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와 인간의 인식적 차이 탐구 - 인간 사고의 환원가능성에 관하여
- 2019.10.30 심리철학 정리 (2)
- 2019.10.30 언어 철학 정리
- 2019.10.30 심리 철학 정리
- 2019.10.30 현대 인식론 정리
- 2019.10.30 인식론 중간 고사
- 2018.12.26 개는 희망할 수 있는가? -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 : 생각함의 선험적 틀에 관하여
2019.10.30 18:55 현대 철학/분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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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인간의 인식적 차이 탐구
- 인간 사고의 환원가능성에 관하여>
0. 요즘 테크닉의 발달로 음성인식이나 지문인식이라는 기계의 기능이 일상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계가 인식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아니 그 전에, 기계에게 인식이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들의 인식은 인간의 인식과 동일한 것일까 다른 것일까?
카스파로프는 최연소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이후 15년 동안 무패를 기록한 체스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하지만, 도전자였던 슈퍼컴퓨터 딥블루는 그가 그동안 두었던 기보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대로 따라했다. 챔피언은 자신의 수를 뛰어넘을 신의 한수를 찾지 못했고, 딥블루 또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수를 DB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무승부 끝에 챔피언은 점차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어이없는 실수를 하며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자신이 수를 계산하지 못하고, 기보에 의존하는 딥블루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러야할지 곤란해 한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에서 다루는 지능과 인식의 문제들, 더 나아가 인간의 인지능력과 추론능력을 인공적으로 모델링함으로써 외부 대상을 지각하고 자연언어와 같은 구문적 패턴까지 이해하는 능력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정의가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결과적으로, ‘지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슈퍼컴퓨터 딥블루는 이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잠시,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인공지능에 관련된 연구는 기계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딥블루가 체스를 두는 행위도 기계가 인식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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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인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인식주체로서의 인간과 기계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무엇일까? 또, 기계에 있어서 인식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글에서, 인지과학의 발전과정을 대략적으로 서술하여, 현대과학이 기계의 인식을 어떻게 규정해냈으며, 또 기계와 인간의 인식이 동일하다는 생각에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대한 전 과정을 유추해낸 후, 인공지능 발전의 추세를 통해, 현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영역까지 진보할 수 있을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만약에 그러하다면, “기계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과 동일한 것인가?”라는 처음의 물음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다. 현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영역까지 진보할 수 있다면, 기계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위의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인지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인지와 인식을 정의내리고 그 둘의 차이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또, 인지과학자들이 인식론을 탐구하는 철학자들과 비교해봤을 때 인간의 인식을 파악하는데 있어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통, 인지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 탐구하는 인식과 차별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탐구하는) 인식을 비교적 수동적 과정이라 볼 수 있는 정보처리 개념이 강조되지 않은 형태로의 앎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탐구하는 인식의 경우, 정보처리 과정을 거친 능동적 앎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지의 경우에는, 그러한 수동적, 능동적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앎을 지칭하며, 특히 정보 처리 (information processing) 과정을 거친 앎의 과정과 내용을 지칭한다고 규정하여 차별화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철학에서의 인식 개념 역시 수동적, 및 능동적 앎의 과정을 모두 지칭하며 사용해왔기에,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인식이라는 단어와, 인지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인지라는 단어를 구분하기가 한층 더 애매해지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인식과 인지의 실질적 차이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강조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어떤 구조를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심리학이 생긴 이후로, 심리학자들은 어떤 이론이 현실을 가장 잘 관찰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 틀, 즉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초기에 많은 심리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패러다임은 행동주의 심리학이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을 주장한 과학자들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과학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하며, 모든 과학적 용어는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만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관찰하기 곤란한 '마음'의 상태와 작용을 개념화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며, 마음에 대해서 알 수 없다고 생각한 심리학자들은 마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즉 그들은 마음에 대한 탐구자체를 포기하였다.) 대신에, 이들은 마음을 하나의 수동적인 스위치 연결 상자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자극과 반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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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관계가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극 S가 입력(I)되면, S에 대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반응 R이 마치 함수처럼 기계적으로 출력(O)되는 것을 마음이 작동하는 과정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이러한 기계적 S-R 연결들을 중계할 뿐인,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하나의 암흑상자(black box)이며 마음(M)의 본질을 추론하기보다는 입력(I)에 따른 출력(O)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을 주요 탐구과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 M
자극 S(또는 입력 I) -----→ Switch Box -----→ 반응 R(또는 출력 O)
f [(S) × (M)] = R : (M은 불변하는 상수)
∴ M = 상수 :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음.
