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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현대 철학/현상학Phänomenologie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1.
  1.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3)
  2. 2019.10.05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
  3. 2019.04.02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
  4. 2018.12.27 하이데거의 반시대적 고찰 : 니힐리즘과 존재의 빛남

2019.10.05 19:20 현대 철학/현상학Phänomenologie


8절 후설의 시간의식Zeitbewußtsein을 다루기 위한 예비 작업 -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중심으로

후설은 명증성Evidenz을 ‘사고한 것이 주어진 사태나 대상과 일치함’으로 사용한다.[각주:1] 이러한 명증성은 다시 사태와 사고가 일치하는, 즉 지향한 대상이 충족되는 충전적adäquat 명증성과, 주어진 사태가 존재하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필증적apodiktisch 명증성으로 구분된다.[각주:2] 이 부분에서는 일종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아데쿠아티오(adequatio)라는 단어는 흔히 동화, 일치라는 뜻을 지니며, 전통적인 진리개념- 즉, “진리는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에 있다.”에서 바로 그 ‘일치’에 해당한다. 이 단어의 유래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는 영혼의 체험, 즉 노에마Noema는 사고된 것으로서 사물과의 동화[일치]라고 말한다.[각주:3]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비센나(Avicenna)로부터[각주:4]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즉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정의를 수용하게 된다.

후설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명증성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명증성은 ‘의미 지향’과 ‘의미 충족 사이’의 일치로 의미 지향이 직관을 통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는 공허하다.[각주:5] 고로 실증적 자연과학이 표현하는 기호, 공식, 도형 등은 그 직관적 충족이 아프리오리하게 불가능한, 의미지향만 지닌 탐구방식에 불과하다.[각주:6] 이로써 후설은 자연과학이 탐구한다고 자부하는 그 자체An sich로서의 자연이 '의미 충족'과 진리성 검증이 불가능한 이념화된 산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각주:7]

이제 후설의 그 유명한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의 구분이 등장한다. Noesis의 어원은 사유, 인식하는 주관, 삶의 주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nous로 플라톤이 《국가》 제 6권에서 선분의 비유(519d-511e)를 들며 나온 개념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인식대상noema을 가시적인 것들ta horata, 감각적 대상들ta aistheta과 지성으로 알 수 있는 것들ta noeta로 나누며 이 중 전자에 그림자에 대한 짐작eikasia과 실재에 대한 확신pistis을 대응시키고 이를 속견doxa이라 부른다. 반면 후자에는 수학적인 대상에 대한 추론적 사고dianoia와 이데아에 대한 직관episteme을 대응시키고 이를 지성을 통한 인식noesis라 부른다. 후설은 후자를 취해 이를 의식의 인식 작용을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노에시스는 의식의 표층에서 표상작용이 발생하기 이전에, 주어진 감각 자료에 의미를 부여하여 통일적 인식 대상인 노에마를 구성한다.[각주:8] 한 가지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구성Konstitution 개념은 칸트 철학의 맥락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칸트에게 있어 구성이란 감성Sinnlichkeit에 주어진 잡다에 지성Verstand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사유형식인 범주Kategorie를 도식Schema 기능에 따라 적용한 것이다. 반면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식의 내용 역시 아프리오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의 구성은 실상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해 명료하게 밝히는 작용”으로써 역사적으로 해명함을 의미한다.[각주:9] 고로 이러한 의미의 구성은 세계의 구성이 아닌, 동일한 세계를 다층적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의 재구성에 해당한다.[각주:10][각주:11] 노에시스와 노에마는 의식의 지향성을 구성하는 상관적 요소로 그 관계나 대상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그러한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식 대상의 핵심을 파악하는 양상은 언제나 ‘지금’ 지각하여 주어진 활동성에서 배경으로 물러나 비-활동성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시간의식Zeitbewußtsein에 대한 분석이 필요해진다.

시간Zeit이란 칸트에 따르면, 공간Raum과 함께 감성 영역에서의 선험적a priori인 일종의 표상Vorstellung으로써, 그 자체로는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미리 선제되어야하는 조건Bedingung이다. 칸트는 앞서 언급한 흄의 경험론적 공박을 받아들이지만, 이로부터 흄의 모든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칸트는 모든 지식(판단)이 경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이 곧 그 지식이 순전히 경험적인, 다시 말해 우연적인 명제들이며 따라서 모두 감각 경험으로 다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반대한다. 칸트는 흄의 이러한 주장이 수학적 명제에 대한 그의 간과에서 비롯된 실책이라고 주장한다. 흄은 관념을 단지 인상이 지닌 생동성과 힘이 약화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니, 이는 실제로 감관의 수용성만을 인정한 것이다. 칸트는 흄의 주장처럼 우리의 모든 직관(Anschauung)[각주:12]이 감관(Sinn)에서 오지만, 또한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기능인 사유(Denken)를 통해 개념(Begriff)[각주:13]을 형성하고 그 대상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고로 칸트는 필연성에 대한 흄의 요구에 대해 선험 종합 명제를 제시한다. 순수 기하학과 수학은 분석적이지 않다. 그것은 선험적이고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순수 기하학과 수학은 선험적 표상인 시간과 공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4]

칸트는 수학의 명제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술이라는 견해를 좀 더 발전시켰다. 칸트는 수동적인 관조만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조를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활동을 전제한다. "개념을 구성한다."는 것은 정의를 제시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것에 선험적인 대상을 제공하는 것이다.[각주:15]

칸트는 순수 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인 종합 명제라고 보기 때문에, 흄의 경험론으로는 순수 수학의 성질을 해명할 수 없다고 본다. 공간과 시간은 흄이 수용적이라고 말한 그 점에서는 분명히 순전한 직관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요소가 전혀 섞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또한 순수한 직관이다.(달리 말해 감성의 질료가 아닌 형식이다.) 칸트의 근본 기획인 초월 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의 혁명적인 부분은 기존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던 대상들 자체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ens qua ens)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대상들에 대한 경험적인 개념을 다루는 것도 아닌,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개념을 다룬다는 것이다.[각주:16]

“나는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 일반에 대한 우리의 선험적(a priori) 개념들을 탐구하는 모든 인식을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개념들의 체계는 초월-철학(Transzendental-Philosophie)이라 일컬어질 것이다.”[각주:17]

“나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모든 고찰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만큼 사람들이 유념해야만 하는 하나의 주의를 해둔다. 곧, 선험적인 모든 인식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에 의해 어떤 표상들이 (직관이든 개념이든) 오로지 선험적으로 적용된다거나 또는 선험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러한가를 우리가 인식하는, 그런 선험적 인식을 초월적이라고 (…) 일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도 공간의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적 표상이 아니고, 이런 표상들은 전혀 경험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인식과, 그러면서도 이 표상들은 경험의 대상들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 초월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각주:18]

고로 초월철학이란, 그 자신은 경험적이지 않으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일컫는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의 탐구는 경험적인 대상을 다루는, 자연 과학의 탐구와 그 영역에 있어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초월철학은 오히려, 자연과학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경험이 가능하기 위한 인식의 가능성을 연역적으로 탐구한다. 칸트는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어떻게 선험적 개념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그 개념의 초월적 연역(die transzendentale Deduktion)이라” 일컫는다. 칸트는 이 연역을 철학자의 과제를 피고를 기소하려는 (로마법 체계의) 검사가 맞닥뜨릴 법한 과제에 비견한다. 검사는 두 개의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각주:19]

1. 권리 문제quaestio quid iuris

피고가 법을 위배했음을 어떤 권리로 주장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피고에 대한 기소가 타당한 법적 근거를 갖추었음을 보이는 것과 같다. 이를 보이려면 법규에서 다음과 같은 형식의 명제를 도출해야 한다. '피고가 X를 했다면, 그는 Y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을 처분했다면, 그는 절도죄를 저지른 것이다.)

2. 사실 문제quaestio quid facti

피고가 X를 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그가 자신의 것이 아닌 재산을 처분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피고에 대한 소송을 성립시키려면 위의 두 가지가 입증되어야 한다. 피고가 X를 했다는 점이 입증될 수 없다면, 피고가 X를 했다고 추정됨으로써 성립하는 모든 범죄에 대해 그는 무죄이다. 그리고 X를 하는 행위가 Y라는 범죄의 성립 요건이 된다는 점이 법규에서 도출될 수 없다면, 사실 관계가 어떻든, 심지어 피고가 X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셈이다.[각주:20]

로마법에서 권리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는 논변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법률 용어가 연역(Deduktion)이다.[각주:21] 고로 칸트는 초월적 연역에서 범주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과제를 범주의 초월적 연역(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 Kategorien)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범주와 관련한 칸트의 목표는 범주가 경험의 대상에 정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확립하는 것이다.[각주:22] 이는 권리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변임을 뜻한다.

이성의 권리문제는, 인간 이성(Vernunft)이 지닌 두 종류의 선험적 형식, 즉 감성과 지성을 사용하여 외부 대상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자격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각주:23] 칸트가 이러한 권리문제를 탐구함으로써, 즉 연역을 통해 얻은 가장 영향력 있던 성과가 바로 초월적 통각(die 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다.

이는 경험의 성립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칸트의 의도와 그 과정을 선험종합명제의 해명에서 찾으려는 방법론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험적인 순수한 개념들이 있다면[각주:24], “이 개념들은 물론 어떠한 경험적인 것도 함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오로지 그 위에 그것들의 객관적 실재성이 근거하는, 가능한 경험을 위한 선험적인 순전한 조건들이어야 한다.”[각주:25] 그런데 이 개념들을 우리는 범주에서 발견하므로[각주:26], 감각에 주어진 잡다, 곧 수용성에는 항상 자발적인 종합작용이 결합해서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각주:27] 칸트는 이러한 종합을 3가지로 들고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종합이 이루어짐에 있어 의식의 통일이라는 초월적 근거를 반드시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각주:28] 칸트가 초월적 통각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근원적인 “자기에 대한 의식”[각주:29]이다.

‘나는 사고한다(Ich denke)’는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그것은 표상으로서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겠는데-이 나에게서 표상되는 셈이 될 터이니 말이다. (...) 이 표상은 자발성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감성에 소속되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나는 이 표상을 순수 통각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그것을 경험적 통각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타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을 낳으면서, 모든 의식에서 동일자로 있는, 다른 어떤 표상으로부터도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각주:30]

9절 시간의식Zeitbewußtsein과 선험적 현상학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

이제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기의식의 초월적 통일이 권리문제에 국한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각주:31]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의 사실상의 현존에 관해서는 결코 확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나’가 없는 의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32] 이는 초월적 통각에 있어 그것이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이 필연적인 것이지, 실제로 항상 동반되고 있음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칸트주의자들은 이를 부주의하게 ‘현실화’했다.[각주:33]

고로 그것의 사실문제, 즉 의식의 실제적인 현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라고 사르트르는 파악한다. 칸트의 초월철학이 권리문제를 다룬다면, 후설의 현상학은 사실문제를 다룬다. “현상학은 의식에 관한 학적 연구이며, 의식에 관한 비판이 아니다.”[각주:34]

이 연구의 본질적인 방식은 직관이다. 후설에 따르면 직관이란 우리를 사물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각주:35] 더군다나 후설이 현상학을 ‘기술하는’ 학으로 명명한 것에 비추어 본다면 현상학은 ‘사실’에 관한 학이며, 현상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이란 ‘사실에 관한’ 문제들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은 실존의 문제들이다. 후설은 칸트의 초월론적 의식을 다시 발견하고 에포케(epoche)를 통해 그것을 거머쥔다.[각주:36]

