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10.30 설명과 기술
- 2019.10.30 윤리학에 관한 강의
- 2019.10.30 『논리철학논고』발제문
2015년 2학기 언어철학 레포트
설명(說明)과 기술(記述)
- 의미론(論)에 대한 철학적 명료화 시도
서론
철학의 목표는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만 과학과 철학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물음에 대한 답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진리로의 도정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과학과 철학 사이의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또, 과학적 탐구가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들 역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철학은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물론 연역과 귀납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실로 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가질 수 있는 오해 중 하나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양도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오해는 철학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며, 기존의 철학자들이 과학과 같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까닭은 단순히 방법론의 차이에 있다는 생각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학과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것에서 벗어나, 과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 채 여전히 철학자들을 괴롭히는 가망 없어 보이는 물음들에 대해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철학의 목표는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질문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애초에 무엇을 질문으로 여겨왔는가? 우리가 설명을 시도하려는 일련의 질문들은 얼마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물론 지금까지 발생한 철학적 혼란들은 단순히 그것에 대해 충분하게 숙고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이전에, 단순히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를 먼저 따져봐야 되지 않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내가 ‘시간’에 대해 설명하려 들지 않을 때에,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내가 설명을 시도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심오함에 아연해지기 전에, 나는 그 단어가 올바른 설명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철학자들은 ‘실재’의 의미에 플라톤이 도달한 것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지 않다......”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플라톤이 도대체 그렇게 멀리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또는, 우리가 그리 멀리 나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건 플라톤이 그렇게 명민하였기 때문인가?>¹ 우리는 철학이 설명을 제공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나는 앞서 철학과 과학의 동일한 목표가 세계를 바로 보는 것에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두 물음의 형식에 관한 고찰일 뿐,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가를 설명하기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따라서 나는 그 차이를 일단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좀 더 정교하게 드러내고 싶은데, “과학이 세계를 보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반면에, 철학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과학의 목표가 설명을 통해 실재로 접근해나간다면, 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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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와 가치 MS 111 133: 1931.8.24
는 순전히 기술적이다. 과학이 명제들을 생산하고, 지식을 늘릴 때 철학은 그러한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잘못 걸어왔는지 고찰하고, 오류를 교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사유에 한계를 그음으로써 문제에 대답하려고 할 때, 철학자들의 지향점이 모두 한계 너머의 초월에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모든 철학은 나름의 물음에 답하려고 시도하는 동시에, 그 물음이 얼마나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는가를 깨닫는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파악한 이 차이가 과연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이것이 두 개의 전제 위에 서있으며, 하나의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겠다.
먼저, 위와 같은 접근은 철학적 물음이 사실 아무런 물음도 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즉 우리가 추구하던 물음이 애초에 성립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물음은 단순히 우리가 언어의 형식(논리)을 오해한 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대답 없는 물음, 즉 설명을 제공할 수 없는 물음은 전혀 물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6.5 답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 때에는 언제나 물음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답 없는 수수께끼 물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물음이 제대로 성립할 수 있다면 그 물음에 대한 답도 가능하다.
6.51 ...왜냐하면 의심은 물음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의심일 수 있고, 물음은 답이 있을 때에만 물음일 수 있으며, 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실제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6.521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그 문제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에서 깨달을 수 있다.²
나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앞에서도 암시하고 있다시피 실로 그러한 물음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철학적 문제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접근법이며, 비유하자면 산맥의 반대편에서 길을 뚫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존의 철학적 탐구 방식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러셀(B. Russel)이 증명한 것처럼, 명제의 “겉보기 논리적 형식”은 그 명제의 “진짜 논리적 형식”일 필요가 없다.³ 그러한 차이는 일상 언어 속에 산재해있으며, 그렇기에 철학적 명제가 성립, 탐구되는 방식도 이러한 의심의 분석대상이 되는 것이다.(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떠올려보자. 골드바흐의 추측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증명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이 실로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모순되지 않고, 존재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모순되지 않는다면, 즉 수학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고 반증 될 수도 없다면, 그 때 수학자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할까?⁴이 지점에서 수학자들이 느끼는 혼란은 철학자들이 느끼는 것과 동류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철학이 메타적이라는 사실, 즉 스스로에게도 역시 메타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점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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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 6.51, 6.521
3.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4.0031
많은 수의 대륙철학자들은, 언어가 하나의 의미만을 전달한다는 입장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심오한 사유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곤 한다. “언어로 도저히 담아내기 어려운 심오한 사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사유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여, 상징이나 알레고리 등을 활용하거나, 새로운 종류의 단어를 조합해내거나, 아예 일부로 모호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전제하는 명료화될 수 없는 심오한 사유는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이러한 언어에 대한 불신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직관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단어들을 가지고 무작위로 구성한, 거짓된 심오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는 쉽다. 심지어는 버튼만 누르면 논문에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 무작위로 조합되어, 하나의 논문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심오해 보이는 어떤 문장은, 사실 전혀 심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저 직관으로만 정당화된 이 믿음은 거짓된 심오함과 진짜 심오함, 명료화될 수 있는 심오함과 명료화될 수 없는 심오함 등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그러니까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사유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핵심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생각들(윤리나 미학)은 본질적으로 말해질 수 없으며, 그것의 심오함은 단지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직관이나 신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기 사유에 나타나는 논리적 형식의 분석과 후기 사유에서 고찰되는 삶의 형식에 대한 철학함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메타적으로 수행하는 다른 학문에 대한 정당화가, 무엇보다 철학 그 자신에게 먼저 이루어져야하는 것으로 보았다. 철학에 대한 메타 철학, 이것이 철학적 명제에 대한 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그렇기에 철학적 명료화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종류의 철학은 순전히 기술적이어야 될 것이다. 즉, 이러한 방식은 항상 반-이론적이고, 누군가가 사태에 대해 제공하려는 설명이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방향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철학자들이 그들이 탐구하는 주제의 최종적인 분석-진리를 목표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나온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고찰해보자. 철학자는 “시간”이라는 관념에 있어 하나의 단일한 설명을 제공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철학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물리학적 세계관 속에서 정의된 ‘시간’과 메타-분석적으로 ‘시간’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시도 사이의 간극)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갖는 난점 중 하나는 시간의 정의에 대한 설명을 그 사용에 있어 고찰하기보다 조건과 결합의 알고리즘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수정체와 같이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지반위에 올려두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념은 여전히, 설명이 분석을 통해 일상 언어의 범주를 완벽하게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언어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흐름은 유사와 같아, 거기에 집착할수록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실로 물음이 가진 형식상의 동일성은 마치 과학을 탐구하듯이 철학을 탐구하도록 철학자를 이끈다. “앎이란 무엇인가?” “실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적어도 질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같은 방식으로 탐구할 수 있는 무언가라는 믿음을 철학자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러한 질문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단어들은 얼마나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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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postolos Doxiadis, Uncle Petors and Goldbach's Conjecture
이를테면 앎에 대한 정의를 우리가 아무리 자세하게 분석한다 하더라도⁵, 우리가 실제의 언어 사용에 대해 고찰할 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어그러지지 않는가? 그러한 언어 놀
이가 실제로 벌어지는(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을 고찰한다면, 이러한 불합리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P를 알기 위해서는 P가 참이어야한다.” 그러나 내가 P를 안다고 말할 때 P가 그러함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떻게 우리가 오류를 전혀 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런 앎의 정의에 따르자면 내가 “알았었다”고 말하는 모든 상황은 단순한 착각이나 오류의 범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참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이제, 이를테면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뇌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냐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중에 실제로 밝혀진다면(나의 두개골을 절제해보는 상황), “나는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지금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저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고,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항상 의심해야 될까?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앎’이라는 개념은 전혀 사용될 수 없다.(아무런 정당화 없이 시작되는 의심) 이는 우리가 전제했던 또 하나의 오류, 이상 언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성하려는 언어는, 논리적으로 완전한 형태의 이상적인 언어이며,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이러한 완전한 범주를 벗어난, 하나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일반성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왜곡된 설명과, 니체(Nietzsche)가 지적했던 서양철학의 유구한 질병- 피안과 차안을 나눔으로써 저 피안을 참된 것으로, 차안을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지고한 플라톤(Plato)의 망령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명제의 일반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사정이 이러이러하다” <이것이 우리들이 자신에게 무수히 되풀이하는 그런 종류의 문장이다. 우리들은 되풀이해서 사물의 본성을 뒤쫓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들은 단지 사물의 본성을 고찰하는 형식을 따라서 가고 있을 뿐이다.>⁶ 말하자면, 우리가 전제하는 이상의 언어는, 쉴 새 없이 변형되며 뛰어다니는 언어의 사용을 하나의 틀 안에 끼어놓으려는 행위일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디까지나 설명의 본성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설명이 실제 언어에 맞춰 틀을 구성해야할 노릇이지 그 반대는 기만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난점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대안 철학⁷이 취하고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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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e Gettier problem(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에 나오는 앎의 전통적 정의를 지칭한다. “1. P가 참이다 2. S가 P를 믿는다. 3. P에 대한 S의 믿음이 정당화 된다.”
6.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14
7. 바디우(Alain Badiou)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론과 체계에 대한) 반-철학으로, 로티(Richard Rorty)는 (진리의 포기라는 측면에서) 교화철학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들의 정의는 바디우가 『철학적 탐구』의 기술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그는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논의를 『논고』로 한정한다.), 또 로티가 메타-설명에서 비롯되는 규범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치 못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난제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일반적 설명의 욕구)가 철학자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이해와 그들이 보려고 원하는 것 사이의 대립”을 기술(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의지의 저항이 극복되어야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류로부터 그것을 진리로 옮김으로써, 삶의 형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규범적 요소를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진리 탐구 자체를 포기한 것 역시 아니다.
