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01.11 니체, 디오니소스 긍정의 철학 - 제1부 니체 철학 입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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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20:00 현대 철학/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를 요약 정리한 글이다.
2.고전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의 전환(1870-1876년 초)
바젤에서 니체는 바그너뿐 아니라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 신학자 오버베크Fritz Overbeck, 종교사학자이자 법사학자인 바흐오펜Johann Jakob Bachofen, 동물학 교수 뤼티마이어Ludwig Rütimeyer등 유능한 학자와 교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니체가 저술한 주요 작품은 〈언어의 근원에 관하여Vom Ursprung der Sprache〉(1869/70), 〈그리스 음악 드라마Das griechische Musikdrama〉, 〈소크라테스와 비극Sokrates und die Tragödie>, 〈디오니소스적 세계관Die dionysische Weltanschauung〉, 〈비극적 사유의 탄생Die Geburt des tragischen Gedankens〉 (1870), 〈수사학Rhetorik〉 (1874) 등이다.
1870년 1월과 2월 니체는 <그리스 음악과 드라마>, <소크라테스와 비극>에 대해 강연한다. 이 두 강연은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에 관한 미출간 글과 함께 『비극의 탄생』의 핵심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 강연은 바젤에서 니체에 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니체는 문헌학보다 철학이 자신에게 맞는 학문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이 해 4월 초 니체는 정교수가 되고, 7월에는 독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휴가를 얻는다. 그러나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려 9월에 의병제대하고, 10월에 바젤로 돌아간다. 이십대에 정교수가 된 니체의 강의는 학생들을 충실히 지도하는 교수라는 평판을 얻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야심에 몰두하여, 마침내 자신의 평판 전체를 뒤흔들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1871년 니체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전해진 전쟁Certamen quod dicitur Homeri et Hesiodi>를 출판하고, 라이니셰스 무제움 퓌어 필로로기 (1842-1869)의 색인을 작성한다. 또한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Sokrates und die griechische Tragödie>를 완성하며, 바젤 대학에 철학 교수 자리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하기도 한다. 니체는 친구인 로데를 바젤 대학과 취리히 대학에 추천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거절당한다. 이로 인해 니체는 자신의 사회적 역량에 회의를 품게 된다. 1872년, 드디어 니체의 첫 저작인 『비극의 탄생』이 출판된다. 이 책은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문화 정치를 위한 프로그램적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동시에 니체의 주요한 철학적 사상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저작이기도 하다. 문제는 고대 그리스를 비극 안에서 재조명한다는 문헌학적 의도에 부합하는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Artisten-Metaphysik을 제안하며, 실천적 염세주의라는 병증을 거부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 및 구원의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예술을 통한 삶과 세계의 정당화작업을 기획한다. 니체의 이러한 기획은 삶과 세계에 대한 정당화가 아닌, 그것에 대한 긍정 가능성 제시로 이행하면서, 이후 포기되지만, 니체의 주요한 관점 및 개념들이 이 저작에서 이미 그 싹을 보여주고 있다.
니체는 예술가-형이상학의 일환으로 그리스 문화에 관심을 가지며,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을 변증법적 관계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구분은 이미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이 수행했던 것이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지나치면 혼란과 타락이 득세하고, 아폴론적이 지나치면 주지주의가 득세한다는 것,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힘과 아폴론적 꿈의 힘의 공속 관계가 아티카 비극을 낳았다는 것, 그리고 이 비극이 결국 소크라테스의 논리주의에 의해 몰락했다는 등의 사유는 온전한 니체의 것이다. 니체는 1886년 새로 작성한 서문인 <자기 비판의 시도Versuch einer Selbstkritik>에서 이 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는 하나, 이 책의 중요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비극에 대한 니체의 이론은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나, 곧 동료 문헌학자들의 침묵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스승인 리츨마저 이 책에 대해 침묵하였으며, 니체는 그에게 자신의 책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으나, 냉담한 반응만 마주하게 될 뿐이었다. 리츨은 자신의 일기장에 “재간에 찬 야단스러움”이라고 쓸 정도로 극도의 실망감을 표명했다. 니체를 바젤 대학에 추천했던 사람 중 한명인 우제너는 “이와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은 학문적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마침내 추어 포르테의 후배이자, 문헌학자였던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Ulrich von Wilamowitz-Möllendorff가 32쪽에 거쳐 긴 반박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니체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문헌학적 오류를 지적하면서, “빛바랜 염세주의와”와 “우상 바그너가 숭배되고 있는” 니체의 철학적 입장 역시 반박한다. 비록 바그너와 오버베크, 부르크하르트 등의 비문헌학자들이 이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로데도 “엉터리 문헌학”이라는 제목으로 빌라모비츠에 대한 반박문을 기고하긴 했으나, 니체는 문헌학자로서의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실추된다.