후설은 칸트를 따라 시간에 관한 분석을 ‘선험적 감성론’이라 부른다.[각주:37] 그러나 칸트에게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의식의 통일이 의식의 시간성에 논리적으로 앞서는 반면, 후설에게는 의식의 통일이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시간은 모든 체험이 근원적으로 종합되고 구성되는 근원이다.[각주:38] 후설에 있어, 의식에 표상작용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노에시스가 주어진 감각자료에 의미를 부여해 노에마를 구성해야 한다.[각주:39] 인식 작용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활동성으로부터 비-활동성으로 변해간다. 그러므로 인식 대상이 구성되기 이전의, 인식 활동 자체가 이루어지는 시간의 심층 의식에서는 인식 작용과 그 대상, 질료로서의 인식한 내용과 형식으로서의 인식하는 작용의 구분이 없어진다.[각주:40] 남는 것은 오로지 내적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일 뿐이다. “시간의식은 모든 체험이 종합되며 통일되는 근원적 터전이다.”[각주:41]

후설이 연구하고자 하는 시간은 나타나는 시간 그 자체, 나타나는 지속 그 자체로, 의식이 경과하는 내재적immanent 시간이다.[각주:42] 내재는 의식 영역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의식영역 밖에 존재하는 초재Transzendenz와 구별된다. 또한 내실적reell은 의식작용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감각적 질료와 의식의 관계로 의식과 실재적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와 대립한다.[각주:43] 따라서 자아에 있어 순수 내재와 내실적 초재(인식 작용 속에 내실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은 지향적 내재(구성된 의미, 노에마)라는 접점을 갖는다. 이 노에마의 여집합이 구체적인 의식 체험의 흐름인 내실적 내재이며, 직관되지 않은 초재는 반면 내실적 초재에 있어 지향적 내재의 여집합인 순수 초재이다.[각주:44]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양화(量化) 가능한 객관적 시간이나 실재적 시간과는 달리, 현상학의 시간은 이러한 내실적 내재, 즉 체험된 ‘지금’과 ‘근원적 시간의 장(場)’을 다루고자 한다.[각주:45] 오히려 ‘감각’된 자료인 시간이 경험적 통각을 통해 구성해낼 때 비로소 이러한 객관적 시간과의 관계가 ‘지각’된다.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경우, 지각된 것은 잠시나마 현전Anwesenheit하는 것으로 남는다. 어떤 멜로디가 울려 퍼질 때의 개별적 음은 자극이나 운동신경이 정지한다고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데, 새로운 음이 울려 퍼진다고 해서 지나간 음이 과거로 밀려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각주:46]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매 순간마다 하나의 음만 남게 되어 잇달아 일어나는 음을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을 기억하고 지시하는 내재적 발생의 짝짓기를 후설은 근원적 연상Urassoziation이라 부른다. 이 때 분리된 기억들은 감각된 것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따른 연상적 일깨움에 근거해서만 하나의 시간적 상관관계 속에서 직관적으로 질서 잡히게 된다. 바로 이 연상 작용이 내적 시간의식에서 가장 낮은 단계의 종합 위로 층을 이루며 올라간 ‘수동적 종합’이다.[각주:47]

지속하는 시간의 객체를 근원적으로 산출하는 원천이자 시점은 근원적 인상Urimpression이다. 시간의식의 끊임없는 흐름에는 매순간 ‘지금’이 과거에서 미래로 부단히 이어지는 '가로방향 지향성'과 그 지금이 지나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고 변양된 채 침전되어 유지되는 '세로방향 지향성'이라는 이중의 연속성이 있다. (...) 1차적 기억으로 지각하는 과거지향Retention과 근원적 인상인 생생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것을 현재에 직관적으로 예상하는 미래지향Protention이 연결되어 통일체를 이룬다.[각주:48]

과거지향이란 라틴어 retentare에서 유래한 용어로 “굳게 보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방금 전에 나타났다 사라진 것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작용을 뜻하며, 방금 전에 지각된 것이 현재에 직접 제시되는 지각된 사태로서 1차적 기억(직관된 과거)이다. 반면 미래지향은 이미 친숙하게 알려진 것에 근거해 미래를 직관적으로 예측하는 작용을 뜻한다.[각주:49]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현상학에 이르러서 이념성과 실재성의 구분이 더 이상 의식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설에게 있어 실재적real은 시공간적으로 일정하게 지각하고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 개체의 특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렇지 않은 이념적idea인 것과 구별된다.[각주:50] 실재성과 이념성은 시간성을 구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다양한 작용 역시 실재성을 갖는다. 따라서 내실적 내재와 지향적 내재 모두 현상학에 있어서는 실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의식을 발생적 분석의 기본 틀로 삼음으로써 오늘날 흔히 말하는 정적 분석과 발생적 분석의 구별이 생겨나게 된다.[각주:51] 후설은 이로부터 선험적 현상학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후설의 《논리 연구》는 사르트르가 이해했던 것처럼 일종의 경험적 현상학, 기술적 심리학이다. 후설은 논리연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구성하는 의식(노에시스)의 현상학인, 선험적 현상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선험적 현상학(die transzendentale Phänomenologie)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의 초월 철학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나, 칸트적 의미의 초월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후설은 transzendental이라는 표현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모든 근대 철학에 의미를 부여한 원본적 동기originale Motiv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한다.[각주:52] 즉 그것은 “모든 인식이 형성되는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 묻는 동기이며, 인식하는 자가 자신의 인식하는 삶에 대해 자신을 성찰하는 동기”[각주:53]이다. 따라서 후설에게 있어 ‘선험적’의 대립항은 칸트와 달리 ‘세속적’(mundan)이다.[각주:54] 달리 말하면, 후설에게 있어 선험적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형식적 조건이나 존재자에 대한 소박한 자연주의적 태도를 넘어서 일체의 타당성 자체를 판단중지하고 궁극적 근원으로 돌아가 묻는 반성적 태도를 뜻한다.[각주:55]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후설이 선험적 현상학의 방법에 있어 핵심으로 삼은 것은 현상학적 에포케, '판단중지Epoche'이다. 판단중지란 자연적 태도로 정립한 실재세계의 타당성을 괄호 속에 묶어 유보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경험에 있어 미리 형성하거나 이론을 통해 형성한 일체의 편견을 보류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심과 태도를 변경하는 것이다.[각주:56]

대상의 무엇임(본질)Wesenheit에 대한 판단은, 이러한 극미한-지금을 주파하는 현상들Erscheingungen의 흐름에 비하면 이미 사후적이고 2차적인 일이다.[각주:57] 대상에 대해 ‘~임’과 ‘~이 아님’이라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했을 때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 현존(실존)Anwesenheit하는 현상학적 잔여인 이 현상들에 대해 후설은 질료Hyle라 이름한다.[각주:58]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의 급격한 흐름이 주어지는, 그러나 그 자신은 주어지지 않는 터가 필요하므로, 이를 초월적인 순수의식이라 일컬은 것이다.[각주:59] 물론 양자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통일되어 흘러가므로, 후설은 이 영역을 순수의식의 내실적 영역(reelle Späe des reine Bewußtseins)이라 부른다.[각주:60] 이렇게 근원적이고 내적인 영역에서 시간의식이 성립하며, 이 의식이 ‘생생한 현재’(lebendige Gegenwart)를 산출해낸다.

내적 시간의식의 수동적이면서 근원적인 종합Ursynthesis은 근원적 인상Urimpression과 과거지향Retention, 미래지향Protention의 종합인 바, 이로부터 산출되는 생생한 현재의 근원은 극미한 지금’infinitestimales Jetzt이자, 철저한 현존(Existenz, existentia)이다.[각주:61] 후설은 이렇게 서양 철학사의 대립항으로 여겨지던 실존existentia과 본질essentia사이의 대립, 그리고 실존에 대한 본질의 우위를 지양하고, 현존의 터 위에서 본질을 직관한다. 실존을 뜻하는 ‘exsistere’는 이는 그리스어 ‘…밖에’ 혹은 ‘…너머’라는 뜻을 지닌 ‘εξ -’(eks-) 혹은 ‘εκ-’(ek-)에서 온 'ex-'와 ‘자리를 잡다’라는 뜻을 갖는 ‘sistere’의 합성어로 ‘…밖에 자리하다’ 혹은 ‘…너머에 자리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 ‘~너머’의 ‘~’가 바로 '극미한 지금'인 것이다.[각주:62]

3장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 물음과 실존 개념

10절 존재 물음 제기의 필요성과 실존 개념

후설은 현상학적 에포케를 통해 소박한 자연적 태도를 괄호 안에 넣는다. 이러한 현상학적 시선의 성과를 후설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우리를 무와 대면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획득되는 것, 좀 더 분명히 말해 그렇게 성찰을 하는 자로서 내게 획득되는 것은 모든 체험들과 순수한 의견들을 포함하는 내 순수한 삶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적 의미에서 현상들의 우주가 획득되는 것이다. (...) 에포케란 내가 나를 순수한 자아로서 포착하는 철저하고 보편적인 방법이다.[각주:63]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우리는 의식이 텅 비어있는 공허한 상자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식을 충분히 깊게 파고들다 볼 때 우리가 그 사물이 있는 바깥으로 내던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각주:64]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볼만한 점은, 후설의 말마따나 자기의식이 지각의 지각에서 부차적으로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초월적 자아를 전체의식 과정의 처음으로 놓을 수 있냐하는 점이다.[각주:65] 이는 역설적이지 않은가? 후설이 하고자 했던 작업을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주-세움의 존재론의 극복으로 본다면, 후설은 분명 의식 과정을 자아와 세계의 분열 이전으로 돌려놓았다.[각주: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해체되었던 그 자아는 다시 확고부동한 확실성의 기준으로 세워진다. 후설은 현상학적 태도를 다시 초월적 자아의 장소로 선언해버렸던 것이다.[각주:67] 이것이 바로 후설이 데카르트적 자아 연구에 집착했던 한 원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후설의 현상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후설과 결별하게 된다. 2장에서 본 것처럼 후설의 진리 개념과 자아 개념 등은 전통 형이상학-인식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하이데거는 이 점을 바로 후설의 실책이라 여겼던 것이다. 후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묻지 않았다. 인간, 곧 지향적 의식이란 후설에 따르면 그저 자연을 향한 되던짐Gegenwurf이라는 규정을 획득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는 아직 물어지지도 않은 것이 아닌가?[각주:68]

하이데거는 의식 철학에 대한 딜타이와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다시 발견한다. 역사적 삶을 연구했던 딜타이는 초월적 자아가 단지 역사의 피안에 위치한 무력한 의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삶이 실제로 “되풀이해서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결정해야하는 상황에 직면”[각주:69]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에도, 의식 철학은 생생한 삶의 위험으로부터 단순히 도피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삶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것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확립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각주:70]

따라서 하이데거는 후설이 괄호 속에 집어넣었던 것을 풀고 실존Existenz을 주제로 삼는다.[각주:71] 그런데 이 실존은 후설이 표현하고자 했던 현존Existenz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떤 것이 현존Anwesenheit한다.'는 기본적으로 ‘눈앞에 있음’을 뜻하며 이는 후설에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는 자연적 태도로 인해 훼손된 현존을 복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 현존 자체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 단어를 타동사적으로 사용한다.[각주:72] 즉 실존Existenz이란 것은 더 이상 눈앞에 있음Existenz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것, 실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존이란 동물이나 식물과는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존재방식, 자기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존재인 현존재Dasein에게 귀속된다. 그것은 있는 무엇일 뿐만 아니라 거기da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 무엇이다.[각주:73] 따라서 실존이란 시간 속에서 우려하고 근심하며 스스로를 기획-투사Ent-wurf하는 현사실적 삶이다.[각주:74]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성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어찌하여 무Nichts가 아니고 존재Sein인가? 철학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존재하고 있는 세계Welt에 대한 경이로움과 이러한 세계에 내던져있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나의 기분Stimmung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분을 통해 현존재의 불안이 드러난다. “존재는 짐인 것으로 드러났다.”[각주:75] 일찍이 현존재는 한 번도 자신이 존재하고자 하는 여부를 자유롭게 결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각주:76]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것을 개시하지만 그 자신은 개시하지 않는 지평Horizont에 대해 후설이 제시했던 의식Bewußtsein을 거부하고 존재Sein를 그 근원으로 삼는다. 실로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의 역사에 있어 언제나 소홀히 다루어졌다.[각주:77] 하이데거의 이러한 진단은 사뭇 충격적이라 혹자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형이상학의 근본 주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러한 물음들은 언제나 존재자Seiende를 제시했을 뿐, 존재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그런 어떤 것은 아니다.(Sein inst nicht so etwas wie Seiendes)”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한국어로는 그 특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Was ist 'Sein'”은 우리가 묻고자 하는 그것(Sein)이 이미 물음에 포함되어 있다는(ist) 점에서 독특한 물음이다. 우리는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물음을 물을 때 이미 ‘이다’에 대한 이해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각주:78] 이렇게 우리는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를 ‘이미’ 지니고 있다.[각주:79] 하이데거는 이 물음을 보다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연관구조를 제시한다. 먼저 “존재란 무엇인가?”에서 물어지고 있는 것은 존재(Sein)이며, 물음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존재의 의미(der Sinn von Sein), 그 물음이 걸려있는 것은 다시 존재자 그 자신(das Seiende selbst)이라는 점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존재자 중에 물음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현존재(Dasein)이라 부른다. 오직 인간(현존재)만이 그러한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또한 그 존재자의 존재이해가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구조(Wesensverfassung)에 속한다.