따라서 S'→R'의 관계만 연구가능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이들의 생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가 기본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활동을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을 정보처리 패러다임이라 흔히 말하며, 이 패러다임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그것에 대한 물리적 구현체인 두뇌, 그리고 컴퓨터를 정보처리적인 틀로 간주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보(information)’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의미(意味)가 할당되고 해석된 기호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정보를 단순히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호들이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반면, 인지과학에서 정의하는 정보는 대중들이 흔히 사용하는 정보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정보의 수학적 이론에 의하면, 정보는 시스템 사이의 소통을 위해 생성되고, 전달되고, 수용되는 신호(signal)로서, 그 신호를 해석하고 사용하는 지적인 주체의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정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이며, 따라서 흔히 정보로 간주되는 명제나 진술은 그것들의 원천(source)으로서의 정보와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보들은 외부에 존재하던 정보를 우리의 인지체계에 의해 주체적으로 해석해낸 것으로, 지금까지의 심리학에서 정의하던 것처럼 마음을 단순한 스위치 연결 상자로 보는 것에서 빠져나와, 마음을 정보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로서, 즉 정보를 처리해내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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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입력(I)하는 것과 이에 대한 인간의 정보처리 결과인 출력(O) 사이의 기계적(mechanistic) 관계를 탐구하기보다는, 입력(I)과 출력(O) 사이에 어떠한 심리적 과정이 일어나기에 이러한 I와 O의 연결이 가능하게 되는가에 대한, 즉 마음(M)의 과정과 내용에 대한 추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마음은 잠재적인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자극으로부터 정보를 추출하고(선별), 해석에 따라서 상징화하여 조직하고, 처리함으로써 이것들을 상징구조로 저장하여 처리 결과를 반응으로 출력해내
는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전까지는 마음을 기존의 수동적 기계장치로 이해한 것에 비해, 정보처리 패러다임 내에서는 마음을 I와 O 사이에서 정보를 해석하고 결정하며 스스로를 점검(모니터)하는 역동적인 상징조작체계(symbol manipulation
system)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계란 여러 하위 체계 또는 구성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부분들이 다양하게 상호작용하며 환경에서 입력을 받아 출력을 내어놓는 개방적인 전체를 말한다.
I ---> M ---> O
물리적 심적 자극(입력) 마음이라 불리는 것 정보처리과정을 거친 반응(출력)
f(I × M)= O
추론된 마음 M <- f([I'] × [O'])
이 패러다임에서 지적하는 내용, 즉 ‘인간의 마음과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활동을 하며, 각종 자료는 인간의 마음이나 컴퓨터에 주체적 해석을 거친 형태로 저장되어있어 어떠한 특정 상황 속에서 마음의 작용과 내용을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얼핏 보기에 간단하지만 인지과학의 입장에서는(물론 철학적 입장에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마음을 과학적 탐구대상에서 제외하려던 심리학이, 마음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탐구할 수 있음을 보이고, 마음에 대한 탐구를 주요과제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마음에 대한 연구를 철학에서 수행했다면, 이제는 인지과학, 또는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역시 철학에서 진행하던 연구들, 즉 철학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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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칸트가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규명하고자 한 내용의 일부(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의 기획)는
C1. 경험 이전에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있다.
C2. 그런 조건 중에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있다.
C3. 공간의 형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이러한 것들이었다.