위에서 말했던 하나의 난점과 직결되는 것으로, 교정-철학 혹은 치료-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반성(설명)에 대한 갈망을 철학자로 하여금 단념해야할 어떤 것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그를 철학적 혼란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이 철학함을 어렵게 만든다.⁸)
그러니까 우리가 제공하고자 하는 설명이 차지하고자 했던 자리는 오로지 기술로만 대체되어야한다. 다시 말해, 교정은 의미의 차원에서 “의심과, 오류, 앎, 참” 등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일상의 언어가 우리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할 일은 그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조용히 추적함으로써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정 철학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 누군가 철학에서 이론을 수립할 때, 그 이론이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성립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이후의 분석(실은 기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물론 이것은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물음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철학적 혼란의 제거) 나는 이것을 보이고자 한다.
1
문제를 고찰해보자.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법한 어떤 문제가 있다. 홍길동 씨는 하나의 사물에 두 가지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일한 대상에 대한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형성하고 있다.
그는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친구의 경험담이라는 근거로 인해 뒷받침된다.
“LA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본인의 경험이라는 근거로 인해 뒷받침된다.
사정은, ‘LA’와 ‘나성’은 모두 동일한 도시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인식주체인 홍길동은 “LA”와 “나성”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LA”와 “나성”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그런 방식으로 항상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홍길동은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은, 어떤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홍길동이 'LA'와 ‘나성’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정말 모순된 믿음을 형성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 그가 그 두 가지 기호로 서로 다른 두 도시를 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간편하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이후에 LA가 나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내가 말했던 그 도시가 바로 이 곳이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정반대되는 믿음을 형성한다고 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을 하나의 오해로 여기고 싶은가? 그러니까 나는 홍길동 씨가 모순으로 나아간 과정을 알지만, 그 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결론조차도. 홍길동 씨는 어째서 자신의 모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는가? <“LA”가 “나성”과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홍길동은 LA(=나성)에 대해 시간상으로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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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치료로서의 철학: <철학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 파리에게 파리통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보여 주는 것.>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09
에는 친구의 경험담을 근거로 하여 “LA는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형성한 것이고, 후에는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LA는 재미없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형성하고, 친구의 경험담보다 강한 근거인 본인의 경험을 믿음의 근거로 채택하여 앞의 믿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우리는 굳이 이론을 구성하지 않더라도 이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이 자리엔 전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을까? 왜냐하면 홍길동 씨가 모순으로 나아간 과정을 기술하기만 해도, 우리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철학적 난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이론에 대한 반례로 기능한다.
그러니까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문제가 이론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지 않냐는 점이다. 물론 그러한 일반 이론이 완성된다면, 우리는 모든 언어적 반례들을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가 일상적으로도 발생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철학적 이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이론이 완성되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런데 언어에 대한 그러한 하나의 역학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2
본 소논문이 최초에 의도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 이었다 :
본 소논문은 의미에 대한 언어철학의 두 가지 이론을 적용해 위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 어떤 이론이 더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러셀(Russell)의 기술 이론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지 확인해보고, 크립키(Kripke)가 지적했던 기술 이론의 문제점들을 분석하여 이러한 해결책이 적절한지에 대해 검토해 볼 것이다. 이후, 크립키(Kripke)의 직접 지시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 위 문제를 해결하는지 확인한다.
직접 지시이론은 그러나, 기술 이론과 달리 문제해결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 문제는 프레게가 제시했던 대체율의 문제와 직결되는 사례인데, 이는 직접 지시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혀온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직접 지시 이론이 이 사례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할지라도, 보편적인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까닭은 직접지시 이론이 허구적 이름으로 변용된 문제에 대해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허구적 이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내놓는 것에 대해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해볼 때, 기술이론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직접 지시이론 보다 여러 측면에서 설명의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문제는 직접 지시이론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사리 해결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직접 지시이론으로 문제를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기술 이론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이를 위해, 크립키(Kripke)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술 이론의 문제점들을 재검토해 봄으로써 기술 이론 비판에 대한 방어를 시도한다. 이후 두 이론이 각각 문제 해결에 있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는 앞서, 앞에 놓여있는 문제와 의미-이론 간의 분리를 시도했는데, 여기에는 앞서 문제의 성격에 대한 전제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론을 활용하는가? 아니면 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반례로써 문제를 가져오는가? 그 사례가 철학적 이론에 대한 반례가 될 때, 우리는 “당신의 이론으로는 이 사례를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의 이론을 틀렸다.”로는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하려고 시도해온 것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미가 발생하는 모든 사태들에 대해 하나의 단일한 설명을 제공하려는 이론들은, 그 이론이 완전해졌을 때 의미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 역시 해결될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탐구를 진행한다.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한 설명은 모든 단어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소박한 의미론에 있어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동물과 구분되지 않던 시절에도, 인간을 사냥하려는 동물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의 동료의 시선을 돌렸을 테고, 이러한 원시적인 지시 역시도 언어활동의 하나로 보이기 으로 설명하며,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을 받아들이자면, 지시하는 대상이 동일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 역시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소박한 의미론은 모든 실재에 대한 지칭이 가능하며, 그 지칭한 대상이 아무튼 간에 우리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라고-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적 표현의 의미라고 설명하는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의 의미가 소박한 의미론의 설명과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서 나오는 LA나 나성은 모두 동일한 지시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의미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것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홍길동의 문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먼저 LA와 나성을 홍길동이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의 정보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ㄱ) LA는 LA이다.
(ㄴ) LA는 나성이다.
(ㄱ)은 동어 반복 명제이며,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참이고 뜻이 없는 명제이다. 따라서 이 명제는 선험적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새로운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반면에 (ㄴ)는 동어 반복 명제가 아닌 종합 판단 명제로 우연적으로 참이며, 대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는 명제이다. (ㄱ)는 LA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참이라고 여길 명제이지만, (ㄴ)은 LA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LA가 한국에서 나성으로도 불린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의 경우, 쉽게 참이라 동의할 수 없는 명제이다. 따라서 두 명제는 정보성이, 다시 말해 인지적 가치가 다른 명제이다. 그리고 인지적 가치가 다른 두 문장은 의미 역시도 다를 것이기 때문에, LA와 나성은 같은 대상을 지칭하지만 그 두 고유명사의 의미는 같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결국 종합해보면, 홍길동에게 생긴 문제 역시 “LA”와 “나성”이라는 두 고유명사가 제공하는 정보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소박한 의미이론을 따르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과 모순되는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S) 한 문장 내에서 그 문장을 구성하는 한 단어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대체할 경우, 두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진리치는 동일해야한다.⁹
(ㄷ) 홍길동은 LA가 LA라는 것을 안다. (T)
(ㄹ) 홍길동은 LA가 나성이라는 것을 안다. (F)
LA가 LA라는 것은 동어 반복 명제이므로, 홍길동이 그것을 아는 것은 당연히 참이다. 따라서 (ㄷ)명제의 진리치 역시 참이다. 그러나 (ㄹ)의 경우, 애초에 홍길동의 문제가 생긴 바로 그 지점, “홍길동은 LA가 나성이라는 것을 모른다.”라는 명제의 부정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ㄹ)의 진리치는 거짓이 된다. 따라서 (ㄷ)와 (ㄹ), 두 문장의 의미가 동일하다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 사례는 반대로 두 문장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다시 말해, LA와 나성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러셀(B. Russel)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고유 명사를 설명할 수 있는 기술어구(descriptions)들의 연언(∨)이다. 서술이론마다 개개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기본적인 입장은 이와 같으므로 이를 서술이론의 일반적 설명으로 차용한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이라는 고유명사의 의미는 “태종 이방원의 막내아들”,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 “일 만원 권에 초상이 새겨진 사람” 등의 기술구로 나타낼 수 있으며, 고유명사의 의미는 이러한 한정 기술 어구들을 모아놓은 것을 축약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고유명사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장된 기술어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생활에 비추어 볼 때, 직관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누구야?”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사람은 “나이는 몇 살이고”, “어떠어떠한 성격을 지녔으며”, “누구누구의 아들이다.”라는 식으로, 즉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 대상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홍길동이 과연 동일한 대상에 대한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홍길동은 LA와 나성을 다른 도시로 여기고 있으므로, 홍길동에게 파악하고 있는 나성과 LA의 기술 어구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홍길동에게 있어, LA의 기술 어구 중 하나는 “나성이 아닌 어떤 도시 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홍길동은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다" ->"미국에 갖다온 친구가 말해준 그 도시는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반면, “LA is not an interesting city" -> "LA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 -> “나성이 아닌 어떤 도시 중 하나는 재미있는 도시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기술 어구로 분석해볼 경우 이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그가 “LA가 한국에서는 나성이라 불린다.”라는 말을 듣고 LA와 나성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친구의 말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성은 재미있는 도시다.”라는 믿음을 버리게 될 것이다.
서술 이론은 이론상으로 위의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크립키(Kripke)는 서술 이론에 대한 세 가지 종류의 반론을 들어, 서술 이론이 설득력 없음을 주장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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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진리치 -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진리치는 참이며,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면 진리치는 거짓이다.
다. 만약 그 비판이 이론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이것은 위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게도 심각한 반론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판들은 보다 자세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크립키(Kripke)는 어떻게 서술 이론을 비판하는가? 세 가지 비판점이 있다. 양상 논증, 오류로부터의 논증, 무지로부터의 논증이 각각 그것이다.
먼저 양상논증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시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논증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를 의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것은 불가능하다.