현존재가 그것과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Existenz이라고 이름한다. (...)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부터 이해한다.[각주:80]

이렇게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각기 그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그의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획득할 수도 있다.[각주:81]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상실하거나 아직 획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본래성Eigentlichkeit과 비본래성Uneigentlichkeit으로 표현한다.[각주:82] ‘eigentliche’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이란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까닭에 이 단어의 명사형 Eigentum은 ‘소유물’ 내지는 ‘재산’이라는 뜻을 갖는다.[각주:83] 고로 실존의 획득이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획득해야함을 의미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존의 의미를 일상적인 존재양식을 지닌 그들(das Man)과의 대비를 통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낸다. 현존재는 규범이나 집단이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의 영웅으로 선택함”으로써 자기 본래성에 이른다.[각주:84] 하이데거가 비록 본래성에 이르는 집단적 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존재와 시간》에서는 이런 유아론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드러난다. 실제로 하이데거 자신도 이러한 접근법을 “실존적 유아론”이라 부르기까지 한다.[각주:85]

인간은 이미 세계에 내던져진(geworfen) 존재로, 마찬가지로 또한 자신의 가능성을 내던질(entwerfen) 수도 있다. 독일어 동사 werfen은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자동사인데, 하이데거는 이 동사의 과거형인 geworfen(던져진)과 대비되는 의미로 entwerfen을 사용한다. 독일어 동사 entwerfen은 설계도를 그리다, 입안하다, 구상하다 등을 의미하는데, 하이데거는 이것의 명사형인 Entwurf(기획, 계획, 설계도)를 그 원래 의미와, 비분리전철 ent와 wurf의 합성에 착안한 Ent-wurf의 ‘-던짐’의 의미를 모두 담아 기투(기획투사)라는 자신만의 용법으로 사용한다. 고로 Entwurf는 기투를, Geworfenheit는 피투성을 의미하게 된다.

11절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결정적 차이

이로써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 개념 사이의 본질적 의미가 밝혀졌다. 사르트르는 1943년 발표한 《존재와 무》에서 하이데거가 현존재라 부른 것에 헤겔 강의에서 코브가 사용한 용어인 대-자Für-sich라는 이름을 붙인다.[각주:86] 사르트르는 그 자신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계승하고 있다 여겼다. 이는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내던져짐, 기투, 배려 등의 실존범주를 사르트르 역시 사용하고 있는데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각주:87]

물론 여기서부터 헤겔, 후설, 하이데거를 독창적으로 원용한 사르트르의 고유한 철학이 전개된다. 먼저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주목하지 않았던 공동-존재는 사르트르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현존재를 양심의 부름Gewissensruf에 따른 결단성Entschlossenheit으로 이끄는 신학적 모티브와 양심의 윤리는 사르트르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르트르는 책임의 윤리를 기술하는데 중점을 두며, 의식을 철학의 중심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후설을 계승한다.[각주:88]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이라는 단어를 데카르트적 의미의 ‘눈앞에 있음’, 현전으로 사용한다. 인간은 우선 단순히 실존하고있으며(눈앞에 있으며), 자신의 그러한 눈앞에 있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스스로를 기투해야만 하는 것이다.[각주:89]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이야기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현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의 강연 이후 자신을 실존주의자라 부르기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했던 일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이데거는 사르트르적 의미에서의 실존 개념이 자신의 철학을 왜곡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물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자유 개념에 매력을 느꼈고, 하이데거적인 실존의 의미를 대-자Für sich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느끼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대한 답변으로 《휴머니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간명한 어구는 전후 유럽의 패전이후 우울에 잠겨있었던 독일과 프랑스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자유와 책임의 철학, 참여의 철학임을 밝히면서 실존주의에 대한 앞선 비판들에 맞대응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이 당시 이미 나치즘 참여와, 패전, 총장직 수행 실패 등으로 끝없는 무력감에 빠진 상태였다. 하이데거는 정치적 무력감을 느꼈고, ‘나는 일개 철학자일뿐’이라고 말한다.[각주:90] 그는 오직 사유Denken에 몰두하고 싶을 따름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던 실존주의의 자기 책임성과 참여의 휴머니즘에 대해 하이데거의 대응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이데거는 그의 도피처였던 사유로부터 휴머니즘에 대답하는 방향으로 (혹은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여기에는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대한 단서가 상당수 들어있지만, 또한 한나 아렌트가 비판했던 본질화로 인한 ‘우매함’ 역시 적지 않게 보인다.[각주:91]

하이데거는 따라서 사유가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를 표한다. 사유가 이론을 세우고 실천이 사유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은 이미 유용성에 지배된 생각이다. 사유도 참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사유가 정치나 사회의 실천적 문제에서 유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각주:92] 하이데거는 철학의 유용성을 증명하라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반대하면서, 철학이 일체 학문적 태도에 선행하는 경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현상학적 구호를 다시금 내보인다. 사유는 언제나 이러한 경험 곁에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유용성을 입증하려는 사유는 이미 철학으로선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존재의 경험으로 나아간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현존재분석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현존재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다가 원래 잡았어야 할 존재를 정작 놓쳐버렸다고 느꼈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용어로 붙잡고자 했던 것도 ‘실현되어야 할 고유한 존재’로서의 존재Sein였는데도 말이다.[각주:93]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의도와 기투의 용어로서 ~으로의-존재(zu-Sein)를 말하기도 했다.[각주:94]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실존의 의미를 탈-존Ek-sistenz으로 확장한다. "존재의 빛트임Richtung안에 서있음을 나는 인간의 탈-존이라 명명한다. 이러한 존재 양태는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각주:95] 실존은 이제 결단성으로부터 존재에의 초연한 내맡김으로 나아간다.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버리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의 경지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내맡김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으로 나가는 핵심 개념이 된다. 인간은 이제 존재로부터 말 건넴을 받는다. 존재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기분을 갖게 하며, 사유는 본래적 신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감함이 된다. 본래적 신의 소리 없는 부름(Sage)으로부터 응답하는 자들이, 존재의 고향에서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파수할 때만, 비로소 본래적 신의 신성이 세계 내에 드러난다는 것이다.[각주:96]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유에서 사유가 이론적이거나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고로 이제 하이데거가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이유는 명백해진다. 휴머니즘은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인간다움을 충분히 높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각주:97]

휴머니즘이 지나치게 가치 절상되었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평가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봤을 때 정치적 무력감의 표현이며, 파렴치하기도 하다. 정작 그가 참여하였던 국가 사회주의가 “최근 파국적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가치 하락 시켰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외면”[각주:98]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해야 하며, 설령 신의 실존에 대한 타당한 증명이 있더라도, 인간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건 전혀 없다.”는 사르트르의 철학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다.[각주:99]

아마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진정으로 위대하고 심오한 사유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판단의 심오함과 위대함이 유대인 학살이나 세계 대전과 같은 일을 존재에의 사유에 비하면 ‘사소한’ 일로 여기게 만든다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심오함이 어떠한 윤리에 발붙이고 있는지 보다 합당하게 물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야스퍼스와 한나 아렌트의 서신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을 한나 아렌트에게 전하면서 경멸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존재에 관한 사변에 빠져있네. 그는 존재Seyn라고 쓰지. (...) 영혼이 순수하지 못한데도..... 정직하지 못한데도, 가장 순수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일까?”[각주:100]

“문명을 비방하고 y자로 존재를 쓰는 그 삶은 실상 그가 숨어든 생쥐 굴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숨어든 건 순례를 하듯 자신을 찾아와 경탄을 표하는 사람들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럴듯한 자기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1200m를 올라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거예요.”[각주:101]

  1. Ibid. p.41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290 [본문으로]
  4. 그는 correspondentia(상응, 대응)이나 covenientia(합치)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5.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41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p.41-42 [본문으로]
  8. Ibid. p.44 [본문으로]
  9. Ibid. p.514 [본문으로]
  10. Ibid. p.514 [본문으로]
  11. 후설이 수동적 의미를 지닌 재귀동사의 형태로 “구성된다.”(sich konstituieren)고 쓰는 것도 인식되는 대상이 지닌 상당한 권리와 우선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같은 곳 p.514) [본문으로]
  12. 칸트에 따르면, 직관은 개별 표상(repraesentatio singularis)으로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다. 직관은 대상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곧바로(직접적으로), 이른반 “직각적”으로 관계 맺는다.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 해제, p36-37 참조) [본문으로]
  13. 독일어 Begriff는 동사 begreifen에서 나온 단어로, '붙잡다', '포함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등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스테판 쾨르너, 『수학철학』, 번역 최원배, (주) 나남, 2015, p.41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김상봉, [기고] 백종현과 전대호의 비판에 대한 대답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211 [본문으로]
  18. Ibid. p.307 [본문으로]
  19. 앨런 우드, 『칸트 입문1: 생애와 선험적 종합 인식』, 번역 김동욱, 김은정, 박준호, 신우승, 차하늘, 전기가오리, 2018, p.106-107 [본문으로]
  20. Ibid. [본문으로]
  21. Ibid. p.108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2004, p.106 [본문으로]
  24. 칸트는 이것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25.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번역 백종현, 아카넷, 2006, p.318 [본문으로]
  26. Ibid. p.319 [본문으로]
  27. Ibid. p.320 [본문으로]
  28. Ibid. p.326 [본문으로]
  29. Ibid [본문으로]
  30. Ibid. p.346 [본문으로]
  31. 장 폴 사르트르, 『자아의 초월성』, 번역 현대유럽사상연구회, 믿음사, 2017, p.18 [본문으로]
  32. Ibid. p.18-19 [본문으로]
  33. Ibid. p.19 [본문으로]
  34. Ibid. p.23 [본문으로]
  35. 우리는 6절과 7절에서 후설이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의 단적인 인식 불가능성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을 지향성 개념을 통해 확인하였다. 칸트의 경우 물자체로의 귀결은 그의 철학이 애초에 마주-세움(Gegen-stand)의 존재론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6. Ibid. p.24-25 [본문으로]
  37.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522 [본문으로]
  38. Ibid. [본문으로]
  39. Ibid. p.44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
  41. Ibid. [본문으로]
  42. Ibid. p.217 [본문으로]
  43. Ibid. p.514 [본문으로]
  44. Ibid. p.515 [본문으로]
  45. Ibid. p.218 [본문으로]
  46. Ibid. p.45 [본문으로]
  47. Ibid. [본문으로]
  48. Ibid. p.45-46 [본문으로]
  49. Ibid. p.513 [본문으로]
  50. Ibid. p.515 [본문으로]
  51. 이종훈 교수는 정적 분석과 발생적 분석의 대립으로 파악해왔던 기존 후설의 연구가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연구가 늦게 발굴되면서 일어난 오해라고 이해한다. 발생적 분석은 모든 개별적 의식 체험의 시간적 발생Genesis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으로 당연히 시간의식의 지향적 지평 구조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발생적 분석이 정적 분석보다 우월한 분석으로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설 현상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이종훈 교수의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종훈, (같은 책, p.47, p. 518) 참고 [본문으로]
  52. Ibid. p.49 [본문으로]
  53. Ibid. p.49-50 [본문으로]
  54. Ibid. [본문으로]
  55. Ibid. p.49 [본문으로]
  56. Ibid. p.56 [본문으로]
  57.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58. op. cit. [본문으로]
  59. op. cit. [본문으로]
  60. op. cit. [본문으로]
  61. op. cit. [본문으로]
  62. op. cit. [본문으로]
  63.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141 재인용 [본문으로]
  64. Ibid. p.146 [본문으로]
  65. Ibid. [본문으로]
  66. Ibid. [본문으로]
  67. Ibid. [본문으로]
  68. Ibid. p.150 [본문으로]
  69. Ibid. p.151 [본문으로]
  70. Ibid. [본문으로]
  71. 리처드 케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번역 임헌규, 곽영아, 임찬순, 한울, 1992, p.45 [본문으로]
  72.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215 [본문으로]
  73. Ibid. [본문으로]
  74. Ibid. [본문으로]
  75. Ibid. p.22 [본문으로]
  76. Ibid. [본문으로]
  77.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15 [본문으로]
  78. Ibid. p.20 [본문으로]
  79. 하이데거는 이것을 현사실Faktum이라고 표현한다. [본문으로]
  80. Ibid. p.28 [본문으로]
  81. Ibid. p.67 [본문으로]
  82. Ibid. p.68 [본문으로]
  83.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84.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291 [본문으로]
  85. Ibid. [본문으로]
  86. Ibid. p.576 [본문으로]
  87. Ibid. [본문으로]
  88. 조광제.(2010). 하이데거의 ‘실존’을 벗어난 사르트르의 ‘현존’. 철학논집, 0(23): 141-173 [본문으로]
  89.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77 [본문으로]
  90. Ibid. p.604 [본문으로]
  91. Ibid. p.603 [본문으로]
  92. Ibid. p.605 [본문으로]
  93. Ibid. [본문으로]
  94. Ibid. p.608 [본문으로]
  95. Ibid. p.609 [본문으로]
  96. 신상희, 하이데거와 신, 제 2장 『철학에의 기여』와 궁극적 신, 철학과 현실사, 2007, p.84-87 [본문으로]
  97.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610 [본문으로]
  98. Ibid. [본문으로]
  99. Ibid. p.611 [본문으로]
  100. Ibid. p.620 [본문으로]
  101. Ibid. p.621 [본문으로]