이 중 C1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특히 인지과학에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로 바뀌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철학적 질문은 "인공지능을 만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공학적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을 다른 종류의 물리적 장치에 실현하면 그게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는 '귀납 편향(inductive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알고리듬에 따라 똑같은 경험을 해도 다른 학습을 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칸트와 현대의 인공지능 연구자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로, 공학적 측면에서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을 설계하는 공학자들, 혹은 인지과학자들의 탐구는, 인간의 마음 역시도 그러한 정보처리과정의 시스템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의 인식 역시도,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마음(그리고 그것의 물리적 구현체인 두뇌)은 하나의 컴퓨터이며, 환원할 수 있는(일일이 계산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파악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인지과학은 그 발전으로 인해 철학에서 다루던 마음의 문제를 환원주의적 입장에서(인간의 사고가 계산 가능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입장에서) 다루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이러한 관점을 거부하는 기존의 철학자들과 일정 부분 대립하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들이 파악한 인식과 인지의 차이를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철학에서는 흔히 인식을 다룰 때 앎의 개념에 집중한다. 즉, 이들이 주로 탐구하는 주제는 “앎으로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인식 주체는 어떤 것을 앎으로 받아들이는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Epistemology(인식론)를 간단히 Theory of Knowledge, 즉 앎에 대한 학문으로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이 철학에서 인식을 앎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에서 앎을 인식의 주요 탐구과제로 다루고 있으며, 그렇기에 인지과학자들이 초기에 철학에서의 인식을 “능동적 앎”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그다지 선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철학과 인지과학에서의 인식의 차이를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강조여부로 판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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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인지과학에서의 인지는, 앎뿐만 아니라, 다른 마음의 여러 가지 기능(가장 간단하게 분류하자면 전통적으로 마음의 세 가지 요소라 일컬어지는 지(智), 정(情), 의(意) - 사고, 감정, 의지의 개념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철학에서 인식론이 앎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는 반면에, 인지과학에서는 앎을 탐구한기는 해도, 인지과학 전체의 탐구과제로 봤을 때는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지과학은 마음 전반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처럼 '앎의 과학'(The Science of Intellect)으로 불리지 않고 '마음의 과학‘ (The science of minds)으로 불린다. 따라서 인지과학자들이 말하는 인식은, 인지의 한 부분집합이며, 인지과학자들은 기계의 마음(그 나름의 정보처리과정)을 탐구하고 설계하는데 있어 인식과 관련된 문제들 역시 부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기계와 관련된 여러 인식의 문제들(인식과정, 인식여부, 인식가능성 등)은 인지과학의 탐구대상이자 인공지능 구현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집합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과연 인간과 기계의 인식이 동일한 것인가?”라는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위에 서술한대로, 인지과학자들은 인간과 기계의 인식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인식체계를 분석하여 설계할 수 있다면 마땅히 인간의 인식체계 역시, 환원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편에선, 인간의 수준이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 것이며, 인간을 기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모욕적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은 우리의 편견일 뿐이며, 인간은 기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생체기계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보일 것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정보처리과정에서 일어나는 선별과 해석, 또는 논리적 사고 등 사유의 정신은, 그저 두뇌의 신경망 활동에 불과하며 인간은 생물학적 기계이자 고도의 생체기능 컴퓨터(즉 두뇌)를 가진 로봇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인지과학자들이 (인식주체로서의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기에) 기술 발전의 차이일 뿐, 인간의 인식과 기계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며,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인간 역시도 언젠가는 인간처럼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계를 창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왔다. 