(2)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3)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고유명사의 의미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등의 한정 기술 어구들의 축약이자 위장된 기술 어구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이다.”라는 문장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다른 가능세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타당한 논증이고, (1)과 (2)는 기술주의의 입장에서 모두 거부하기 어려운 명제이다. 또한 이를 받아들인다면 필연적으로 (3)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기술주의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류로부터의 논증은 일종의 회의주의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논증이다. 기술 이론에 따르면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고유명사의 한정 기술 어구와 동일하다. 따라서 한정 기술 어구로 고유명사의 자리를 대체한다 해도, 진릿값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고유명사의 기술 어구가 거짓이라면, 그 기술 어구를 고유명사로 대체 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누군가 세종대왕을 “한국의 16대 대통령”과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이라는 기술 어구로 여기고 있다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은 옳지만, “한국의 16대 대통령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이다.”는 옳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선천적으로 참인 기술 어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햄릿>의 작가”라는 기술 어구로 나타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가 <햄릿>을 쓰지 않았을 경우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햄릿>은 사실 무명의 작가가 유작으로 남긴 작품이고, 셰익스피어가 후에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을 뿐이라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의미를 “<햄릿>의 작가”라는 기술 어구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설령 천문학적이라 해도 가능할 수 있기에, 기술 어구를 고유명사의 의미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기술 어구는 비록 그 확률이 천문학적으로 낮다 할지라도, 참이 아닐 수 있고 따라서 기술 어구는 이름에 대한 부연 설명의 기능만 할 수 있을 뿐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는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지로부터의 논증은 우리가 실제로 그 기술 어구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상생활에서 무리 없이 고유명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리처드 파인만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은 미국의 물리학자이다.”라는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미국의 물리학자는 리처드 파인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매우 많기 때문에, 기술 어구가 이름의 의미라면 이 사람은 리처드 파인만을 정확히 지칭하여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리 없이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이름을 지칭하여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기술 이론은 이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필요하다.
크립키의 직접지시 이론은 기술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기술 이론이 해결했던 대체율의 문제에 다시 직면해야한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직접 지시이론의 해결 방법이 보편적으로, 즉 변용된 사례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a) 홍길동은 해리포터 소설을 읽은 친구에게서 Hogwarts에 대한 묘사를 들은 후 그 마법학교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묘사를 근거로 하여 홍길동은 “Hogwartsl는 재미있는 곳이다.” 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런데 홍길동은 이후 우연히 Hogwarts에 대해 묘사해놓은 글을 하나 읽게 되는데 이 글은 오탈자로 인해 Hogwarts를 오그와트로 번역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묘사 자체도 늘어지는 문체 때문에 지루함을 느낀 홍길동은 “오그와트는 재미없는 곳”이라는 믿음을 형성하였다.
직접지시 이론은 이 사례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위 사례는 원래 문제에 있던 LA와 나성이라는 고유명사를 단순히 Hogwarts와 오그와트로 바꾸었을 뿐 다른 차이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지시 이론의 경우,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인데, Hogwarts와 오그와트는 모두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대한 이름일 뿐이므로,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름이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이 없다면 그 이름에 대한 서술 역시 무의미한 내용일 것이므로, 이에 따르면 “Hogwartsl는 재미있는 곳이다.”는 명제도 무의미한 명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해리 포터나 셜록 홈즈에 대해 설명하는 명제들은 모두 의미를 갖지 못한단 말인가? 실존 인물임이 의심되는 이름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서 크립키(Kripke)는 양상 논증, 오류로부터의 논증, 무지로부터의 논증을 들어 기술 이론이 설득력 없음을 밝히고, 본인이 제시한 직접지시 이론이 의미 이론에 대해 보다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직접지시 이론은 기술 이론과 달리 대체율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호그와트(Hogwarts)와 같은 허구적 이름이 쓰인 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기술 이론의 입장에서는, 호그와트나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실제 존재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호그와트는 “조앤 롤링이 창조한 가상의 학교”라는 기술 어구로, 셜록 홈즈는 “코난 도일이 창조한 가상의 인물”이라는 기술 어구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술 이론은 허구적 이름이 쓰인 변용된 사례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는 기술 이론의 설명이 더 매력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3
직접 지시 이론은 언어의 의미가 지시체라는 소박한 의미론의 입장을 계승한다. 그런데 나는 이들이 구성하려는 이론이 지닌 장점들- 크립키(Kripke)의 가능세계 의미론이 해결한 양상 문제, 퍼트넘(Putnam)의 본질주의 복권 -과, 또 이들이 지적했던 기술이론의 해결되기 어려운 난점들이, 사실 둘 다 동일한 기반 위에서 다만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또 크립키의 고정지시어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이라는 점도. 그러나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각각의 이론들이 설정하는 전제와 조건들 일반으로부터 도출된 설명에 대해 반례를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며, 또 서술 이론이나 직접 지시 이론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그림 이론과 같은 다른 이론을 가져오려고 시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에서 행한 일련의 철학이 “교정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는가?”에 대한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기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고 있지 수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괴델이나 칸토르(G. Cantor), 데데킨트(Dedekind) 등의 수학적 작업에 대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해석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다....(중략)....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관이 매우 독특한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기존의 어떤 수학관도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즉 수학이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수학적 실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실재론적 수학관, 인간의 정신의 구성물이라는 직관주의적 수학관, 경험의 일반화라는 경험주의적 수학관, 수학은 의미 없는 기호들로 이루어지는 놀이이며 수학적 체계는 형식 체계라는 형식주의적 수학관, 수학은 논리학으로부터 도출 가능하다는 논리주의적 수학관 등과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각기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은 말하자면 증명 기술들의 다채로운 혼합이며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수의 개념도 가족유사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개념이다. 또한 논리적 추론 규칙들은 언어 놀이의 규칙들이고, 논리적 필연성은 언어의 문법의 필연성이며, 이는 다시 법률의 강제성과도 비교되는 그러한 인간적 개념이다. 수학은 결국 하나의 인류학적 현상이다.¹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만 그 이론들이 구성된 시점으로 돌아가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의미론들을 내부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닌(즉 그들의 설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설명에 앞서 자연스럽게 전제하고 있는 지점들, 두 이론이 밟고 서 있는 공통의 지반을 공격하고자 한다.
이것을 한 가지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드러내겠다. “명명될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는가?” 직접 지시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이던, 서술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이던 간에, 또 ‘이’, ‘그’, ‘저’로써 명명될 수 있는 것만을 지시 가능한 것으로 설명하는 러셀(Russel)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질문을 당연하다 못해, 이상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물”은 극단적인 관념론자나 회의론자가 아닌 다음에야, 직관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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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박정일 역) 서문
재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때 언어가 없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저 언어가 가지는 역할로 대체 지시적 기능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름을 가지지 않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사물,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도 계속 이름을 가지지 못한 채로 존재하고 있을 사물을 우리는 쉬이 상상해볼 수 있다. 혹은 이름을 전혀 부여받지 못한 채 죽었던 어떤 존재자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이름이란 단순한 표찰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물”이란 실제로 이름을 아직 가지지 못한 사물이나, (물자체와 같은) 인식적 가능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내가 말하는 사물은 여기서 “이름을 가지지 않는 사물” 즉, “원초적으로 전혀 명명될 수 없는 사물”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차이인가? 이제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전혀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가 물자체와 같은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물자체”라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사물은, 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이름과 외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다면, 이름과 사물은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순수한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 물론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이래로, 우리는 인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존재자, 우리가 전연 인식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자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순수한 사물, 곧 “물 자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물이 전혀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혹자는 지시적 정의가 이루어지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인식할 수조차 없는 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사물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해 “물 자체”라고 부르기로 했다면야, 도대체가 그 사물은 이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가 아닌가? 그리고 이제 그러한 것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가 원초적으로 알 수 없기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이제 그러한 것의 존재는 완전한 無와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구체적 사물은 그것이 (지시적 정의에서의) 지시로 이루어지던, (한정기술구로서의) 서술로 이루어지던 간에, 그것이 구체적인 사물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이름을 원초적으로 가질 수 있는 존재자이다. 지시적 정의가 벌어지는 상황을 고찰해보자. 어떤 사람이 장기 말의 “저 말”로 하여금 손으로 가리키며 “왕”이라고 명명할 때만 비로소 그것은 이름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이름을 (아직) 부여받지 못한 사물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제 그 지시 이전의 사물이 원초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래서 그 사물이 원초적으로 이름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가 그 사물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실재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절대적 의미에서 無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실재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불만에 찬) 반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언어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마치 절대적 차원에서 인간이 사회의 구조 속에 귀속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절대적 차원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약 그러한 논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리낄 것이 없다. 인간의 모든 사유가 시대에 귀속되어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객관적이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는 것처럼, 또 인간의 모든 행위가 결정되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해서,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이 도출되지 않는 것처럼(왜냐하면 그러한 책임을 묻는 행위역시 모두 결정되어 있을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이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사물의 존재 자체가, 본질이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여전히 언어로부터 독립해있다. 당신은 외연을 지나치게 넓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외연이 지나치게 넓다는, 그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지시적 정의로 들어가면서부터 전개될 설명을 위한 하나의 준비 작업이자, 이제 앞서 사물이 언어로부터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그가 지시를 통해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오류의 원천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누군가 이제,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다른 이에게(이를테면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아이) 그 사물의 이름을 가리켜주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는 어린아이에게 ‘빨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렇다면 그가 어린아이에게 온통 빨간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는 도화지 한 장을 보여주고, 그 밑에 빨강이라는 이름 명찰을 붙여줌으로써 아이는 ‘빨강’의 의미를 알게 되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기서 아이가 받은 ‘빨강’이라는 이름 하나로는, 도대체 아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지시적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가 준 ‘빨강’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A’라는 문자로 대체해도 좋을 텐데, 어떤 이가 나에게 위와 같은 도화지를 보여주면서 “이것의 이름은 ‘A’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그 이름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A’라는 이름은 도화지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도화지의 네모난 모양을 일컫는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내가 그가 보여준 그림을 보고선 떠올린 심상에 대한 이름인가? 