             


<사회철학 발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2장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과 현상학(Phänomenologie)의 창설

4절 논리주의(Logizismus)와 심리학주의(Physchologismus)의 대립

앞서 설명했듯이 데카르트가 결행한 cogito의 확립은 근대의 존재론을 확실성을 기반으로 한 마주-세움(Gegen-stand)의 존재론으로 이끌었다. 이 확실성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clara et distincta, 즉 명석하고 판명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명석한 지각이란 “집중하고 있는 정신에 현존하며 드러난 지각”을 의미하며, 판명한 지각이란 "명석하기 때문에 모든 다른 지각과 잘 구별되어 단지 명석한 것만을 담고 있는 지각"을 의미한다.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명석 판명한 지각(clara quaedam distincta perceptio) 이외에 다름 아니다. (...) 그러므로 내가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regula generali)으로 설정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각주:1]

이로부터 명석하고 판명한 지각을 어떻게(wie) 얻을 수 있냐는 물음이 나타난다. 이에 대한 근대 철학자들의 대답은 거칠게 말해 판단의 형식에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실로 데카르트의 res cogitans, 생각하는 사물은 온전히 실체로서만 규정되어 있는, 즉 실체 이외에 전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unbestimmt)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그러한 실체에 내재되어 있는 능력 내지 속성으로써 지성intellectus 내지 이성ratio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2] 즉 생각하는 것은 의심할 수 있고 의심하고 있는, 감각을 불신하는 실체이다.[각주:3]

라틴어로 ratio인 이성은 고대 그리스어 logos에서 나왔으며 독일어로는 Vernunft로 번역된다. 로고스Logos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다의적이기 때문에, 한 가지 의미를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로고스는 이성Vernunft, 판단Urteil, 개념Begriff, 정의Definition, 근거Grund, 관계Verhältnis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며, 기본적으로 Rede, 즉 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각주:4] 그러나 그것의 원래 의미에 충실하자면 로고스는 “말에서 그것에 관하여 ‘말’이 되고 있는 그것을 드러나게 함을 뜻한다.”[각주: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아포파이네스타이(ἀποϕαίνεσϑαι)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 자체에서부터 ‘보이도록 해줌’”[각주:6]을 의미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가 영원한 생성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던 로고스Logos는 이후 인간의 지성의 근거인 동시에, 인간의 지성nous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의 원천으로 이해된다.[각주:7] 그렇기에 인간은 zoon logon exon, 로고스를 지닌 존재이며, 로고스는 신적 이성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 자연의 빛lumen naturale로 규정된다.[각주:8][각주:9]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이러한 이성의 능력으로부터 두 가지 판단 형식과 진리를 구분해낸다. 하나는 분석 판단이자, 이성의 진리verites de raison이며, 다른 하나는 종합 판단이자 사실의 진리verites de fait이다. 이는 그가 1714년에 쓴 단자론(Monadology)에 잘 나타나 있다.

두 가지 종류의 진리, 즉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가 있다. 이성의 진리는 필연적이고 그 반대가 불가능하다. 사실의 진리는 우연적이고 그 반대가 가능하다. 진리가 필연적일 경우, 분석을 통해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분석이란 기본적인 것에 다다를 때까지 단순한 관념과 진리들로 분해하는 것이다.[각주:10]

이성의 진리란 분석판단, 즉 그 판단의 부정이 필연적으로 모순을 함유하고 있는 판단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다.”라는 명제는 그 부정인 “총각은 미혼의 남성이 아니다.”가 언제나 모순을 함축하고 있는 명제이다. 이는 총각이라는 개념이 미혼의 남성이라는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고로 총각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관념과 진리들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그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얻어낸 판단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반면에 사실의 진리란 종합 판단을 일컬으며,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우연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이러한 판단들은 감각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에, 경험적인 명제이며, 판단 그 자체로 필연적으로 참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라는 명제는 날마다 그것의 관찰을 통해 믿음으로 확립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참임을 보장할 수는 없다.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상황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판단은 우연적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러한 이성의 진리, 즉 분석판단이 필연적인 명제라는 점은 모순율(A ∧ ~A)에 근거한다. 그는 모순율을 동일률(A=A)과 배중율(A V ~A)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라이프니츠는 항진 명제뿐만 아니라 수학의 공리 공준, 정의와 정리는 모두 이성의 진리로써 동일성 명제(Identical Proposition)이며, 그 반대는 모순율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러한 명제들 역시 유한번의 분석 절차를 통해 이성의 진리임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논리주의(Logizismus)라는 이름으로 계승된다. 이들은 라이프니츠를 따라 “논리학이 순수한 이론적 학문이기 때문에 심리학이나 형이상학과 독립된 분과라고 주장”[각주:11]하였다.

반면에 논리학의 본성에 대해서 정반대의 주장을 했던 학파도 있다. 이들은 그 연원을 따져보았을 때, 흄(David Hume)의 경험주의 인식론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앞서 말한 사실의 진리, 즉 종합 판단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무한한 분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을 도입함으로써 종합 판단이 실은 분석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기존의 형이상학이 시도한 신 존재 증명은 칸트Kant가 초월적 변증론die transzendentale Dialektik에서 보인 바와 같이, 이성의 궤변적인 추리에 근거한 부당한 시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가 설령 칸트의 비판을 도외시한다 할지라도, “사실판단이 실은 분석판단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신과 같은 어마어마한 존재자를 설정해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라이프니츠의 체계가 정합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의 참임을 보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끌어들여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의 최선의 세계임을 “증명”하지만,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체계는 1755년 리스본에 찾아온 대지진과 함께 휩쓸려 사라진다.

흄은 이러한 체계가 그저 “있을 법”할 뿐, 경험을 그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단론에 불과한 것이라 비판한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여왕은 그 핏줄이 경험이라는 천민에서 근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 신을 증명했다고 말하는 형이상학 저작들은 모두 불에 태우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관념들은 공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탁월한 직능들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하고 지성적인 조망(pure and intellectual view)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많은 불합리를 감출 수 있고 또 모호하고 불확실한 관념에 호소함으로써 명석한 관념의 판결에 복종하기를 거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책을 쳐부수기 위해 우리는 여러 차례 거듭 강조되었던 관념은 모두 인상을 묘사한 것이다라는 원리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각주:12]

칸트(Kant)는 『서설』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흄의 경험론 철학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나고자 한다.[각주:13] 흄은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을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것으로 환원시킨다. 그것은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이다.[각주:14] 그런데 흄에 따르면 인상은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각주:15]이요, 관념은 그 기원을 따져보았을 때, “내가 느낀 인상의 정확한 재현(representation)”[각주:16]에 불과한 것이다. 고로 모든 종류의 관념은 경험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는 “형이상학의 유일하지만 중요한 하나의 개념”[각주:17]인 인과성 개념 역시, 그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필연성이 습관으로부터 유래한 “상상력의 사생아”[각주:18]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로 흄은 모든 판단을 우연적인 사실 판단으로 환원시키며, 명석 판명한 학문의 기초를 세우려는 합리론의 시도는 회의론의 공박을 이겨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심리학주의(Physchologismus)는 흄의 이러한 생각을 물려받아, 논리학이 판단과 추리의 규범을 다루는 실천적 학문으로 심리학에 의존하는 분과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논리법칙이란 심리적 사실에 근거한 심리법칙이기 때문에 논리학은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이를테면 모순율이란 서로 모순된 명제를 동시에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립되는 마음의 신념을 가리킨다. 따라서 심리학이라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발견함으로써 논리 법칙 역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심리학주의의 견해이다.

5절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비판과 현상학Phänomenologie의 목표

수학자로 출발하였던 후설은 이러한 대립에 대한 응답으로 논리주의와 심리학주의 양측을 모두 비판한다. 이에 따르면 논리학이 이론적 학문이라 주장하는 논리주의와 규범적 학문이라 주장하는 심리학주의의 대립은 사실 외관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 이론적 학문은 존재의 사실을 다루며, 규범적 학문은 존재의 당위를 다룬다.[각주:19]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명제를 같은 의미에 대한 상이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모든 군인은 용감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는 ‘용감한 군인만이 훌륭한 군인이다.’라는 사실 명제로 바뀔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각주:20] 고로 논리학이란 “본질적으로 이론적 학문에 속하고 부차적으로만 규범적 성격을 띤다고 정리할 수 있다.”[각주:21]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법칙들이 “올바른 판단과 추리에 관한 기술”[각주:22]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규범적 학문이며, 이러한 규범성의 근거는 인간의 심리적 활동에, 즉 심리학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 Prolegomena zur reinen Logik)는 이러한 심리학주의의 견해를 비판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대표적인 비판은 이들의 주장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주의는 논리학의 객관성이 심리학적 사실이라는 우연적 사실로부터 도출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객관성이란, 사실이 변하면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우연적인 것이므로, 심리학주의의 주장 역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회의주의의 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후설의 비판이다.

더불어 심리학주의는 명증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심리적 사실이므로 논리학의 명증성 역시 심리학으로부터 유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설은 이에 대해서도 논리적, 수학적 명제들은 명증성이라는 상태의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명증성의 이념적 조건을 다룬다고 반박한다. 모순율이 설령 우리에게 특정한 심적 상태를 갖게 한다 할지라도, 모순율 자체는 A와 ~A가 이념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순수논리법칙은 그 명제가 다루고 있는 대상의 존재여부를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명제의 타당성을 판단하고 있다. 둥근 사각형에 대한 명제는 당연히 둥근 사각형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 둥근 사각형은 그것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형식상 오직 거짓인 진리치를 갖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순율은 그 명제의 타당성에 대해 판별할 뿐, 판단의 내용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다.