첫 저작의 여파로 니체는 교수직을 그만둘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여행을 하기도 하고 부활절 휴가 때 <만프레드 명상곡>을 작곡하기도 한다. 5월에는 바이로이트로 가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릴 극장의 기공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월부터 학사원 협회의 초청을 받아 “우리의 교육기관의 미래에 관하여Über die zukunf unserer Bildungsanstalten"이라는 제목의 다섯 번에 걸친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 강연에는 문헌학자가 아닌 독일 문화에 대한 비판자와 정치적 교육가가 되기를 원하는 니체의 소망이 놓여 있었다. 계몽주의 문화와 교양, 국가의 교양 형성 개입 등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이 강연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앞서 언급한 『비극의 탄생』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이내 실추되어버렸다. 다섯 번의 강연 이후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그리스를 문화적 자기 창조의 전형으로 놓고, 이를 독일의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는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한 일련의 강연을 하고 1873년까지 여러 글들을 작성한다. 그는 철학적인 방법으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등을 읽으며 철학적 자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런 시도 끝에 그는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Die Wahrheit und Lüge im aussermoralischen Sinne>(1872)라는 글을 쓰게 된다. 이 글은 게르버Gustav Gerber의 『예술로서의 언어Die Sprache als Kunst』의 첫 권(1871)을 읽은 후, 그것의 영향 아래 형성된 자신의 언어철학적 입장을 개진하면서 객관성 및 객관적 진리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글에서 보이는 18세기 중,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의 낭만주의적 언어철학과 니체의 유사성은 게르버에게 미친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의 영향에 기인한다. 니체는 훔볼트나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혹은 하만 Johann George Hamann등을 직접 접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이로써 계몽주의 시대와 결별하는 반시대적 인물이 되어 간다.
1873년 다비드 슈트라우스를 비판하는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1권이 출간된다. 여기서 니체는 자신을 정치 저술가 혹은 정치 교육가로 이해하며, 지배적인 시대정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화의 지반을 준비하고자 한다. 니체는 원래 이 글을 10개 내지 13개의 논문으로 준비하고자 했으나, 실제로는 4개 주제로 구성한다. 슈트라우스를 다룬 1권, 삶에 있어서 역사의 공과를 다룬 2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다룬 3권, 바그너를 다룬 4권이 그것이다.
그는 1권에서 슈트라우스를 예술을 훼손하는 “교양 있는 속물Bildung-spfilister"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를 통해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신학자였으나 그는 이제, 바그너의 새로운 신화적 예술 이론에 반대하고, 예술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며, 학문과 사회의 지속적인 진보와 이성의 힘과 선을 믿고, 개인적 삶 안에 있는 비극적인 모순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니체는 2권에서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며, 역사주의를 생명력 약화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이해한다. 그는 인간의 삶이 역사의식의 과중함으로 인하여 병들게 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이 시기부터 바그너와 니체 사이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진다. 바그너는 니체라는 젊은 교수를 자신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능 있고 학적인 신봉자이자 자신의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보았고, 이러한 이유에서 니체를 곁에 두고 싶어했다. 반면 니체는 단순한 바그너주의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프랑스인, 유대인에 대한 경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드러낸 『파르지팔Parzival』은 그리스도교의 이념에 굴복해버린 바그너라는 상을 니체에게 각인시켜 버린다.
니체는 이때부터 관심을 볼테르Voltaire로 옮기게 되고, 니체의 <독일인에게 드리는 경고> 역시 바그너 서클에 의해 거부당한다. 니체는 이 시기의 바젤 대학 도서관엣 자연과학 책들을 수없이 탐독하며, 이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개념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874년 『반시대적 고찰』의 2, 3권이 출간되고, 이 해에 니체의 1873년 강의를 들었던 파울 레Paul Ree와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된다. 그는 반시대적 고찰의 3권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ls Erzieher>에서 쇼펜하우어를 교육자로 다루며, 쇼펜하우어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바그너에게는 냉정한 거리를 둔 채로 글을 작성한다. 그가 쓴 네 번째 반시대적 고찰인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in Bayreuth>에서 바그너는 위대한 개인으로 형상화되지만, 그 행간에는 니체 스스로 바그너를 청년기의 숭배 대상으로, 이미 오래전에 멀리해버린 일종의 기념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 숨겨져 있다. 사실 니체는 이 책을 “우리 문헌학자들”이라 쓰려고 계획했었고, 그 스스로 4권이 쓸모없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에 비추어 보자면, 이 글에 나타나는 독특한 개인이자 철학적 천재는 실은 바그너가 아닌 니체 자신에 가깝다는 것을 간파해볼 수 있다.
니체는 마침내 1876년 8월 바이로이트 축제의 마지막 리허설에서 바그너에 대한 숭배 분위기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며칠 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축제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바이로이트를 떠나버린다. 겨울 학기가 시작될 무렵 니체와 오버베크의 강의를 들은 젊은 음악가였던 쾨젤리츠는 니체의 가장 충실한 학생이 되며, 니체는 그에게 페터 가스트Peter Gast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그는 니체 사후 니체의 여동생인 엘리자베트와 함께 『힘에의 의지』의 편집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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