상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US, 189- 190)." 말하자면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표상영역 속에 갇혀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명제의 두 번째 문구에서는 단순히 낱말의 뒤집음(Umschlag)만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단순히 본질이 주어로 뒤바뀌고 또 언어가 이 주어에 의해 서술되어 사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뒤바꿈은, 형이상학적인 표상으로부터 더 이상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그런 사유로 나아가는 변형이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문구에서 콜론(Dop- pelpunkt) 앞에서의 '본질'이, 그 무엇임(Was-sein, 무엇으로-있음)을 가리키는 낱말, 곧 인간 언어의 본질적인 것이었다면, 두 번째 문구에서의 본질은 '존속함(W hren, 참되게 머물러 있음)'과 '머무름(Weilen)'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콜론 뒤의 변형은 체류함(Weilenden), 현존함(Anwesend), 또는 지속함(W hrend) 등의 소리내지 않는 '靜寂의 울림(das Gel ut der Stille)과 관계 있는 것이다. 정적은 언어가 말하는(부르는) 본래적인 소리(울림)이며, 언어는 정적의 소리로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강조하듯이 바로 이러한 정적의 소리(울림), 곧 존재의 소리에 의해 세계는 세계화되고, 사물은 사물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우선 말하기 전에, 아니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저 정적의 울림, 곧 존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말하기(Sprechen)는 무엇보다도 먼저 듣기(H ren)이다. [존재]언어에의 이러한 듣기는 여 타의 모든 [청각적으로] 진행되는 듣기보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앞선다. 우리는 언어를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울림으로서의] 언어로부터 말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그때 그때마다 언어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들었는가? 우리는 언어의 말하기를 듣는다(US, 243; [ ]는 필자의 삽입임).
이처럼 우리 인간은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들려진 말에 따라 언제나 말하는 것이다(US, 243참조). 이제 우리는 비로소 詩에서 말해진 것 속에는 '언어의 말하기'가 生起한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언어의 말하기'가 '인간적 말하기'에 선행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 이러한 시원적 언어는 곧 존재 자체이다. 존재는 언어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우리의 말하기는 이에 대한 하나의 응대이다. 우리의 말하기는 의견을 내놓고 기호로 표시하는 주관의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말하기의 최종적인 근거, 곧 시원적 언어에 대한 응답이다. 사유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응대로서 존재에 상관하듯이, 인간의 언어도 존재의 더 시원적이고 소리없는 언어에 상관하는 것이다.
3.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이데거의 전기사유에서는 언어를 인간 현존재에서 사유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실존범주로 간주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을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다. 그러한 기초 존재론적 사유는 언어를 인간 현존재의 지평에서만 다루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로고스를 가진 동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서 존재를 사유한 형이상학적 흔적은 결국 전래의 형이상학과 같은 운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하이데거는 이렇게 경고한다. 즉 "완성된 형이상학의 시대에서의 철학은 인간학이 된다. 우리가 '철학적 인간학'을 말하든 말하지 않든 간에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는 동안에 철학은 인간학이 되어버렸다. (…) 인간학이 되었기에, 철학은 형이상학에서 좌초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형이상학의 가능성에서 벗어나려면 사유의 전면적인 전회가 요구된다. 그것은 존재사유의 방향전환, 곧 인간에서부터가 아니라 (존재의)언어에서부터 언어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전회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사유과정에서 일어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 것도, 현존재가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이며, 인간 현존재가 바로 '존재이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간이 '현존재'로 파악된 것도 존재가 스스로를 生起시키는 장소(Da)라는 의미에서이다. 전회 이후, 하이데거는 인간학적 언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사유에 알맞은 고유한 언어, 특히 詩作的 언어를 통해서 언어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경우에, 원래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언어 자체이며, 인간은 존재의 언어가 깃들이는 처소(Da)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언어가 말하고 언어가 존재를 증여하는 것이며, 인간은 이에 대해 단지 응답할 뿐인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인간 현존재'라는 우회로를 따라서 존재 자체에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형이상학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지녔기에, 그러한 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취한 것이 바로 전회의 본래적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존재의 비밀은 바로 언어의 본질에 있으며, "언어의 본질은 곧 존재의 언어이다(US, 166, 170, 174. 189)". 따라서 전회는 존재를 언어의 본질, 즉 존재의 언어에 따라서 사유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경우에 존재 사유는 존재를 묻는 데서가 아니라 존재의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하이데거의 전기사유에서처럼 말하는 자가 인간 현존재일 경우, 그의 존재 사유는 존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묻는 것이며, 존재를 묻는 과정에서 인간 현존재는 존재 물음의 주체가 되고 존재는 이 물음의 객체가 되고 만다. 그래서 존재물음은 결코 객체일 수 없는 존재가 주체에 의해 객관화되는 특성을 띠는 '주관주의적 형이상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벗어나는 데 하이데거적 전회의 본질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 후기사유의 특징은 언어를 통해서 존재와 인간이 불가분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한 관계에서 출발하는 그의 존재사유는 그 관계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그 관계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한 이상, 그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도 언어 사유를 통해서 해명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곧 '언어사유'로 간주되어도 무방하리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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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Vom Wesen der Sprache in Heideggers Philosophie
Bae, Sang-Sik(Taegu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Diese Arbeit betrachtet das Wesen der Sprache vom ph nomenologische Standpunkt aus das spielt eine wichtige Rolle in Heideggers Philosophie. Nach zwei Standpunkte der Heideggers Philosophie, im Erste Standpunkt betrachtet diese Arbeit die Rede als das ontologisch-existenziale Wesen der Sprache und im Sp t erl utert das Wesen der Sprache als Seinsort in dem Sein sich zeigt.
Erste, dem existenzialen Wesen der Sprache gibt Heidegger einen eigenen Terminus. Die Wurzeln der verlautenden Sprache, das Wesen der Sprache, das existenziale Sprachwesen, nennt er in "Sein und Zeit", Rede. D. h. Das existenzial- ontologische Wesen der Sprache, das seinen Ort in der existenzial aufgeschlossen- heit hat, fa t Heidegger terminologisch als Rede. Rede ist somit ein ontologisch existenzialer Terminus.
Nach Heidegger, Mensch herstellt nicht die Sprache, sondern allein ist Einer der dem Rufe des Seins folgt. Deshalb, das menschlich Sprechen ist nicht einfach der menschlich Ausdrucksakt, sondern die Antwort vom Anspruch des Seins als das Gel ut der Still. Hier hinweist Heidegger darauf da die gel ufig Auffassung von der Sprache nicht das urspr nglich Wesen der Sprache erreichen kann, und verlangt den verschieden Bezug zu der gel ufig Auffassung von der Sprache.
Key Words : Sprache, Rede, Sage, Dasein, Dichtung
[출처] 하이데거의 언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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