고로 논리학의 본성을 심리적 사실(모순된 두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신념)로부터 도출해내려는 심리학주의는 (말 그대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규범성을 지닌 심리학의 사실들은 실재적인 것(Reales), 다시 말해 명제의 내용과 관련을 지닌 반면에, 논리학의 타당성은 그 형식, 즉 이념적인 것(Ideales)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심리학의 사실들로 논리학의 규범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겠다는 심리학주의의 기획은 탑의 주춧돌을 빼서 위에 쌓겠다는 발상과 다를 바가 없다. 명제의 내용이 실로 형식과 관련하는 이념적인 것에 앞선다면, 이 앞선 내용의 형식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무한소급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작용과 이 작용을 통해 통일적으로 구성된 이념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내용의 혼동”[각주:23]이 심리학주의가 이러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다.

“지각의 영역에서 ‘보지 못한 것(Nichtsehen)'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듯이, 명증성이 없다고 비-진리는 아니다. (...)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듯이, 진리가 없는 곳에서는 명증성을 얻을 수 없다.” (논리 연구 제 1권, 190~191쪽)[각주:24]

“심리학주의 비판의 핵심은 곧 이념적인 것(Ideales)과 실재적인 것(Reales) 그리고 이념적인 것이 실천적 계기를 통해 변형된 규범적인 것(Normales)의 근본적 차이를 인식론적으로 혼동한 기초이동(metabasis)에 대한 지적이다. 후설은 이것들의 올바른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경험이 ‘발생하는 사실’(quid facti)이 아니라 경험이 ‘객관적으로 타당하기 위한 권리’(quid juris), 즉 ‘어떻게 경험적인 것이 이념적인 것에 내재하며 인식될 수 있는지’를 해명한다.”[각주:25]

결국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분한 이래로, 어느 한쪽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대립이 이름만 바꿔서 2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후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구분 자체가 문제시되는데, 이는 ‘이 둘 사이의 관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가 전혀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후설이 ‘논리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도출된다. 오히려 후설은 헤르바르트, 볼차노, 마이농 등의 객관적 논리학주의도 철저하게 비판하며 주관과 객관의 구분 자체를 문제시한다. 즉 후설에게 있어 주관과 객관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사실상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증과학은 실재의 객관적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학문의 위기를 초래했다. 의식인 주관은 단순히 객관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 실재를 향해 움직이는 지향성Intentionalität을 지니고 있다. 고로 후설은 모든 학문의 ‘객관적’ 진리가 인간 의식의 활동으로부터 다시 정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설은 이러한 방식을 현상학적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어떻게 세계가 처음으로 인간 의식에 나타나는가?”를 탐구함으로써 지식의 근원으로 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의 구호는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말로 대표된다. 이는 우리가 객관적인 판단을 도출하기 이전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대로를 탐구함으로써 “객관이 되기 이전의 세계는 우리가 이미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경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의 목표는 주관-객관의 분리 이전에 근원적 관계를 정초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객관적 세계의 근본적 의미와 인간의식은 본래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이 연결 이후에야 반성적인 논리를 통해 분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현대 과학의 실증주의적 입장은 세계를 고립된 객체로, 의식을 육체를 벗어난 주관으로 환원시킨다. 고로 세계와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와 실체 사이의 관계로 여겨진다. 그래서 인간 주체성은 생활세계에서 행하는 창조적 활동성과 작용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의미 창출 작용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대신에 사물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후설은 이러한 학문적 경향이 현대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고(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현상학을 통해 우리의 원래 체험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고자 한다. 세계는 항상 의식에 대한 세계로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마찬가지로 의식은 그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 현상학은 의미가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대상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둘 사이의 지향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근본적인 전제로 한다. 우리는, 분리된 세계 또는 세계와 분리된 우리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 내에(in-der-Welt) 있다. 이는 흄을 필두로 하는 경험론자들의 주장처럼, 대상이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표상이나 관념(쇠퇴한 인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의 지향성은 의식이 객관에 대한 지각이나 모사를 갖고 있는 상자인 것이 아니라, 이미 대상 자체를 향해 나아가 있음을 뜻한다.

6절 프란츠 브렌타노와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

현상학의 핵심 개념인 지향성Intentionalität은 후설의 스승이었던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로부터 유래한다. 브렌타노는 철학자이자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교회와의 갈등 이후 교회를 떠나 결혼하게 되며, 빈 대학Universität Wien의 교수직도 내놓게 된다.[각주:26] 브렌타노의 대표적인 관심사는 신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물음이었다.[각주:27] “신이 있다.”라는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일종의 표상에 불과한 것인가?, 세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세계 바깥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브렌타노는 ‘있다es gibt’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지향적 대상intentionale Objekte을 제시한다.[각주:28] 브렌타노는 이 개념을 중세 스콜라 철학자로부터 가져온다.

모든 심적 현상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어떤 대상의 지향적 (혹은 심적) 내존(die intentionale (auch wohl mentale) Inexistenz)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전적으로 애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내용에로의 지칭(die Beziehung auf einen Inhalt), (어떤 외부 사물(eine Realität)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선 안 되는) 어떤 대상을 향한 정향(die Richtung auf ein Objekt), 혹은 내재적 객체성(die immanente Gegenständlichkeit)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모든 정신적 현상은, 비록 그들이 동일한 방식 속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 안에 어떤 것을 대상(Objekt)으로 포함한다. 현시(Vorstellung)에서는 그 무엇이 현시되고[표상되고], 판단(Urteile)에서는 어떤 것이 긍정되거나 부정된다. 또한 사랑(Liebe)에서는 그 무엇이 사랑되고, 증오(Hasse)에서는 그 어떤 것이 증오되며, 욕구에서는 그 무엇이 욕구된다.

이러한 지향적 내존은 오로지 심적 현상(psychischen Phänomenen)에만 특징적이다. 어떠한 물리적 현상(physiches Phänomen)도 그와 같은 것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적 현상은 그 자체 안에 어떤 대상을 지향적으로 포함하는 그런 현상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심적 현상을 정의한다.[각주:29]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로데릭 치좀(Roderick Chisholm 1916-1999)의 분석적 해석을 통해 분석 철학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각주:30] 먼저 브렌타노는 심적 현상이 물리적 현상과 다르며, 그 기준은 지향적 (혹은 심적) 내존(die intentionale (auch wohl mentale) Inexistenz)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심적 현상은 표상, 판단, 감정으로 나누어지며, 그러한 현상이 존재할 때, 언제나 지향적 내존을 갖는다. 주관인 의식은 지향적 내존을 내적 지각을 통해 파악한다.

치좀은 이 지향성 개념을 분석 철학의 주요 문제에 적용한다. 오늘날 분석철학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심신 문제에 대해 지향성 개념은 하나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에 있어 이 문제를 잠시 치우고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치좀의 분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정적 대상들을 생각하고 표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해 "그러한 유형의 지칭과 표상은 우리 정신이 그 안의 지향적 내존에 정향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답할 수"[각주:31]있다.

후설 역시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수용한다. 특히 후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브렌타노의 “경험적 심리학” 개념이다.[각주:32] 브렌타노는 데카르트가 실체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정신이 ‘실제로 행하고 기능하는 여러 방식과 양태’를 기술하고 분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렌타노의 경험이란, 자연과학에서의 실험과 관찰이라는 의미보다는 직접적인 삶의 세계에서 심리주체가 갖는 체험(lived experience)을 의미한다.[각주:33] 이러한 경험적 심리학은 “기술적 심리학”과 “설명적 심리학”으로 나누어지는데, 기술적 심리학은 이러한 체험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분류하며, 설명적 심리학은 그것의 인과적 기제를 탐구한다. 중요한 점은 기술적 심리학은 설명적 심리학의 토대가 되지만, 설명적 심리학은 기술적 심리학의 토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각주:34] 오히려 설명적 심리학, 즉 생리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요소들은 기술적 심리학에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기술적 심리학은 이러한 요소에 물들기 전에 순수한 현상을 포착하는데 그 중점을 둔다.

후설이 주목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기술적 심리학이 인식론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론과 설명을 도외시하고 지향 작용, 그 작용에 결부된 지향적 내존, 그리고 그러한 작용과 대상에 대한 내적 의식을 순수하게 포착하고 기술함으로써 새로운,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탐구방법-현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후설은 깨달았다. 마주-세워진 것(Gegen-stand)으로서의 대상의 현존Existenz, 눈앞에 있음Anwesenheit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서만 그 본질Wesenheit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대상과 의식이 지향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내-존(In-existenz)을 직관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을 포착할 수도 있다. 브렌타노는 이렇게 표상이란 순수하게 내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것’의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표상이란 내게 주어지고 내게 나타나는 어떤 존재자의 의식이며 이러한 의미에서만 신 역시 주어져 있다es gibt.[각주:35]

7절 후설의 의미론과 지향성의 3가지 구조

후설은 지향성이야말로 생활세계Lebenswelt의 복원에 있어 필수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명제는 우연적인 종합명제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우리가 이에 대한 과학적 탐구 방식을 신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수식과 도구를 통해 관찰한 태양이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태양이 아니다.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명증성에 대한 이러한 강박이 ‘가상과 현실의 도식’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말하게 된다.[각주:36]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은 풍자적인 어조로 ‘화창한 8월의 하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대서양 상공 위로 저기압이 걸쳐 있었다. 저기압은 러시아 상공의 고기압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아직 이 고기압을 북쪽으로 밀어낼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등서선과 등온선이 서로를 지탱했다.” 무질의 조롱처럼 ‘화창한 8월의 하루’를 등온선과 저기압으로 우리가 체험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생활세계의 한 현상Phänomen이다.[각주:37]

후설은 “엄밀한 자기 분석을 통해 그러한 의식 현상의 내적 질서를 관찰한다.”[각주:38] 그 과정은 의식의 무엇임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존재하고 현출하는지를 서술하는 것이다.[각주:39] 이로써 현상Anwesenheit과 그 배후에 있는 본질Wesenheit 사이의 이원론은 사라진다. 본질은 현상을 파헤침으로써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 현상으로써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 역시 의식의 조작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의식은 지각에 있어 의식이 놓치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상은 의식에 들어서는 모든 것이기에 보이지 않음Nichtsehen 역시 의식의 한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40]

본질은 현상 ‘배후’에 숨겨진 무엇이 아니다. 내가 본질을 사유하는 한, 혹은 본질이 나를 따돌린다고 내가 사유하는 한, 본질 자체도 현상이다. 칸트의 ‘물 자체’, 즉 단적으로 현출하지 않는 무엇을 가리키는 이 비개념Unbegriff 또한 결국은 하나의 현상인 바, 그것은 사유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각주:41]

후설의 의도는 결국 의식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그릇 같은 것이어서 세계가 그 속에 담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의식은 비어있는 그릇처럼 세계가 담기기 이전에 비어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은 우리의 내부에 있지 않고 언제나 어떤 무엇의 의식으로 의식대상이 되는 외부의 무엇 곁에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이미 세계-내In-der-Welt에 있음을 말한다.

후설은 이제 의식의 지향성을 전제해야 가능한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의미의 구조를 밝혀낸다.[각주:42] 모든 기호는 언제나 ‘무엇에 대한’ 기호Zeichen이지만, 모든 기호가 그 기호를 통해 표현Ausdruck된 뜻Sinn인 의미Bedeutung를 갖지는 않는다.[각주:43] 다시 말해 기호는 그것이 표시하는 기능(협약이나 연상 등)을 넘어서 의미하는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의미를 결여한다.)[각주:44]

많은 경우 기호Zeichen가 그것에 대해 기호라 부르는 것을 ‘표시한다(bezeichnen)'고 말할 수조차 없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표시하는 작용이 그 표현을 특징짓는, 그 ’의미하는 작용‘으로서 항상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즉 기호는 표시(Anzeichen)-표지, 부호 등- 의 의미에서, 그것이 지시하는(Anzeigen) 기능 이외에 어떠한 의미의 기능도 충족시키지 않는 한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각주:45][각주:46]

후설은 이렇게 유의미한 기호인 표현을 단지 지시하는 기호와 구분한다. “의미하는 작용은 지시하는 의미에서 일종의 기호로 있는 것Zeichensein이 아니다."[각주:47] 표현Ausdruck은 다시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감각적 기호, 종이의 문자와 같은 물리적 측면의 표현이요, 다른 하나는 표현에 연상적으로 연결되는, 그를 통해 표현을 무엇에 관한 표현으로 만드는 심리적 체험이 그것이다. 이 심리적 체험이 바로 뜻Sinn, 또는 의미Bedeutung이다.