나는 그가 취한 지시(무언가를 가리키고, 그것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빨강”이라는 그 색깔의 이름에 대한 문법이지, 이름이라는 텅 빈 기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법이란, 그 이름이 문장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어떤 규칙을 따르는지에 대한 일련의 사용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문법’이라는 개념 스스로도 그 자신의 통제를 받으며 가족유사성적으로만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방식은 말하자면, 우리에게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문법-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에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말한 순간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 우리의 발언을 제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화의 상대방과 우리 자신조차도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하는데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로 위에 서있는 이정표의 규칙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혼란은 이제 그 도로를 어떻게 주행해야할 지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빨강’에 대한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기 위해서, 나는 아이에게 “지금부터 ‘색깔의 이름’에 대해 알려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파랑색과 같은 견본을 대조해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빨강’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설명을 위해 사용한 “색깔의 이름”은 아이에게 색깔-문법의 규칙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이며, 그 기호의 놀이 공간이 그 기호 자체에 선행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아이가 어떤 사물의 이름에 관한 지시적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지시 이전에 우리가 설명할 그것에 관한 문법, 자리, 규칙, 행위 등이, 즉 언어놀이에 있어 그것의 사용법을 배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장기에 있어 왕의 의미를 배울 적에, 그 장기의 전체적인 규칙과 다른 장기 말들의 복합적인 역할 수행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퍼트넘(Putnam)의 논증¹¹이 우리가 최초의 명명으로 지시한 대상이 가진 본질이, 내포의 변화와 무관하게 외연 그 자체로서 결정되는 것이기에 외연만이 대상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제 장기 말에서의 ‘왕’의 의미도, 그것의 지시체라고 설명해야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장기 게임에서 ‘왕’의 의미가 그것이 따르는 규칙 등에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그 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가 임의로 바둑돌을 놓고 그것을 ‘왕’으로 여긴다고 해서, ‘왕’의 의미가 변하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왕’은 다른 말들과의 상대적인 관계로부터 규정되고 있다. 즉, 지시는 이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단지 지시만으로는, 우리가 받은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떤 규칙에 따라야할 지에 대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그렇다면, 그러한 지시적 설명이 단어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나,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있어서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저것의 이름이 바로 빨강”이라고 배우고 나서, 이제 빨강을 들을 때마다 특정 색깔의 표상이 떠오른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표상이 색깔을 나타내기에, 형태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하려면, 나는 먼저 ‘빨강’이라는 이름이 색깔을 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질문이 다시 ‘색깔’과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도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시에 선행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한 그 의미는, 지시적 정의가 그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던 그 의미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여기서 지시는 결국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빨강’을 가지고 “이것은 네모와 같은 형태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뜻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형태의 이름으로는 사용될 수 없고 다만 색깔의 이름을 뜻한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가져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지시적 정의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례가 되지 않는가? <지시적 설명에서 조차도 우리는 언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Wittgenstein 2003: 9)>¹²
29. 아마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 수는 둘이라고 한다.”, 오직 이렇게 해서만 둘은 지시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수”라는 낱말은 우리가 그 낱말을 언어의 어떤 자리에, 문법의 어떤 자리에 놓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저 지시적 정의가 이해될 수 있기 전에 “수”라는 낱말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그 정의 속의 “수”라는 낱말은 물론 이러한 자리, 즉 우리가 그 낱말을 둘 부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색은 이러이러하다고 한다.”, “이 길이는 이러이러한다고 한다.” 등등으로 말함으로써 그러한 오해들을 예방할 수 있다. ....중략....자 우리는 바로 그것들을 설명해야 한다.-그러니까 다른 낱말들에 의해 설명해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슬에서의 마지막 설명은 어떠한가? ¹³
그런데 이렇게 해서 이름과 사물이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제 그 연관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질문은 이행된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기호의 의미에 있어 지시 이전에 일어나는 준비들 : “‘색깔의 이름’과 같이 ‘빨강’이라는 이름을 지시를 통해 설명하기 전에 그것의 자리를 확정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 구성되는가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빨강’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확정짓는 문법-일반의 규칙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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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물론 퍼트넘(Putnam)은 외연만을 의미로 여기지 않고, 그 의미도 자연종 명사로 한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빨강”이란 기호를 지시적으로 정의할 때에 내가 가리키는 빨간 사물은 빨강의 속성이 귀속된 [따라서 저 속성이 사고 중에서 제거될 수도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표본(sample), 곧 언어의 일부이다. 향후 나는 그것을, 마치 표준 미터가 그런 것처럼, 비교의 대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서 그러하다. 표준 미터가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길이가 귀속되는 대상이 아니라]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시척(paradigm)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¹⁴
이러한 문법 규칙은 이를테면 “한 시야 안에서 동시에 두 가지의 색깔이 보일 수는 없다.”, “거리는 1M인 동시에 2M일 수 없다.”와 같은 것일 텐데,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규칙은 논리적이나 물리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법규칙은 그 규칙의 제정에 있어 자율적이며, 그 규칙을 논리적이나 물리적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제재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사물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상황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배중률 위반) 문법규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은 단지 그가 그 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실로 논리적 불가능성으로 여겨졌던 위의 문장도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차원의 특수한 논의에서는 제대로 사용되지 않은가? 비록 우리가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혼란을 느낀다하더라도 말이다. 마찬가지의 경우를 “거리는 1M인 동시에 2M일 수 없다.”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거리가 1M인 동시에 2M인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그러한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우리가 제대로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가 논리로 재단되어 있고, 그가 방금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그 문장 역시 언어로써 말해지고 있다면(논리의 귀속을 받고 있다면), 무엇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사고가 결코 비논리적일 수 없다는 하나의 징표로 나타난다.(역학적 설명이 시작되면, 모든 사물은 물리적 세계관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상상할 수 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누군가 “네모난 삼각형”을 우리가 결코 상상할 수 없기에 그러한 문장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한다면, 도대체 그는 상상불가능하다고 지적한 그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는가?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그가 처음의 ‘상상’과 두 번째 ‘상상’은 메타적 차원에서 다르며, 단지 첫 번째의 방식으로 말해지는 그것만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바로 그것이다. 그는 4차원 입방체인 테서랙트를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사용되는 모든 문장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겠는가? 우리가 인식적 차원에서 사고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의 메타적 차원(언어적 차원)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적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튼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사용될 수 없다면, 다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벌어지는 논의들, 수학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에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어쨌거나 유의미하게 사용되며, 다만 일상 언어에서는 그 문장들을 가지고 어떤 놀이를 행할만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이럼에도 여전히 언어가 거울처럼 실재를 비춘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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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3.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9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문법의 규칙이라 하는 것이, 구체적 언어-놀이가 이루어지는 상황 이전에 준비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실재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립적으로 존립해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법의 규칙은 언어가 실재를 그려내기 전에 미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논리적 동일성을 가지고 실재를 (거울처럼) 반영하지 않는다.
a) 따라서 기호와 사물 간에 논리적 동일성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말과 사물 간에 존립하는 모종의 내적, 논리적 관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과 사물 간에 그러한 관계의 존립은 모종의 근본적인 -내적인- 동일성의 존립이다.
b) 논리 문법은 [이른바] 실재에게 자신을 해명하지 않는다. 논리 문법적 규칙들은 의미를 비로소 결정(bestimmen)하기 때문에, 혹은 구성(konstituieren)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른바] 의미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논리 문법은 자의적이다. ¹⁵
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문법과 실재 사이의 동일성은 내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법은 실재와 정확히 같은 수준에 있으며, 실재를 해명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문법은 그것이 성립되는 순간 곧바로, 실재가 무엇임(what)에 대해 말한다. 실재가 어떤 상태(how)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문법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문법이 실체에 대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으면, 세계에 대한 어떤 그림도 올바르게 그릴 수 없을 것이므로.
2.0211 If the world had no substance, then whether a proposition had sense would depend on whether another proposition was true.
2.0212 Ogden
It would then be impossible to form a picture of the world (true or false).
Pears/McGuinness
In that case we could not sketch any picture of the world (true or false). ¹⁶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할 때, 결국 의미에 대한 두 이론(서술 이론, 직접 지시 이론)은 그 공통의 지반에서 다만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을 뿐이다. 언어에 대한 교정 철학의 관점은, 이들 철학이 지반으로 삼고 있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논리적 동일성” 혹은 “언어를 실재에 대한 거울”로 여기는 관점이 하나의 편견일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언어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이론을 구성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의 사소한 측면에서, 논리만으로 명제 전체의 일반성을 도출해내는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법의 규칙은 자의적이며, 그 사용으로부터 비롯되는 언어의 본질은, 그러한 본질이 다양한 규칙과 행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유동적인 경계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옳다면, 결국 언어에 대한 일반 이론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언어-놀이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기술(記述)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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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5.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2.0211, 2.0212
Ogden, Pears/McGuinness 영역
참고문헌
1.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저, Ogden 영역)
2.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Ludwig Wittgenstein 저, Pears/McGuinness 영역)
3. 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4.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해제) (박정일 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5. 철학적 탐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6. 청색 책. 갈색 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7. 소품 집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8. 확실성에 관하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9. 문화와 가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영철 역)
10.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박정일 역)
11.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알랭 바디우 저, 박성훈, 박영진 역)
12. 리처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해제) (이희정 저,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13. 양상논리와 형이상학 (김우진 저, 새들 녘 출판사)
14. 이름과 필연 (솔 크립키 저, 정대현 역)
15. 논리 철학 (여훈근 저, 고려대학교 출판부)
16. 현대 영미 인식론의 흐름 (김도식 저)
17. 논리적 추론과 증명(이병덕 저)
18. 한대석 (2013). 말-사물 동일성 그리고 논리-문법 공간 존재론. 철학, 116, 101-148.
19. 한대석(2012). 비트겐슈타인 그림 이론에 대한 또 하나의 연구. 철학, 113, 101-141.
20. 이승종 (2012). 언어의 한계와 유아론. 철학적 분석, 26, 1-18.
21. 강진호(2010) 촘스키와 비트겐슈타인의 지칭 의미론 비판. 철학, 102, 109-137
22. 선우환 (2005). 프레게와 함수적 표현. 철학, 83, 241-271.