나 역시도,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내용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인간이 기계보다 당연히 우월한 존재라는 (어찌 보면 편견일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무시할 수만 있다면 무리 없이 위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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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내용과, 기계(인공지능)와 인간의 인식이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난관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가 정말로 환원가능한 성질의 것이냐는 물음이다. 만약에,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와 마음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보처리 패러다임으로는 인간의 사고를 온전하게 밝혀낼 수 없음을, 나아가 기계가 인간의 인식수준과 인식체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의 정신 과정이나 '의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계산(computation) 가능한 성질의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인공지능 연구와, 인간과 기계의 인식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례로서 작용할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인지과학자들에게 있어 어째서 딥블루는 인공지능의 구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가?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능이라고 부를 것인가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인간의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감성과 같은 것 또한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체스를 두는 것이 바로 이 분야에 들어간다. 대중적으로 컴퓨터가 체스를 둘 수 있는 것이 지능을 가진 증거인 듯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체스 머신은 매우 이른 시기에 인공지능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체스를 연산으로 처리하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수 하나를 더 내다보려면 평균적으로 26배의 연산이 더 필요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현대의 컴퓨터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5~6수를 내다보는 것이 고작이며 수십 수를 내다보는 체스 기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실제 체스 머신들은 지금까지의 체스 기보를 대량으로 입력한 후 그 체스 기보에서 같은 모양이 나온 적이 있는지를 하나하나 대조하는 방식으로 처리한다. 다만,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체스실력이 뛰어난 선수일수록 판단력보다는 기억력에 의지해 수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처음 자신의 수를 만들 때는 선수의 창의력이 발휘되지만, 자신만의 기보가 점차 확보됨에 따라, 창의력보다 기존의 기억하고 있던 수에 의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즉 컴퓨터의 체스행위, 혹은 딥블루의 체스행위는 이미 만들어진 기보전체를 정보로 받아들인 후, 기억력에(이 경우는 컴퓨터의 방대한 연산 작용에) 의존하여 그 기보를 재배열한 것에 불과하다. 즉 딥블루에게는 수를 창조하는 과정이 결여되어있었다. 인간의 체스행위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수를 ‘창조’해내는 것과 달리, 컴퓨터의 체스행위는 이미 창조된 수를 모두 정보로 받아들여 앞의 수와 대조하고 재배열하는 일련의 ‘계산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체스는 인간이 체스를 할 때 바탕이 되는 사고의 창조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컴퓨터의 체스가 데이터 병렬처리를 빠른 속도로 해낼 수 있는 슈퍼컴퓨터의 성능 과시용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위의 칸트의 기획을 설명할 때도 지적한 바 있지만, 딥블루는 애초부터 체스의 주어진 수(정보들)를 입력하여 그를 토대로 체스를 둔 것일 뿐 학습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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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결국, 인공지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학습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덧붙여 이 학습을 위한(귀납편향도 고려한) 알고리듬 설계 역시 인공지능 구현을 위해 필수적이다. 딥블루는 여기에서 실패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최근 각광받는 음성인식과 화자인식이다. 딥블루와 같은 인공지능의 선배들과는 달리, 음성 인식과 화자 인식, 또 최근의 여러 인식이 사용되는 기계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학습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LA 타임즈>에서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사람이 아닌 퀘이크 봇이 알고리즘 기반의 기사 작성 프로그램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영국의 <가디언>은 사람의 편집 없이 알고리즘으로 종이신문을 발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수집된 데이터와 정보에 기초해 소프트웨어가 의미를 해석하고, 어울리는 도표와 이미지를 제안해 기사를 작성한다. 화자 인식(Speaker Recognition)은 입력 받은 음성 데이터를 미리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여 화자가 누구인지 식별하고, 음성인식은 다양한 화자들이 발성한 음성들을 통계적으로 모델링하여 음향모델을 구성하며 말뭉치 수집을 통하여 언어모델을 구성한 후에, 언어 속에서 다양한 신호를 제어해 잡음을 없애고 키워드를 이해해 맥락을 분석한다. 