표현Ausdruck의 1차적인 기능은 말하는 사람이 통지하고, 듣는 사람이 통지받는 통지 기능이다. 그런데 통지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미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의미가 없는 표현은 불가능할뿐더러 그 대상이 비록 가상일지라도(이를테면 둥근 사각형)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로 통지기능은 보다 본질적인 표현의 기능의 보조수단일 뿐인데, 이렇게 통지하고 통지 받는 것의 일치를 통해 표현에 의미를 부여하고 대상성을 직관Anschauung하는 것을 의미 기능이라 한다.[각주:48]

의미 기능은 “의미를 부여해 표현된 대상성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의미 지향’과 이 의미 지향을 확인, 보증, 예증해 대상성과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충족시키는 '의미 충족'의 두 계기가 있다.”[각주:49] 이 때 표현이 실제 대상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작용으로 표현되고, 논리적 대상들과 우선 관계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 동반된 직관을 통해 현재화되어 나타날 때 이를 대상성을 지시하는 명명 기능이라 일컫는다.[각주:50]

이제 위의 의미론을 통해 후설이 제시한 언어철학의 대강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와 같은 명제는 의미지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반면, “둥근 사각형”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의미 충족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불가능하지만 의미 지향이 표현을 이해시키기 때문에 무의미하지는 않다. “황금산”은 의미충족이 이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오직 상상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대상성이 결여되어 있고, “내 앞에 있는 흰 벽”은 상응하는 직관에 따라 유의미하게 의미 충족 가능한 표현이다.[각주:51] 이렇게 후설의 의미론은 직접 지시론이 지닌 난점을 피해가면서 가상적 존재자를 불필요하게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전된 언어 철학의 하나이다.

후설은 이제 지향성의 양식을 3가지로 제시한다. 먼저 지각이 있다. 지각은 그 대상을 하나의 직접적인 실재로서 지향한다. 대상을 지향하고 목표하는 의식의 활동은 그 대상을 현존(presence)으로서 자신에게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내가 지각에 있어 어떤 나무를 지향한다면 이 개별적인 나무는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의식에 주어진다. 반면 지향성에는 상상 작용도 있는데, 이는 나의 의식에 유사한 현존(quasi-presence)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현존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 그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지향한다. 무엇인가가 의식에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은 자체로 참되지만, 경험적 의미에서 실재하는 나무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나무의 그림 내지 표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실재하지 않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은 과거와 미래의 경험이라는 시간적 지평을 늘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실제로 있는 나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나무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며, 현재 있지 않은 미래의 나무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향성의 양식에는 의미화가 있다. 이것은 지각 또는 상상 이전의 공허한 직관으로서의 의식을 가리킨다. 이것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의식이 추상적인 방식에서 의미를 개념화하기 위하여 언어라는 기호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한 예로 나는 개별적인 인간을 실제로 지각하거나 상상하지 않아도 인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미화라는 것은 순전히 결여되어 있는 사물을 지향하는 비상상적, 비지각적 사유에 해당한다. 수학과 논리학은 그런 개념적 언어의 가장 확실한 예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1+1=2이다. P, Q와 같은 명제 기호 역시 개념적 사고 또는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화이자 의식의 능력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지각적이고 상상적인 의식이 새로운 의미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향성의 3가지 양식은 상호보완적이다. 즉 우리에게 상상과 의미화가 없다면 지각은 경험적 사실에 한정되는 유물론이 되어버리고, 지각과 상상이 없다면, 살아있는 현존의 생생한 경험의 세계에 뿌리박지 못하고 공허한 추상에 매몰되는 개념주의에 빠져버리며, 지각과 의미화가 없다면 현재의 실재와 미래에 발견될 새로운 것에서 차단되어 자신이 낳는 환영을 모든 것이라고 하는 유아론에 빠지게 된다.

  1. 르네 데카르트, 『성찰』, 제 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번역 이현복, 문예출판사, 1997, p.57 [본문으로]
  2. Ibid. p.46 [본문으로]
  3. Ibid. p.35 [본문으로]
  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54 [본문으로]
  5. Ibid.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신승환. 이성 개념의 현대적 이해. 철학논집, [s. l.], n. 37, p. 31, 2014. [본문으로]
  8. op. cit. [본문으로]
  9. 물론 데카르트가 주체와 대상 사이의 분리를 이루어낸 이후,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라는 이성 개념은 점차 희미해진다. 인식론이 지배적이었던 근대 철학의 담론 아래에서 이성은 인간의 이성ratio humana으로, 인식하고 계산하는 이성으로 변모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신승환. 이성 개념의 현대적 이해. 철학논집, [s. l.], n. 37, p. 31, 2014. 참조 [본문으로]
  10. 스테판 쾨르너, 『수학 철학』, 번역 최원배, 나남, 2008, p.32 재인용 [본문으로]
  11.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0 [본문으로]
  12.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 오성에 관하여』, 번역 이준호, 서광사, 1977, p.92 [본문으로]
  13. 임마누엘 칸트,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 번역 김재호, 한길사, 2018, p.27 [본문으로]
  14.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 오성에 관하여』, 번역 이준호, 서광사, 1977, p.25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p.26 [본문으로]
  17. 임마누엘 칸트, Ibid. p.24 [본문으로]
  18. 임마누엘 칸트, Ibid. [본문으로]
  19.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1 [본문으로]
  20. Ibid.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Ibid. [본문으로]
  23. Ibid. p.35 [본문으로]
  24. Ibid. p.35 [본문으로]
  25. Ibid. p.37 [본문으로]
  26.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7 [본문으로]
  27. Ibid. [본문으로]
  28. Ibid. p.58 [본문으로]
  29. 김영진. 브렌타노 지향성 이념의 해석 문제 : 바톡의 입장에 대한 비판 / The Problem of Interpreting Brentano’s Idea of Intentionality : A Critique of Bartok’s View. 철학과 현상학 연구 / Research in Philosophy and Phenomenology, [s. l.], p. 1, [s.d.]. 재인용 [본문으로]
  30. op. cit. [본문으로]
  31. op. cit. [본문으로]
  32. op. cit. [본문으로]
  33. op. cit. [본문으로]
  34. op. cit. [본문으로]
  35.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번역 박민수, 북캠퍼스, 2016, p.58 [본문으로]
  36. Ibid. p.138 [본문으로]
  37. Ibid. [본문으로]
  38. Ibid. p.139 [본문으로]
  39. Ibid, [본문으로]
  40. Ibid. [본문으로]
  41. Ibid. [본문으로]
  42.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8 [본문으로]
  43. 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2-1』, 번역 이종훈, 믿음사, 2018, p.43 [본문으로]
  44.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194 [본문으로]
  45. 에드문트 후설, 『논리 연구2-1』, 번역 이종훈, 믿음사, 2018, p.43 [본문으로]
  46. Zichen : etwas Sichtbares, Hörbares/ bezeichnen: durch ein Zeichen kenntlich machen/ Anzeichen: Vorzeichen/ Anzeige: 1. Meldung einer strafbaren Handlung an, 2. gedruckte Bekanntgabe eines privaten Ereignisses [본문으로]
  47. Ibid. p.44 [본문으로]
  48. 이종훈, 『후설 현상학으로 돌아가기- 어둠을 밝힌 여명의 철학』, 한길사, 2017, p.39 [본문으로]
  49. Ibid. [본문으로]
  50. Ibid. [본문으로]
  51. Ibid. p.40 [본문으로]
           



             

<사회철학 발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론

 

1장 후설 이전의 근대 철학의 문제의식에 대하여 대강 서술함

 

1절 근대 철학 이전 존재론Ontology의 주요 개념들- 아리스토텔레스의 ‘ousia’ 개념에 대한 중세 철학의 수용

 

지성사에 있어 사유가 인식과 맺는 독특한 관계는 언제나, 하나의 단일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철학사는 마치 자연수로부터 정수, 유리수, 실수로 나아가는 교과서와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었을 텐데, 이는 철학사 곳곳에서 나타나는 돌발적인 사건들- 즉, 차이를 지닌 사상들 사이의 전투와 대립, 예기치 못한 공명과 결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철학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고대 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우리가 제시하는 상(像)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우리를 게으르게 사유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할 때만, 앞으로 제시될 근대 철학의 전형적인 특징은 정당화될 수 있다.

흔히 근대 철학의 시작으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철학은 그 존재론의 측면에 있어서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존재론이라는 이름, 즉 ontology는 onta(존재하는 것)과 logyia(학)의 합성어로 17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ontoligia’로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그의 저작《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면서 ‘있는 것’들의 으뜸가는 원인aitia (또는 원리arche)들을 찾아 나선다.[각주:1] 이는 그가 1권 3장(원리 및 원인에 관한 옛 철학자들의 이론)에서 다루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탈레스에서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고대 철학자들의 중심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탐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얻은 다음에야, 즉 자연학Physica적인 탐구를 한 다음Meta에야”[각주:2]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자연학』190a 34-192b 1 참고)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으뜸철학prote philosophia, 혹은 신학theologike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의 존재 이유나, 그 원리를 찾는 탐구는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맥락에서) 신에 대한 탐구요,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물음으로 이끌었던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각주:3]은 중세 철학에 이르러서도 신학적 세계관의 구축과 더불어 기묘한 형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누스(Plotinus)와 그의 후계자들의 철학이 어떻게 교부들을 거쳐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각주:4]로 이어졌는지를 언급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aphysica》 제 1권에서 말하길,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각주:5]하며 이러한 앎, 즉 지혜는 단순히 경험 있는 사람들보다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각주:6] 왜냐하면 경험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어떻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 때문에 그것이 그러는지는 알지 못하는 반면에, 기술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것이 그러는지와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각주:7] 또한 감각이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사실은 알려주지만, 그 원인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지혜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각주:8] 고로 “지혜란 사물들의 으뜸 원인과 원리arche들을 다루는 것이다.”[각주:9] 원리라고 불리는 arche는 그리스어로 법칙이나 원칙, 시작, 요소, 근원, 출처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까닭에 이것이 실제로 있는 것에 적용될 때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reale, 형이상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며, 인식에 적용될 때는 인식의 원리 principium cognoscene, 즉 논리학의 주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것을 포함한 지혜, 즉 으뜸 원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을 해왔다. 이를테면 탈레스(Thales)에게 있어서 그것은 물이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에게 있어 그것은 공기이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에게는 4가지 원소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원인이 네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원인은 각각 형상인eidos, 질료인hyle, 목적인telos, 작용인이다. 우리는 대개 그들 가운데 하나를 우시아ousia라고 부른다.[각주:10] ousia는 einai의 현재분사 여성형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말 그대로는 "정말 있는 것"을 뜻한다.[각주:11]

형이상학 7권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ousia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말해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한다. 그 후보가 되는 것은 4가지로, 각각 “보편적인 것(to katholou)”, “무리 혹은 유(genos)”, “바탕이 되는 것hypokeimeinon”,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to ti en einai)”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이 네 번째 개념에서 ousia를 찾는데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ousia를 보통 “실체”로 번역하며,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to ti en einai)’를 “본질”로 번역한다.