23. 이병덕 (2006). 허구적 이름에 대한 밀주의 이론과 추론주의 의미론. 철학적 분석, 13, 101-132.
24. 문장수 (2011). 후기 분석철학의 주요 의미론들에 대한 역사-비판적 연구. 철학논총, 64, 289-313.
25. 김도식 (2003). 의미와 지시의 관계에 관하여. 인문과학논총, 40, 13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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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에 관한 강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번역
저의 본래의 주제에 관해서 말을 시작하기 전에, 서론적인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제가 제 생각들을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데는 큰 난점들이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드는데, 제 생각에, 그것들 중 일부는 그것들을 여러분에게 미리 언급함으로써 감소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난점은 제가 거의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영어가 저의 모국어가 아니고, 따라서 어려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바람직할 정밀성과 미묘함이 저의 표현에는 종종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영어 문법에 어긋나게 끊임없이 저지르게 될 잘못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제가 뜻하는 바를 파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저의 일을 덜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언급할 두 번째 난점은, 아마도 여러분 중 다수가 좀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저의 이 강의에 오셨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여러분의 생각을 바로잡아 드리기 위해서, 저는 제가 저의 주제를 택한 이유에 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전임 총무께서 영광스럽게도 저에게 이 협회에서 논문을 하나 발표하라고 요청했을 때, 저의 처음 생각은, 물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기회를 가질 거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어떤 것에 관해 말해야겠고, 이 기회를, 이를테면 논리학에 관해 강의하기 위해 오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오용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과학적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논문이 아니라 연속 강의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의 대안은, 여러분에게 이른바 대중 과학적 강의를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즉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해한다고 믿게 하려고 의도된 강의,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근대적인 사람들의 가장 저속한 욕망들 중의 하나인 것, 즉 과학의 최신 발견들에 관한 피상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의도된 강의 말입니다. 저는 이 대안들을 거부하고, 제가 보기에 일반적인 중요성이 있는 한 주제에 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주제에 관한 여러분의 생각들을 명료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비록 여러분이 제가 그것에 관해 말할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난점은 사실 대부분의 기다란 철학 강의에 따라붙는 것인데, 그것은 듣는 이가 그가 인도된 길과 그 길이 이르는 목적지를 둘 다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이해한다, 그러나 도대체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하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도대체 그는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고 있는 거야”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참을성을 가져 달라고 다시 요청하는 것과, 여러분이 결국에는 길과 그것이 이르는 곳을 둘 다 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주제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윤리학입니다. 저는 이 용어에 대해 무어 교수께서 그의 저서 <윤리학 원리>에서 준 설명을 채택하겠습니다. 그는 “윤리학은 좋은 것(善)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라고 말합니다. 이제 저는 윤리학이란 용어를 조금 더 넓은 뜻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실상, 제가 믿기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포함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을 윤리학의 주제라고 간주하는가를 여러분이 가능한 한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앞의 정의와 각각 대체될 수 있을 터인 다소 동의어적인 수많은 표현들을 여러분 앞에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열거함으로써 저는 골턴이 상이한 얼굴들이 모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질들에 대한 그림을 얻기 위해서 상이한 얼굴들의 수많은 사진들을 같은 사진 감광판 위해서 취했을 때 산출한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를 산출하고자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집합적 사진을 보여 줌으로써 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를테면, 무엇이 전형적인 중국인의 얼굴인가를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할 동의어들의 열을 여러분이 자세히 살펴본다면, 여러분은-제가 희망하는 바로는-그것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적 특질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윤리학의 특징적 특질들입니다.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善)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모든 구절들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윤리학이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대충의 관념을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이 모든 표현들에서 우리 눈에 띄는 첫 번째 것은, 그것들 각각이 실제로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두 가지 뜻을 한편으로는 사소한 또는 상대적인 뜻이라고 부르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또는 절대적인 뜻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것은 좋은 의자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 의자가 미리 결정된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좋다’라는 낱말은 이 목적이 사전에 고정되어 있었던 한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상, 상대적인 뜻에서 ‘좋다’는 낱말은 단순히 어떤 미리 결정된 표준에 부응함을 의미합니다. 가령 우리가 이 사람은 좋은 피아니스트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정도의 어려움을 가지는 작품들을 어떤 정도의 솜씨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제가 감기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가 말한다면, 제가 의미하는 것은 감기 걸리는 것이 제 생활에서 어떤 기술 가능한 장애들을 생기게 한다는 것이고, 또 이것이 올바른 도로라고 제가 말한다면, 제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목적에 상대적으로 올바른 도로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면, 이 표현들은 어떤 난점이나 깊은 문제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학이 그 표현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제가 테니스를 칠 수 있고, 여러분 중 한 사람이 제가 경기하는 것을 보고, “이런, 당신은 테니스를 꽤 못 치는군요.”라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압니다. 저는 못 칩니다. 그러나 더 잘 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 그럼 됐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고, 그가 제게 다가와서 “당신은 짐승같이 행동하고 있어” 하고 말했는데, 제가 “나는 내가 나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더 좋게 행동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그 경우 그가 “아, 그럼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아닙니다; 그는 “아니, 당신은 더 잘 행동하고자 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서 당신은 절대적 가치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첫 번째 예는 상대적 판단의 예였습니다.
이 차이의 본질은 명백히 이러하다고 보입니다. 즉 모든 상대적 가치 판단은 사실들의 단순한 진술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 판단의 모든 외관을 상실하는 그런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랜체스터(Granchester)로 가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당신이 최단 시간 내에 그랜체스터에 도착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당신이 가야 하는 올바른 길이다”라고 말해도 똑같이 좋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좋은 경주자이다”는 단순히 그는 몇 마일을 몇 분 내에 달릴 수 있다, 등등을 뜻합니다.
이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상대적 가치 판단들이 단지 사실들의 진술들임이 입증될 수 있지만, 어떤 사실 진술도 결코 절대적 가치의 진술이거나 절대적 가치를 함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인물이고, 따라서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무생물체나 생물체의 모든 운동을 알며, 또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의 마음의 상태도 다 안다고 합시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하나의 큰 책에다 써 놓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책은 세계에 관한 기술 전부를 포함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은 우리가 윤리적 판단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그런 판단을 논리적으로 함축할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모든 사대적 가치 판단들과 모든 참된 과학적 명제들을, 그리고 사실상,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참인 명제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된 모든 사실들은, 말하자면, 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식으로, 모든 명제들은 같은 수준에 있습니다. 어떤 절대적인 뜻에서 숭고하거나, 중요하거나, 사소한 명제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마도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점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햄릿의 말을 상기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좋거나 나쁘지 않지만,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햄릿의 말은, 좋고 나쁨이 비록 우리 외부 세계의 성질들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의 상태의 속성들이라는 것을 함축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뜻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즉 마음의 상태는, 우리가 그것으로 의미하는 것이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인 한, 어떤 윤리적인 뜻으로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일이 기록된 우리의 책에서 우리가 어떤 살인이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점들에서 완전히 자세하게 기술된 것을 읽는다면, 이 사실들의 단순한 기술은 우리가 윤리적 명제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인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살인은 다른 어떤 사건, 예컨대 돌의 낙하와 정확히 같은 수준에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술을 읽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다른 어떤 감정을 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는 이 살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그 살인에 의해 그들 속에 야기되는 고통이나 분노에 관해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실들, 사실들, 사실들만이 존재하고, 윤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윤리학이라는 그런 학문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를 제가 심사숙고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저에게 아주 명백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을 어떤 것도 그 것[윤리학]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저에게는 명백해 보입니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숭고하고 다른 모든 주제들 위에 있을 수 있을 그런 주제를 가진 과학 책을 쓸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느낌을 다음과 같은 은유로 기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로 윤리학에 관한 책인 윤리학 책을 쓸 수 있다면, 이 책은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을 폭음을 내면서 파괴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과학에서 사용하는 바와 같이 사용되는 우리의 말들은 의미와 뜻, 즉 자연적 의미와 뜻을 포함하고 전달할 수 있을 뿐인 그릇들입니다. 윤리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초자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들은 오직 사실들만을 표현할 것입니다. 제가 하나의 찻잔에 일 갤런의 물을 쏟아 부어도, 그 찻잔은 한 잔의 찻잔 가득할 만큼의 물만을 담을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말하기를, 사실들과 명제들에 관한 한, 오직 상대적 가치와 상대적 좋음, 옳음 등만이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 나가기 전에, 이것을 좀 명백한 예에 의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올바른 도로는 자의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표로 인도하는 도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리 정해진 목적지와 별도로 올바른 도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분명합니다. 이제, “절대적으로 올바른 그 도로”라는 표현에 의해 우리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봅시다. 저는 그것은 이런 도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을 보면 모든 사람이 논리적 필연성을 가지고 가야할 도로, 또는 가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도로, 그리고 비슷하게, 절대적 좋음[善]은 그것이 기술될 수 있는 사태라면 이런 것일 겁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경향들과는 별개로, 필연적으로 성취할 것, 또는 성취하지 않으면 죄스럽게 느낄 것. 그런데 저는 그와 같은 사태는 하나의 키메라, 즉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태도, 그 자체로는, 제가 절대적 심판관의 강제력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처럼 여전히 “절대적 선”이니 “절대적 가치”니 하는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우리 모두는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으며, 무엇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것인가요? 이제 제가 틀림없이 이러한 표현들을 쓸 경우들을 상기할 것인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경우 저는 예컨대 제가 여러분에게 쾌락의 심리학에 관해 강의를 해야 한다면 여러분이 처하게 될 상황에 있습니다. 그 경우 여러분이 할 일은 여러분이 언제나 쾌락을 느끼는 어떤 전형적인 상황을 상기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모든 것이 구체적이 되고 말하자면 제어 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날씨 좋은 여름날에 산책을 할 때의 감각을 자신의 전형적인 예로서 고를 것입니다. 이제, 제가 절대적 또는 윤리적 가치에 의해서 제가 의미하는 것에 제 마음을 고정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러한 상황에 처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의 경우에는, 하나의 특수한,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 저의 탁월한(par excellence)경험의 관념이 저에게 떠오르는 일이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적에 이 경험을 저의 최우선적인 예로 사용하려는 이유입니다.(제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예들을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같거나 비슷한 경험들을 상기하도록 만들어, 우리가 우리의 탐구를 위한 공통적인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이 경험을 기술할 것입니다.
제가 믿기에는, 그 경험을 기술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경험을 할 때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 그리고 그 경우 저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가!”와 같은 그런 문구를 곧잘 사용합니다. 저는 저도 알고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터인 다른 한 경험을 곧 언급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경험입니다. 제가 뜻하는 것은, 우리들이 “나는 안전해; 무엇이 일어나건, 아무것도 나를 해칠 수는 없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의 그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제 저는 이 경험들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믿기에는, 그것들은 우리가 분명히 하고자 애쓰는 바로 그 특징들을 내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가 말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이러한 경험들에 우리가 부여하는 언어적 표현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는 세계의 존재에 놀란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어를 오용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것이 사실임에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훌륭하고 명료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가 이전에 본 적이 있는 어떤 개보다도 더 큰 개의 크기에 대해 제가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합니다. 또는 특별하다는 낱말의 평범한 뜻에서,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해서나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합니다. 그러한 모든 경우에, 저는 사실이 아니라고 제가 상상할 수 있을 그런 어떤 것이 사실임에 대해 경탄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개의 크기에 대해 경탄하는 것은, 다른 크기의 개, 즉 저의 경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일상적 크기의 개를 제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사실임에 대해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제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경우에만 뜻을 가집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들은, 이를테면, 우리들이 오랫동안 방문한 적이 없고 그동안 헐렸을 것이라고 상상해 온 어떤 집을 볼 때 그 집의 존재에 대해 경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저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그 있는 바대로 있음에 대해 경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제가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이런 경험들을 한다면, 저는 하늘에 구름이 낀 경우와 대조적으로 하늘이 파란 것에 대해 경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늘이 어떠하게 있건 간에 좌우간 있음에 경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제가 경탄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동어반복, 즉 하늘이 파랗거나 파랗지 않음에 대해서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동어반복에 대해 경탄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것이 바로 무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제가 언급한 다른 경험들, 즉 절대적 안전성의 경험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안전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저는 제 방에서, 제가 버스에 치일 수 없을 때, 안전합니다. 만일 제가 백일해를 앓았었고, 따라서 다시 그 병에 걸릴 수 없다면, 저는 안전합니다. 안전하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일들이 저에게 일어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무엇이 일어나건 제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예가 “존재”나 “경탄”이란 낱말의 오용이었던 것처럼, 이것은 다시 “안전하다”란 낱말의 오용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 점을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즉 우리 언어에 대한 어떤 특징적인 오용이 모든 윤리적 표현들과 종교적 표현들에 퍼져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일견 그저 비유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우리가 옳다는 낱말을 윤리적인 뜻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 비록 우리가 뜻하는 것이 그 낱말의 사소한 뜻에서는 옳지 않지만, 그것은 비슷한 어떤 것으로는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람은 좋은 친구이다.”고 말할 때, 비록 그 ‘좋은’이라는 낱말이 “이 사람은 좋은 축구선수이다.”라고 하는 문장에서 그 낱말이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떤 유사점은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람의 삶은 가치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가치 있는 보석류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유사성은 있어 보입니다. 이제 이런 뜻에서 모든 종교적 용어들은 비유들로서 또는 알레고리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神)에 대해, 그는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가 무릎 꿇고 그에게 기도할 때, 우리의 모든 용어들과 행위들은 그를 우리가 그의 은총을 얻으려 애쓰는, 위대한 힘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나타내는 하나의 커다랗고 정교한 알레고리의 부분들이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알레고리는 또한 제가 좀 전에 언급한 경험들을 기술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첫 번째 경험은, 제가 믿기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고, 또 절대적 안정성의 경험은, 우리는 신의 손안에서 안전함을 느낀다고 하는 말로 기술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같은 종류의 세 번째 경험은 죄스럽게 느낀다고 하는 것인데, 이것도 신은 우리의 행위를 인가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구에 의해 기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윤리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떤 것에 대한 비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떤 사실을 하나의 비유에 의해 기술할 수 있다면, 저는 또한 그 비유를 버리고 사실들을 비유 없이 기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비유를 버리고 그 배후에 있는 사실들을 단순히 진술하려고 시도하자마자,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처음에 하나의 비유라고 보인 것은 이제 단순한 무의미라고 보입니다. 그러데 제가 여러분에게 언급한 세 경험(저는 다른 경험들을 덧붙일 수 있었을 겁니다.)은 그것들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컨대 저에게는, 어떤 뜻에서 본래적인,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것들이 경험들이라고 말할 때, 틀림없이 그것들은 사실들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때 어떤 곳에서 일어났고, 어떤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했고, 따라서 기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제가 몇 분 전에 말한 것으로부터 보면, 저는 그것들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저의 논점을 더욱 더 예리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경험이, 사실이, 초자연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역설이다.”
이제 제가 이 역설에 대처하고 싶어질 때 취하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먼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고 하는 우리의 첫 번째 경험을 다시 고려해보고,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술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기적이라고 일컬어질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그와 같은 것을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순히 그런 사건입니다. 이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머리가 자라 사자의 머리가 되고 포효하기 시작하는 경우를 들어 봅시다. 확실히 그것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한, 비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움에서 벗어날 때는 언제나, 저는 의사를 데려와서 그 경우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도록 할 것을 제안할 터이고, 또 그를 해치는것이 아니라면 저는 그의 생체를 해부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바라볼 때, 기적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기적’이란 용어로 의미하는 것이 단지, 하나의 사실이 과학에 의해 아직 설명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과학적 체계 내의 다른 사실들과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없다는 것을 과학이 증명했다”고 말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은, 사실을 바라보는 과학적 방식은 그것을 기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실을 여러분이 상상하건, 그것은 그 자체로는 기적적이라는 용어의 절대적인 듯에서 기적적이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가 “기적”이라는 낱말을 상대적인 뜻과 절대적인 뜻에서 사용해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하는 경험을, 그것은 세계를 하나의 기적으로 보는 경험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술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비록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도 아니지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라니 그렇다면 이 기적을 어떤 때에는 알아차리고 어떤 때는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왜냐하면 제가 말한 것, 즉 제가 기적적인 것의 표현을 언어에 의한 표현으로부터 언어의 존재에 의한 표현으로 전환함으로써 말한 것은 다시, 우리는 우리가 표현하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기적적인 것에 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 중 많은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완전히 분명해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어떤 경험들이 우리가 절대적 또는 윤리적 가치와 중요성이라고 부르는 성질을 자신들에게 부여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면,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이 말들에 의해 우리는 어떤 경험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 말로 뜻하는 것은 어쨌든 다른 사실들과 같은 그저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의 귀착점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윤리적 표현들과 종교적 표현들로 의미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논리적 분석을 발견하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게 반대해서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게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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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학기에 발표했던 비트겐슈타인 발제문
『논리철학논고』
1. 『논리철학논고』의 기획
『논리철학논고』는 철학사의 위대한 책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동시에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다루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배경설명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는 논의를 전개하다 갑작스레 프레게와 러셀을 비판하기도, 해설하기도 한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에, 현대 논리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논의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로, 논고에는 수많은 논증이 제시되지만 그 내용을 엄청나게 압축하고 있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그래서 논고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이와 비슷한 사고를 이미 스스로 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을 발제하는 건 어쩌면 무의미할지 모른다. 곳곳에 나오는 물음들에 대한 배경을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고, 논증에 대한 해석마저 학자들마다 분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논고의 기획을 먼저 제시하고 그 기획을 급급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논고는 기존의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가 언어논리를 오해하여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목표는, 사고에 한계를, 더 정확히는 사고의 표현(언어)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고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선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생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계를 언어에 설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한계 밖에 있는 것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예컨대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머리말)
다음은『논고』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나오는 4가지 핵심적 물음들이다. :
(Ⅰ)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Ⅱ) 어떻게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는가?
(Ⅲ) 왜 어떤 명제는 뜻 있는 명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Ⅳ) 왜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가 아닌 명제들은 뜻을 지니지 않는가? 이 명제들의 성격은 어떠한가?
(Ⅰ)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대답은, 뜻 있는 명제, 예컨대 자연 과학의 명제들이다. 이외의 명제들은 뜻이 없기에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다. 이는 (Ⅱ)으로 이어져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규명한다.
2. 세계와 언어
(Ⅱ)에 대해 답변은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명제는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기호"와 "상징"을 구분한다. 명제는 일종의 기호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명제 기호"는 일종의 사실이고, 또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다.
두 번째로 명제는 “그림”일 수 있기에 뜻을 지닐 수 있다. 이것은 그림 이론으로 나타난다. 명제는 상징으로 파악될 수도 있으며,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그림으로서, 뜻을 지니는 부분의 함수이다.
이제 존재론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닌 사실(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 간단히,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 전체이다. 세계는 사실들, 즉 성립할 수 있는 모든 경우들 중 실제로 성립하는 경우들로 이루어지며, 또 이것으로 인해 확정된다. 왜냐하면 사실들 전체가 실제로 성립하는 경우들을 확정하는 동시에, 실제로 성립하지 않는 경우들도 확정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사물들"이 아닌 "사실들"인 이유는 간단히 말해, 세계가 대상들(사물들)을 그저 모아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계의 부속품들을 그저 모아놓은 것이 시계가 아닌 것과 같다. 시계의 부속품들이 모여 시계가 되려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태(사물의 상태)들의 존립(exist)이며, 다시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사태들이 모여서 사실이 되기에 사태는 원자적(atomic fact)이다. 사태는 어떤 한 요소 명제가 참일 때 거기에 대응(존립)한다. 마지막으로 사태들 간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기에 사태들은 논리적으로 상호 독립적이다. 대상은 단순한 것으로서 대상들의 어떤 일정한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이제 세계와 언어의 관계를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언어와, 사실은 명제와, 그리고 사태는 요소 명제와 대응한다. 따라서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이고, 명제는 요소 명제들로 이루어지며, 요소 명제는 이름들의 연쇄이다.