각 사물의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본질)는 ‘(그 사물이) 자신(의 본성)에 의해 ...이다라고 말해지는 바’이다. 예를 들어 ‘너-임’(너의 본질)은 ‘교양 있는 것-임’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네가 너 자신인 조건에서 교양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 자신(의 본성)에 의해 ...인 바’가 너-임(너의 본질)이다.[각주:12]

그런데 “~임”이라는 정의Definition는 이미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 제시된 바 있으니,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미 여러 차례 “~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의 질문은 이 질문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제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자들을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로 제시되어야한다고 논박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 우리가 던진 물음은 ‘어떤 것들에 대한 앎인가’나 ‘얼마만큼의 어떤 앎들이 있는가’하는 그런 게 아니었네. 우리는 그것들의 수효를 헤아리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앎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거든. (...) 그러므로 ‘앎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런저런 어떤 기술에 대한 이름으로 대답할 경우, 그런 대답은 우스꽝스런 것이네.[각주:13]

이러한 이유에서 플라톤은 “~임”을 그것의 이데아Idea로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어 eidos는 원래 단순히 보임새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플라톤에 이르러 현상과 감각 세계의 궁극적 원인이자 참된 세계로 제시된다. 현상Phänomen은 이데아의 모방이자 이데아를 나누어가진 것(분유된 것이다.)

우리 후대 사람들은 플라톤이 모든 존재자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칭하기 위해 에이도스라는 낱말을 감히 사용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림잡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에이도스란 일상 언어에서는 가시적인 사물이 우리의 감각적 눈에 제공하는 모양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감각적 눈으로는 절대로 감지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명명하기 위해 이 낱말에 아주 생소한 의미를 요구했다. (...) 보임새, 즉 이데아는 듣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있는 것, 어떤 식으로건 접근 가능한 모든 것의 본질을 형성하는 바로 그것을 말하며 또한 그것이기도 하다.[각주:14]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에 관한 탐구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eidos이 정의의 측면에서만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choriston)’으로 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8권 1장 11043a 29)[각주:15] 이러한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시아”(실체)는 두 가지 (주된) 방식(뜻)으로 말해진다. 먼저, 더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말해지지 않는 ‘맨 마지막에 있는’ 바탕(to hypokeimenon eschaton)이 실체이다. 그리고 이것이자 (정의의 측면에서) ‘(사물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실체인데, 각 사물의 형태나 꼴이 그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실체(ousia)는 우선 재료hyle와 형상eidos으로 결합된 개체 또는 개인을 말하며 이를 제 1실체라 일컫는다.(이들은 논리학에서 주어가 된다.) 반면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실체(어떤 것의 본질)는 정의(horismos), 사물의 본질(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규정(logos)으로만 말해질 수 있는 제 2의 실체이다.[각주:16]

어떤 으뜸가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 정의가 성립한다. 으뜸가는 것들은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해 (무관하게) 서술되지(술어가 되지) 않는다. (...) 분명한 점은, 으뜸으로 그리고 단적으로, 정의와 ‘(어떤 것이)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어떤 것의 본질)가 실체에 ‘들어 있다’(적용된다)는 점이다.

[각주:17]

그런데 이러한 ousia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의 이중성(한편으로는 그것이 실체(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임이라고 말해지는 바)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단어는 중세로 넘어오면서 다소 혼란스러운 번역을 거치게 되었다. 먼저 ousia의 원뜻, “있는 것”의 라틴어 대응어는 esse(있음)인데, 일반적으로 역동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버클리(George Berkeley)의 유명한 명제인 ‘Esse est percipi’는 ‘있음은 지각되는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esse는 그것의 현재 분사형인 ens(있는 것)와는 또 다른 것이다. 중세의 철학자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는 그의 저서 《명제집Opus Tripartitum》에서 esse와 ens에 대한 구분을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esse는 '있음 자체'이며, ens는 ‘있는 것’, ‘이것저것으로 있음’이다. 고로 에크하르트는 ‘Esse est Deus’, ‘있음은 신이다.’라는 명제를 언급함으로서 ‘있음 그 자체’는 오로지 신에게만 귀속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substantia란 고대 그리스어 hypokeimenon의 번역어로 본디 ‘밑에’ 라는 뜻의 hypo와 ‘놓여 있다’라는 뜻의 keisthai의 합성어이다.[각주:18] 이것은 ‘어떤 것의 밑에 놓여 있는 것’, 즉 ‘바탕이 되는 것’을 뜻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맥락에서는 형상edios과 재료hyle, 그리고 이 둘로 된 전체를 모두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각주:19] 이를테면 청동이라는 재료와 청동이 드러난 모양, 그리고 이 둘로 이루어진 조각상과 같은 것은 모두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각주:20]

위에서 말한 것처럼 hypokeimenon은 《형이상학Metaphysica》 7권 3장에서 실체ousia의 후보로 탐구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실체ousia는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즉 술어가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서 나머지 것들이 말해져야 하는(주어가 되어야하는) 것이다.[각주:21] 고로 실체는 길이, 넓이, 깊이와 같은 모든 속성들을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문제가 하나 있다. 왜냐하면 실체ousia를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한다면 질료/재료(hyle)가 바로 실체가 되어야할 것인데, 이 질료는 규정되어있지 않은(unbestimmt) 것이기 때문이다.[각주:22] 즉 실체의 특성인 따로 떨어져 있음(독립성)과 이것임(구체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가 실체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각주: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잠재 상태(혹은 가능상태, dynamis)와 완성 상태(entelecheia)의 구분을 제시한다. dynami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맥락에서 능력이라는 의미와 잠재태라는 의미의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며, energeia는 현실태 혹은 활동을 의미한다. 규정되지 않은 것(ahoriston)인 질료hyle는 동시에 A일수도 ~A일 수도 있는 잠재 상태에 있다. 이러한 질료에 형상eidos의 구체성이 부여됨으로써 완성상태인 A V ~A로 규정된다.[각주:24]

고로 중세에 이르러 esse와 substantia는 종종 교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쉐드(Shedd)에 따르면, esse는 역동적인 존재를 나타내며, substantia는 존재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의미한다. esse는 하나님을 (능동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속성들의 총화로 묘사하며, substantia는 하나님을 (수동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활동들의 기초적인 근거로 묘사한다.

2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essentia/existentia 개념

고대 철학의 두 거목이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에 이르러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에게 계승되어 그 명맥을 잇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이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접목이었다면, 아퀴나스의 신학 개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개혁이라 부를 수 있다.[각주:25]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함으로써, 실존(즉, 존재의 능동성)과 본질의 구분을 단행하였다.[각주:26] 적어도 “‘플라톤주의자들의 교리에 젖어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존재는 영원한 불변성”[각주:27]이었으며,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그 후계자들에게 있어 존재의 핵심은 본질essentia이라는 개념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아퀴나스는 존재라는 낱말의 핵심으로 “있다”라는 동사가 지시하고 있는 능동성, 즉 그것의 실존적 의미에 주목했던 것이다.[각주:28]

너무 앞서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실존주의를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모든 것, 즉 “기획투사Entwurf”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식의 생각을 모두 지워버리도록 하자. 아퀴나스의 맥락에서 실존이란 단어는 ‘던져져 있음’ 혹은 ‘결단’과는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esse, 즉 ‘있음’은 능동성이므로 존재에서 고정되어 쉬고 있는 것이다. (esse est aliquid fixum et quietum in ente.)[각주:29]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dynamis와 현실태energeia의 구분을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에 적용한다.[각주:30] 하나님은 전체 본성이 능동성인 존재esse이다. 하나님은 ‘오직 존재esse tantum’[각주:31], 달리 부가되는 것이 없이 실존함(ipsum esse) 그 자체[각주:32]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ens은 순수 현실태이거나 혹은 그 본질의 구성 요소인 가능태와 현실태로 합성된 것이다.[각주:33] 앞서 우리가 살펴본 본질essentia, 즉 ‘무엇임quidditas’[각주:34]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리 사물 안에 존재했던 무엇’[각주:35]으로, 풀어쓰면 “자체 안의 존재로서 그 사물을 바로 그런 유의 사물로 만드는 무엇”[각주:36]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에 각각 가능태와 현실태를 부여한 것처럼, 아퀴나스는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에 가능태와 현실태를 부여한다. 이에 따르면 본질은 실재적 존재의 내적 구성 원리이자, 현실화와 실재성이 요청되는 의미에서 가능태이고, 현실성actualitas인 존재는 현실태이자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제 실존existentia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다. 실존이란 단어, existentia는 ‘(로부터) 나가다’, ‘나와서 현재 있다’를 의미한다. 실존existentia은 나타나게 되는 것(현실태)의 서 있음으로, 대상에 속하는 두 가지 측면 중 하나이다. 즉, 현실태인 실존과 가능태인 마주 서 있는 것의 무엇임(본질-가능성(essentia-possibilitas))은 대상의 두 측면이다.[각주:37] 따라서 실존은 무엇das Was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실 존재daß-sein와 어떻게 존재wie-sein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실존은 현존(Anwesenheit), ‘눈 앞에 있음’이다.[각주:38]

토마스는 유한한 유들 안에서 본질과 존재는 실재적 구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유ens는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의 합성이다. 존재는 본질이 아니고 본질은 존재가 아니다. 본질은 존재 현실태의 주체이고, 존재는 그의 주체에 본질과 실존과 실재를 부여하는 완전함이다. (...) 그래서 본질은 존재를 수용하는 가능성potentia이고, 존재는 본질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성actus이다.[각주:39]

이로써 실존주의의 실존Existenz 개념을 다루기 위한 예비적 작업을 일차적으로 마친 셈이다. 이로부터 하이데거Heidegger가 어떠한 이유에서 이 개념을 《존재와 시간Sein und Seit》에서 되살리는지, 또 사르트르가 어떻게 실존 개념을 그의 철학으로 수용했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로 불리기 거부하며, 사르트르가 자신의 철학을 왜곡했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분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

 

3절 존재론Ontology으로부터 인식론Epstemology으로의 전환 - subjectum/objectum의 구분지음

 

데카르트가 실체substantia로 제시한 res extensa(연장하는 사물)과 res cogitans(생각하는 사물)는 중세 존재론에 온전히 뿌리를 박고 있다. res, 즉 사물인 res cogitans는 ens(존재자)로, 창조된 존재자라는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무한한 존재자인 신은 창조되지 않은 존재자이다.(Gott als ens infinitum ist das ens increatum[각주:40])[각주:41] 로마인들에게 있어 res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2] 이를테면, res publica(공화국)은 “국민 모두의 관심을 붙잡고 있는 것, 그래서 공적으로 협의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3]

로마어 res는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와 닿는 것을 이름 한다. 와 닿는 것은 res의 실제적인 것(das Reale)이다. res의 실제성realitas을 로마인들은 와 닿음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 로마적인 res의 realitas는 후기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여 그러스적인 온ὄν으로서 표상된다. 온은 라틴어로는 ens로 이쪽에 섬(Herstand)이라는 의미의 현전(Anwesenheit)하는 것을 의미한다.[각주:44]

이로써 res는 (비록 그것이 중세에 이르러 모든 존재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나), 앞에 세워진 것(Vorgestellltes)이라는 의미의 현전(Anwesenheit)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각주:45] 이러한 앞에 놓여 있는 것(Ob-jekt)라는 의미의 대상Object이 주어지는 곳은 인간이 주체Subject가 되는 곳이다.[각주:46] 데카르트에 이르러 주체는 ego cogito, ‘생각하는 나’로 확립된다.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논리적으로 확실한 지식이라도 그것이 방법적 회의의 사고 실험 거친 후에야 비로소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여긴다. 이러한 까닭에 cogito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것, “이미 자신 앞에-그리고 자신 쪽으로-세워진 것(das schon Vor-und Her-gestellte)”[각주:47]이다. cogito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자신sich에게로,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맞은 편gegen에로 세운다.