명제는 "명제 기호"와 "상징"의 두 부분으로 파악된다. 상징은 뜻을 지니는 것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눈은 하얗다"라는 명제는 뜻의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이다. 기호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김구"라는 상징에서 활자 모양이나 색깔 등과 같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기호이다. 따라서 상징은 뜻과 관련되고, 기호는 물리적, 지각적 측면과 관련된다.
"명제 기호" 는 "명제"라는 상징에서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것이므로, 세계와 투영적 관계에 있는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 오직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명제는 뜻을 지닐 수 있다. 명제는,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사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며, 사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비트겐슈타인은 명제 기호가 하나의 사실이라는 점은 명제 기호를 문자 기호로 생각하지 말고 책상이나 의자, 또는 책 같은 것들로 합성되어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문자 기호를 공간적 대상들로 생각해 보면 "명제 기호의 본질"이 매우 분명해진다. "그 경우 이러한 사물들 상호간의 공간적 위치가 그 명제의 뜻을 표현한다."(3.1431)
요소 명제는 사태가 대상들의 결합인 것과 대응해서 "이름들의 연쇄"(4.22) 이다. 이름은 요소 명제를 통해서만 명제 속에 나타날 수 있다 이 때 이름은 대상을 대표하며, 이러한 대상의 연쇄는 마치 "활인화"처럼 사태를 대표한다(4.0311). 따라서 요소 명제가 참이면, 사태는 존립한다.; 요소 명제가 거짓이면, 사태는 존립하지 않는다.
3. 그림이론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재판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난 과정을 모형을 통해 설명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림이론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모형(모델)이 사실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에서 명제 또한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서 어떤 사실을 묘사하듯이, 명제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그린다. 요컨대, 명제는 현실의 그림이다.
명제가 그림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과 일정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그 둘은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 어떤 “공통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음악은 그것을 그린 악보와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음악가가 악보로부터 교향곡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규칙이 존재하며, 그로부터 이끌어낸 교향곡을 다시 처음의 규칙에 따라 악보로 만들 수 있다. 이는 악보와 교향곡이 내적인 유사성을 지니며, 악보가 교향곡을 악보로 투영하는 투영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명제가 사실의 그림일 때, 사실은 명제에 투영되어 있으며, 그 규칙은 논리적 형식이다. 음악가가 악보로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제를 통해 사실을 이해한다.
명제는 사실의 그림을 그릴 때 사실을 모사한다. 따라서 명제의 논리적 형식은 바로 “모사 형식”이다.(엄밀하게는 모사 형식이 논리적 형식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모사형식은 그림과 그려지는 것 사이의 공통된 어떤 것이다.
이러한 모사 형식에 따라 그림(명제)은 현실을 묘사한다. 요소 명제는 사태를 묘사하며, 명제는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들만이 뜻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뜻 있는 명제)은 오직 사실을 모사한 그림(명제)들뿐이다. 그 외에는 뜻을 결여하거나 무의미하다. 따라서 "비가 온다."라는 명제는 한편으로는 명제 기호로서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나 사실과 논리적 형식을 공유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뜻을 지닐 수 있다. 그림이 현실과 일치하면 명제는 참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이를 알려면, 그림을 현실과 비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그림만으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2.224).
4. 진리함수 이론
진리함수 이론은 (Ⅲ)에 대한 해명작업이다. "비가 온다."라는 명제와 달리 왜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 같은 명제는 하나의 명제기호로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뜻을 지니지 않는가? 이 명제들은 모두 요소 명제들에 대해 어떠한 조작을 가해 얻어진,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그러나 뜻이 없는 명제들은 사실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진리표를 통해 드러난다. 먼저, 요소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요소 명제는 다른 요소 명제와 독립적이며, 다른 어떤 요소 명제와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p |
T |
F |
1) 요소 명제 p에 대해서,
T와 F는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이고 이는 각각 사태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을 의미한다(4.3).
p | q |
T | T |
F | T |
T | F |
F | F |
2) 두 개의 요소 명제는 다음의 진리 가능성들을 지닐 수 있다 :
진리 가능성의 개수는 요소 명제가 1개인 경우 1개- TF이고, 2개인 경우 4(=2²)개- TT/ FT/ TF/ FF이며, 3개인 경우 8(=2³)개이다. 일반적으로, 요소 명제가 n개인 경우 2ⁿ이다.
p | q | |
T | T | T |
F | T | T |
T | F | |
F | F | T |
3) 예컨대, 아래의 진리표는 하나의 명제기호로 기능한다.
도식에서 진리가능성들의 순서가 조합규칙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면, 마지막 세로 칸은 그것만으로 진리조건의 표현이다. 위 진리표의 경우, "p ⊃ q"라는 명제를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진리 가능성의 일치 및 불일치 표현은 명제의 진리 조건들을 표현하므로, 진리 조건만으로도 한 명제를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명제는 그 진리조건들의 표현이다. 따라서 위 진리가능성들의 순서조합은 명제 "p ⊃ q"의 진리조건을 나타내고, 명제 "p ⊃ q"는 위 진리조건들의 표현이다. 이 세로 칸을 일렬로 적어, (TT_T)(p, q)로, 보다 뚜렷하게 (TTFT)(p, q)로 나타낼 수 있다. 또, 이를 간단히 TTFT로 나타내면 "p ⊃ q"명제를 대신할 수 있다. 진리표만으로도 명제 "p ⊃ q"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42 어떤 한 명제와 n개 요소 명제의 진리 가능성들과의 일치 및 불일치에 관해서는 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요소 명제가 2개가 있는 경우 진리조건들의 가능한 조합은 16(=)이다.
(TTTT)(p, q): (p ⊃ p. q ⊃ q) - 동어반복 (항진 명제)
(FTTT)(p, q): (~(p. q)) / (TFTT)(p, q): (q ⊃ p) / (TTFT)(p, q): (p ⊃ q) /
(TTTF)(p, q): (p ∨ q) / (FFTT)(p, q): (~q) / (FTFT)(p, q): (~p) /
(FTTF)(p, q): (p.~q : ∨ q.~p) / (TFFT)(p, q): (p ≡ q) / (TFTF)(p, q): p / (TTFF)(p, q): q
(FFFT)(p, q): (~p.~q) 또는 (p|q) / (FFTF)(p, q): (p.~q)/ (FTFF)(p, q): (q.~p) /
(TFFF)(p, q): (p. q) / (FFFF)(p, q): (p.~p. q.~q) - 모순 (항위 명제)
여기서 동어반복과 모순의 두 극단적인 경우들을 확인할 수 있다.(4.46) 동어반복의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모든 진리 가능성들에 대해 참이다. 모순의 명제는 모든 진리 가능성들에 대해 거짓이다. 이들은 뜻 있는 명제들과 유사하나,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1> 동어반복과 모순은 뜻을 상실해 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 때, 내가 날씨에 관해서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뜻이 있는) 명제는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보여 주는데, 동어 반복과 모순은 자기들이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보여 준다.
<2> 그러나 동어 반복과 모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산술에서 0이 하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3> 동어반복과 모순은 현실의 그림이 아니다. 그것들은 가능한 어떤 상황도 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동어반복은 확실성과 필연성에 대응하고, 명제는 가능성에 대응하며, 모순은 불가능성에 대응한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는다.”는 명제는 비가 오던 오지 않던 간에 항상 참이다. “비가 오고, 또 비가 오지 않는다.”는 명제는 항상 거짓이다.
p ∨ q를 p와 q의 진리 함수라고 하는데, 이는 p와 q의 진리치가 결정되면 이에 따라 p ∨ q의 진리치도 결정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뜻 있는 명제와 동어반복, 모순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그런데 논고에서는, 진리 함수 외에도 진리 조작이란 표현이 나오며, 비트겐슈타인은 함수와 조작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먼저, 비트겐슈타인은 "조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5.2 명제들의 구조들은 서로 내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5.21 우리는 명제를 어떤 조작의 결과로서, 즉 한 명제를 다른 명제들(조작의 토대)로부터 산출하는 조작의 결과로서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내적 관계들을 우리의 표현 방식 속에서 부각시킬 수 있다.
5.23 조작은 한 명제로부터 다른 명제들을 만들어 내려면 그 명제에 행해져야 하는 그런 것이다.