이렇게 마주-서있는 것(Gegen-stand) 즉 대상/사물을 앞에-세움(Vor-stellen)으로써 “대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로 철학의 물음은 전환된다. 다시 말해, 철학은 이제 존재론Ontology으로부터 인식론Epstemology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곧 존재론이 더 이상 철학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점의 변화로, 앞에-서있음Vor-stellung으로서의 존재자가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데카르트가 결행한 자아cogito의 확립으로 인해, 근대의 존재론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관계 위에서 성립하게 된다. 현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그러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감각을 넘어선 비-물질적인 구조에 대한 탐구가 존재론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18세기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철학을 계승한 볼프(Christian Wolff)의 본체론(ousiology)으로 정립된다.

이러한 눈앞에 있음Anwesenheit의 근거인 감각과 존재론적 구조의 근거인 이성은 곧 칸트가 구분지은 합리론과 경험론의 구분 근거가 된다. 흔히 합리론자로 분류되는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가 이성을 통해 인식론을 전개하는 반면, 경험론자로 분류되는 로크, 버클리, 흄 등은 경험을 통한 인식론을 추구한다.

칸트(Kant)는 위의 철학자들을 분류하고 계승함으로써 이후 철학사의 전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버렸다. 동시에 그것은 표상Vorstellung으로 세워진 존재자가 오로지 현상Erscheinung일 뿐이며, 또한 인식Erkenntnis의 유일하게 가능한 대상임을 밝힘으로써 주체가 결코 알 수 없는,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 사이의 거대한 심연을 만들어냈다.[각주:48] 우리는 그것을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라 이름 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16 [본문으로]
  2. Ibid. p. 14 [본문으로]
  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15 [본문으로]
  4.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117 [본문으로]
  5.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29 [본문으로]
  6. Ibid. p.3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p.34 [본문으로]
  9. Ibid. p.35 [본문으로]
  10. Ibid. p.42 [본문으로]
  11. Ibid. [본문으로]
  12. Ibid. p.291 [본문으로]
  13.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번역 정준영, 이제이북스, 2013, 146e-147c, p.81-82 [본문으로]
  14.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27-28 [본문으로]
  15.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223 [본문으로]
  16. Ibid. [본문으로]
  17. Ibid. p.294-296 [본문으로]
  18.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번역 김진성, 이제이북스, 2007, p.43 [본문으로]
  19. Ibid. [본문으로]
  20. Ibid. p.288 [본문으로]
  21. Ibid. [본문으로]
  22. Ibid. p.290 [본문으로]
  23. Ibid. [본문으로]
  24. Ibid. p.171 [본문으로]
  25.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505 [본문으로]
  26. Ibid. p.578 [본문으로]
  27. Ibid. p.510 [본문으로]
  28. Ibid. [본문으로]
  29. Ibid. p.511 [본문으로]
  30.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72 [본문으로]
  31. 에티엔느 질송, 『중세 철학사』, 번역 김기찬, 현대지성사, 1997, p.511 [본문으로]
  32. Ibid. p.515 [본문으로]
  33.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04 [본문으로]
  34. Ibid. p.112 [본문으로]
  35. Ibid. [본문으로]
  36. Ibid. [본문으로]
  37.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94 [본문으로]
  38. Ibid. [본문으로]
  39.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 p.138 [본문으로]
  40. Martin Heidegger, 『Sein und Seit』, Mas Niemeyer Verlag Tübingen, 2006 p.24 [본문으로]
  4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역 이기상, 까치글방, 1997, p.44 [본문으로]
  42.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사물,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225 [본문으로]
  43. Ibid. [본문으로]
  44. Ibid. p.226-227 [본문으로]
  45. Ibid. p.227 [본문으로]
  46. 마르틴 하이데거,『강연과 논문』, 형이상학의 극복, 번역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이학사, 2008, p.107 [본문으로]
  47. Ibid. p.93 [본문으로]
  48. 중요한 점은, 이것이 칸트의 독단적 사유로 인해 발생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칸트는 그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학문적 정확성이라는 가장 엄격한 규칙”을 신봉하여 그 엄격함을 넘어서는 모든 사태에 대해 주저했던 엄격한 주저함을 추구했다. [본문으로]
           



             

2018년 1학기 "종교 철학"수업 팀플 과제로 제출했던 글.

 

하이데거의 반시대적 고찰 : 니힐리즘과 존재의 빛남

 

위험이 있는 곳에는 그러나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네.[각주:1]

- 프리디리히 횔덜린

 이 글은 하이데거라는 사상가의 종말론적(그리고 구원론적) 사유를 재조명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상가의 특정한 면모를 드러내고자 할 때에는, 그 면모가 사상가의 사상(Gedanken)에 있어 어떠한 방식으로 그 핵심을 담지하고 있는가를 먼저 고려해보는 것이 옳다.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가 단순한 흥미에서 비롯된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선 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표는 종말과 구원의 사유가 하이데거 사상 전체의 핵심이자 그가 평생 동안 대결하고자 했던 사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 모든 철학의 근본물음은 반시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규정, 철학은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규정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이데거가 그 스스로의 사유를 반시대적이라고 여겼음은 확인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유는 반시대적이라는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하이데거가 파악한 시대적인 것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 물음의 실마리를 하이데거가 1953년 발표한 『기술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하이데거는 일차적으로 현대를 기술 시대로 규정한다.[각주:2] 그런데 우리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기술의 본질에 대해 충분히 숙고해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술을 이용하는 데에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어 있으며, 기술을 가치중립적으로만 생각함으로써 기술의 본질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각주:3]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기술을 가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가? 그 까닭은 기술을 하나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망치를 사용하면서 망치가 일으키는 사건은 망치를 사용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망치 그 자체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기술을 도구로 보는 규정은 올바르기는 하나 참된 규정은 아니다. 어떠한 대상에 관한 올바른 규정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이는 시를 단어들의 집합으로 정의내리는 규정이 그 자체로 올바르지만 시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인과성으로부터 기술의 본질에 접근한다. 원인에 관한 철학적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이러한 원인(causa)을 작용을 미치는 것으로, 어떤 결과로 떨어지다(cadere)로 이해하는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아이티온(ai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원인이란 “무엇에 작용을 미치는 그것”이 아니라 “책임짐의 공속적 방식들”이다. 형상인(eidos)과 질료인(hyle), 목적인(telos)은 모두 사물을 완결시킴과 동시에 존재할 바의 그것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도록 책임진다.[각주:4] 이를테면, 은잔을 만드는 데에 있어, 은잔의 보임새(모양), 질료(재료), 목적(제사) 등은 은잔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은장이는, 숙고를 통해 하나로 모은다. 숙고란 그리스어로 레게인(legein), 로고스(logos)이다.[각주:5] 따라서 이 네 가지 아이티온(aition)을 통해 은폐되어있던 것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이게 되는 것이다.(poiesis)[각주:6] 그리스인들은 은폐되어 있던 존재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 탈은폐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로마인들이 베리타스(veritas)라고, 현대에는 통상 진리(Wahrheit)라 부르는 그것이다.[각주:7]

 따라서 기술은 탈은폐의 한 방식으로, 진리의 영역에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현대의 탈은폐가 더 이상 포이에시스(poiesis)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기술의 본질은 닦달, 몰아세움(Gestell)이며, 이렇기에 현실적인 것은 부품(Bestand)으로 탈은폐되어버리고 만다.[각주:8]

“주문 요청하는 탈은폐로서의 현대의 기술은 단순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적인 것을 부품으로서 주문 요청하도록 인간을 닦아세우는 그 도발적 요청 역시 드러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각주:9]

이렇기에, 인간은 그 시원에서부터 존재와 맺어왔던 탁월한 방식, 포이에시스(poiesis)로서의 진리의 의미를 망각해버렸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즉, Gestell은 예전의 탈은폐의 방식을 숨겨버림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존재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기술과 그것이 품고 있는 무한한 진보라는 이념은, 존재망각의 대가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부품으로 되어가는 최고의 위험일 뿐이다. 이는 근대철학이 충분하 사유 없이 기독교의 종말론을 단순히 세속화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신마저도 그 표상 작용에서는 그 모든 성스러움과 지고함과 그 자신의 간격의 신비스러움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신은 인과율의 빛 안에서는 하나의 원인으로, 능동인으로서 전락해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신은 신학 내에서마저도 철학자의 신이 (......) 인과율의 본질의 출처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유해보지 않은 채- 규정해버리는 그러한 철학자의 신이 되어버린다.”[각주:10]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에 최고의 위험에 다다랐다고, 종말의 징표에 다름 아니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것을 사유했던 철학자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주목한다. 왜냐하면 니체의 니힐리즘과 영원회귀를 하이데거는 현대가 겪고 있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의지하지 않기 보다는 차라리 무(無)를 의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대적 허무를, 무의미의 노리개가 되는 상황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 견뎌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 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 니힐리즘이란 의지할 것이 없는 상황, 절대적 허무의 상황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 있어 이것은 존재 망각의 대가로 치러야할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위험에 대한 해결책을 어떻게 제시하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시원적 신으로, 인간이 시원에서 경험했었던 존재의 빛남을 다시 체험할 수 있었던 그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맨 위에 제시된 횔덜린의 시구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기술(techne)은 그리스에서 오늘날 말하는 것과 같은 제작으로서의 기술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예술의 포이에시스 역시 테크네로서 신들의 현존을 이끌어내고 인관과 신 사이의 상호 대화를 빛나게 해주는 최고의 탈은폐였다.[각주:11] 따라서 하이데거는 기술의 위험 아래에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시적인 것이 참된 것, 가장 순수하게 밖으로 비추어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끌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2]

“과연 예술이 극단의 위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이러한 최고의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 위험이 더욱더 가까워질수록 구원자에로 이르는 길은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욱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각주:13]

 이렇듯 하이데거의 사상에 있어 종말과 구원의 사유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는 종말과 구원의 사상을 세속화한 근대 철학의 사유가 그것을 올바로 사유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망각의 틀 아래에서 사유해왔다고 비판한다. 즉, 근대 철학은 본래적 신을 형이상학적 신으로 대체함으로써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은폐시켰다. 사람들은 구원하다(retten)를 흔히 “몰락의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을 제 순간에 재빨리 붙잡아 계속 보존시키는 것”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있어 구원하다는 존재자의 존재를 밝혀 드러내는 것, 본질을 본래적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서 존재자를 본질에로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각주:14]

 하이데거는 현대의 이러한 흐름을 자신의 힘으로, 혹은 철학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각주:15] 그것은 하나의 역사운명적(Geschick)인 현상, 서양 사유의 시작에서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탈은폐의 사건이 전개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개로부터 인간 본래의 존재를 회복하는 일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 있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각주:16]그렇다면 이 본래적 신이란 무엇일까? 또 그에게 있어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소리 없는 부름(Sage)으로부터 이 부름에 조용히 응답하며, 다가오는(zu kommen) 자들을 위해 사유한다.[각주:17] 이들이 존재의 고향에서 “집짓고 거주하고 사유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파수할 때만, 비로소 본래적 신의 신성이 세계 내에 말없이 드러나는 것이다.[각주:18] 따라서 본래적 신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예감함이 바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철학이다. 그는 의지를 버리고 떠나있음(Abgeschiedenheit)이라는 철학의 새로운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기술에 대한 물음, 번역 이기상, 이학사, 2008, p.38 [본문으로]
  2. Ibid. p.20 [본문으로]
  3. Ibid. p.10 [본문으로]
  4. Ibid. p.14 [본문으로]
  5. Ibid. p.15 [본문으로]
  6. Ibid. p.16 [본문으로]
  7. Ibid. p.18 [본문으로]
  8. Ibid. p.27 [본문으로]
  9. Ibid. p.26 [본문으로]
  10. Ibid. p.36 [본문으로]
  11. Ibid. p.46 [본문으로]
  12. Ibid. p.47 [본문으로]
  13. Ibid. p.48-49 [본문으로]
  14. Ibid. p.38-39 [본문으로]
  15. 이승종 (1999).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철학과 현상학 연구, 12, 395-424., p. 419 [본문으로]
  16. Ibid. p. 420 [본문으로]
  17. 신상희, 하이데거와 신, 제 2장 『철학에의 기여』와 궁극적 신, 철학과 현실사, 2007, p.83 [본문으로]
  18. Ibid. p.84-8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