조작은 "명제의 논리적 구성"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p"의 구조는 "~~p"의 구조와 "내적인 관계"에 있다. "~p"에 "~"라는 조작을 하면 "~~p"가 나오듯이 명제 p에 "~"라는 조작을 계속 적용하면, 그렇게 산출된 내적 관계에 의해 배열된 계열이 드러난다. : p, ~p, ~~p, ~~~p, ~~~~p, ~~~~~p, … 이것을 조작의 "계속적 적용"이라 부르며, 이 계열을 "형식 계열"이라 하여, [p, x, O'x]로 나타낸다.(x는 임의의 항, O는 조작의 기호)
그런데 여기서, 함수와 조작의 근원적인 차이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어째서 함수와 조작을 엄격히 구분했는지 알 수 있다. 함수는 자기 자신의 독립 변수가 될 수 없지만, 조작의 결과는 자기 자신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예컨대, F(F(fx))에서 두 "F"는 형식이 다르기에 동일하지 않지만, ~(~p)에서 "~"는 형식과 관련 없이 동일하다. 따라서 진리 함수들은 사실 실질적 함수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의 토대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들이 요소 명제들을 토대로 가지는 조작들의 결과이므로, 이를 진리 조작이라 부른다. 따라서 모든 명제는 요소 명제들에 대한 진리 조작의 결과다. "p & q"는 p와 q의 진리 함수이며, "&"라는 진리 조작을 적용한 결과다. "~~p"는 p의 진리 함수이며, "~"라는 진리 조작을 두 번 적용한 결과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동치"의 문제를 해결한다. 예컨대 이중 부정을 통해 긍정을 산출할 때, 부정은 긍정 속에 포함되는가? ~~p는 ~p의 부정인가?, p의 긍정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라고 불리는 대상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p는 p와 논리적 동치이기에 동일한 것을 말해야하므로, "~~p"에서 "~"가 있다는 점이 명제의 뜻을 특징짓지 못한다. 이는 조작들이 서로를 상쇄하여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분명하다.(~~p = p) 따라서 위의 물음은 애초에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하여, 논리적 상항들은 세계에 속하는 어떤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 명제 "p ⊃ q"와 "~p ∨ q"는 논리적 동치이며, "p ∨ q"가 "~p ⊃ q"로 정의되는 것처럼 교차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그것들은 외적인 형식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므로 ~나 ∨, ⊃와 같은 논리적 상항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적 상항은 원초적 기호(세계를 기술하는 데 있어 어떤 본질적인 것)가 아닌 문장을 이해할 때 필요한 보조 수단, 구두점들이다. 또한, 요소 명제 “p”가 p ∨ p, p & (~p ∨ p), p ∨ (p ⊃ p) 등과 동치라는 점에서, p속에는 ~, ∨, & 와 같은 모든 논리적 조작들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5.47 요소 명제는 모든 논리적 조작을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 우리는 “유일한 논리 상항”은 모든 명제가 본성상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명제가 본성상 서로 공유하는 것은 명제의 일반형식이다.
따라서 논리적 상항은 실로 하나뿐이며 모든 논리적 상항들(논리적 사이비 관계)을 관통한다. 이 원초적 기호를 “명제의 일반형식”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명제의 본질을(5.471), 다시 말해, 세계의 본질을 제시할 수 있으므로, "명제의 일반 형식"이 정의되면, 물음 Ⅲ에 대한 대답은 완결된다.
5.5 모든 진리 함수 각각은 ( _ _ _ _ _ T)(ξ, ····)라는 조작을 요소 명제들에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이 조작은 오른편 괄호 속의 명제들 전체를 부정하며, 나는 이 조작을 명제들의 부정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간단히 라고 표기한다. 이것은 (FT)(p), (FFFT)(p, q), (FFFFFFFT)(p, q, r) 등과 같은 것을 간단히 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 때, "ξ"는 "괄호 표현의 항들을 그 값으로 가지는 하나의 변항"(5.501)이고, 는 명제 변항 ξ의 값 전체의 부정이다.
그런데, 조작 N은 특수한 종류의 부정이다. 논리학에서의 "부정"이 한 문장이나 명제에 대해 적용되는 반면, 조작 N은 다수의 명제들에 대해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 부정)이나 "|"(선택 부정)은 2항 관계에서만 적용가능하나, 조작 N은 임의의 n항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구분을 위해 조작 N을 간단히 "W-부정"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다음의 두 가지 사실들:
(1) W-부정에서 ξ가 두개의 값을 가지는 경우, 동시 부정 "↓"과 동일하다
설명: 5.51 ξ가 오직 하나의 값만을 가진다면, = ~p이며, ξ가 두 개의 값을 가진다면, 이다. (...) 이 경우에는 = ~p & ~q (p도 아니고 q도 아니다)이고, 동시부정 "p↓q"의 진리표는 (FFFT)(p, q)= ~p & ~q이기 때문에 둘은 동일하다.
(2) 논리학에서 모든 논리식(진리 함수)들을 동시부정"↓"만을 사용해서 표현될 수 있다.
설명: 예컨대 ~p는 p↓p로, 그리고 p ∨ q (p가 옳거나 q가 옳다)는 (p↓q)↓(p↓q)로 표현된다.
(1), (2)을 통해 모든 명제들은 N 조작의 계속적 적용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 또는 명제의 일반적 형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6 진리 함수의 일반적 형식은 []이다.
6.001 모든 명제 각각은 요소 명제들에다 라는 조작을 계속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다.
5. 여러 명제들& 유아론
그림이론과 진리 함수 이론을 통해 질문(Ⅱ)과 질문 (Ⅲ)이 해결되었다.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만이 뜻을 지닐 뿐이라면, 그 외의 명제들은 무엇인지, 또 왜 그런 명제들은 뜻이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겨난다. - 물음 (Ⅳ) 이를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명제들을 비교하여 그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논리학의 명제는 동어반복이므로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면서도 뜻을 결여하는 명제“이다.
6.1 논리학의 명제들은 “항진명제”(동어 반복들)이다.
6.11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
6.13 논리학은 이설(異說)이 아닌,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선험적[초월적, transcendental]이다.
<1> 뜻 있는 명제가 사실에 대한 그림이라면,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을 통해 언어와 세계의 형식적 속성을 보여준다(6.12).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는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는 분석적 명제이다.
<2> 또한 논리학의 명제는 선험적(초월적)이다. 어떤 뜻 있는 명제가 참인지를 알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 명제를 세계의 사실과 비교해야만 한다. 반면에 논리학의 명제들은 그 상징만으로도 그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참인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논리적 명제들의 특수한 징표"이다.
<3> 마지막으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항상 필연적으로 참이다. 뜻 있는 명제들은 경험에 의해서 반박되거나 확증될 수 있지만, 논리학의 명제는 (세계의 골격을 기술할 뿐이므로) 가능한 어떤 경험에 의해서도 그럴 수 없다. 논리적 법칙들은 그 자체로서 근원적이고 필연적이다.
6.3 논리의 탐구는 모든 법칙성의 탐구이다. 그리고 논리 밖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이다.
6.375 필연성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듯이, 불가능성도 오직 논리적 불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반면에, 자연과학의 명제는 뜻 있는 명제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들은 논리학과 달리 사실들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요소 명제의 진리 함수"이지만, 논리학의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참이고 자연 과학의 명제들은 우연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자연과학의 법칙은 뜻 있는 명제로 간주하면서, 다른 법칙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먼저 "귀납 법칙"은 뜻을 지닌 명제로 간주된다(6.31). 어떤 일이 충분히 많은 횟수로 반복해서 일어났을 때, 다음에도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 법칙이 아니다(6.31). 지금까지 매일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으므로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따라서 귀납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반면, 보존 법칙이나 인과성의 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며, 과학의 명제들이 지닐 수 있는 가능한 형식에 관한 통찰들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뜻 있는 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들을 다루는 것이 역학으로, 간단히 말해, 세계에 어떤 하나의 통일된 형식을 기술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과학은 뜻 있는 명제들로 이루어진 법칙들과 뜻을 결여하는 명제들로 이루어진 법칙들로 동시에 이루어져 있다.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초월적인 것이다(6.421). 그것들은 모두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가 아니기에 무의미하다. 물론 이는 그것들이 헛소리라는 것이 아니다.
6.42 따라서 윤리학의 명제들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1 윤리학이 언표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윤리학은 선험적[초월적, transcendental]이다.
"(뜻있는)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6.42b) 따라서 "(뜻 있는) 윤리학의 명제"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학의 명제들은 "존재할 수 없다"(6.42a).
또한 필연성에는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존재하므로(6.375),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한다 해서 그것이 일어나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며(6.373),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운명의 은총"에 불과하다(6.374).
그런데 어떤 것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비우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에 우연적으로 존재하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비우연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 우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는 세계밖에 놓여야 한다.(6.41) 옳음, 좋음, 선악 등의 가치는 세계 밖에 있는 보다 높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리적인 것을 소유하는 주체인 의지에 관해서 말할 수 없다(6.423a).
비트겐슈타인은 의지에 대해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며(6.43a), “선악의 의지를 통해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6.43b)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논고의 세계 개념은 뒤집히고, 이것은 유아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아론이 나오기 이전의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어떤 주체와도 독립적이었다. 반면 "유아론"과 관련된 "세계"는 주체와 관련되며 주관적 세계이다. 따라서 그 주체가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다."
5.61 (...)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이것과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논리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고, (논리학의 명제들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므로) 세계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은 언어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이고,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다.
그런데 논리학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학에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존재할 수 없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야 할 텐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내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뜻 있는 명제이지 필연적인 명제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는 어떠한가? 도대체 "나는 존재한다."의 확실성을 의심할 수 있는가? "이 책상은 존재한다."와 "나는 존재한다."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책상의 존재는 경험적인 것이지만,"형이상학적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하나의 논리적 요청이며 경험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때문에, 유아론이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그것은 말해질 수는 없고,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5.621 세계와 삶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소우주)
6. 철학의 역할
이제 논고의 근본 물음 중 하나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철학의 명제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4.0031 모든 철학은 "언어 비판"이다. (...)
4.112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설(異說)이 아니라 활동이다. (...)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다.
철학은 말하자면 흐리고 몽롱한 사고들을 명료하게 만들고 명확하게 한계를 그어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사고를 명료화하는 활동이다. 언어는 사고를 위장하고, 따라서 명제의 논리적 형식은 실제 형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무의미한 물음과 명제들이 생겨난다. 따라서 철학의 목적은 명제나 물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비판을 통해 그러한 대부분의 물음과 명제들이 “거짓”이 아닌 "무의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4.003)
4.11 참된 명제들의 총체가 전체 자연 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
4.111 철학은 자연 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철학"이란 낱말은 자연 과학들의 위 아니면 아래에 있는 것을 의미해야지, 자연 과학과 나란히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명료화함으로써,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는 그 무의미성을 확립함으로써 명료화 활동을 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자연 과학의 논란 많은 영역을 확정하며(4.113), 생각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그음과 동시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4.114).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유의 한계를 그을 수 있음을 보인다. 그 방법이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4.115).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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