이들은 어찌 보면 체스를 두는 것보다 훨씬 간단한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여 스스로 학습한다는 점에서 딥블루보다 훨씬 고급의 인식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영화 Her에 나왔던 것처럼 대화 예측기술이 상황적 맥락을 파악해 매번 다른 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들고 심지어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는 것은 아직까진 SF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이미 실제로 상당부분 구현된 기술이다. 이를테면 MIT에서 개발한 ‘지보’가 인간의 음성과 이미지를 인식해 표정과 심리 상태를 분석하여 (학습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 또는 이모스파크가 이미지를 이식하는 감정 프로파일 그래프를 통해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인식해 대화하는 것들은 이미 현실에서 구현되어 상용화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실제로 나는 그러한 반론에 대해(인간의 사고가 계산가능한 성질의 것인가?)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더 자세히는, “인간의 사고가 계산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로 봤을 때, 또 인류의 태동을 생각해 봤을 때, 인공지능이 학습능력을 통해 인간의 인식 영역에 다다르는 것은, 기술적으로 필연적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직관에 근거한 것이지만, 나를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 가장 중요한 근거는 과학자들이 미약하게나마 이미 기계에게 학습능력을 구현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었던 시절(즉 사고가 지극히 단순하던 시절), 인간이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 생각에는) 그들의 학습능력에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인류가 뼈다귀를 들었던 유인원에서, 핵미사일을 쏠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역사 진보의 과정 역시, 그들의 학습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문자의 발명이후로, 인간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문자가 인간의 학습능력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기에 나는, 기계가 스스로 자료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단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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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도, 그들 역시도 인간만큼이나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1.인지과학(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이정모 저, 2009)
2.http://blog.naver.com/metapsy/40171771072
(심리학 인지과학 마을- 성균관대학교 인지과학전공 이정모 교수 블로그)
3. 이정모 (1988a). 과학적 물음의 본질: 과학철학적 관점들과 그 시사점. 한국심리학회(편). 실험심리연구법총론-가설검정, 설계, 실험 및 분석. 성원사, 37-72.
4. 이정모 (1988b). Turing 기계와 마음: 마음은 기계인가? 심리학의 연구문제, 5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서울대학교 출판부.
5. 정보처리 패러다임의 특성 - 이 정 모 · 이 흥 철 (2002)
6. How the Mind Works- 2장: Computational Theory of Mind 발췌 - Stephen Pinker (2009)
7.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1950 네이버 영화 Her
8. http://blog.naver.com/gesbroad/60114515572 계산주의에 대한 설명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라스 호프스태더 : 인공지능의 전망 챕터
9. http://plato.stanford.edu/ 스탠포드 온라인 철학사전- 인지과학, 인식, 인지, 화자인식, 음성 인식등 인공지능과 관련된 전반적 개념들, 사례들을 찾아보는데 이용함
10. http://ko.wikipedia.org/wiki/%EB%94%A5_%EB%B8%94%EB%A3%A8 딥블루 위키백과, 사진은 구글링.
1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027&cid=40942&categoryId=32845 인공지능 개념 인용 두산백과
12.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697&contents_id=83121 인공지능의 진화- 네이버 매거진 캐스트, 인공지능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데 사용
13. 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41224000310 인공지능 지보
뉴스기사
14.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94810&memberNo=6525697&vType=VERTICAL 인공지능 이모스파크, 네이버 블로그 검색
15.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557884 인공지능 가디언 지, LA타임스 의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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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컴퓨터로서의 마음 : 기계 기능주의 (machine functionalism)
1절 심신동일론 -> 다수실현 가능성에 의해 반론됨
유형동일론의 몰락 (생각보다 빨리 쇠퇴함)
기능주의의 등장 -> 물리적으로 다르나 하는 역할, 기능이 동일함(물질적 현상보다는 동일한 기능이 중요함)
심적 속성(mental property)에 대한 anti – reductionosm(반 환원주의) 입장이 강화
cf) Davison의 무법칙적 일원론 -> 환원주의적 입장을 약화
- 개별자 동일론
1. 다수실현 가능성과 심적인 것의 기능적 개념
ex) 천사 : 우리 세계에서 구현되기는 어려운 존재자 but 논리적인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님
물리적 실현 원리 (physical realization principle) -> 물리주의를 대변하는 입장
내용 만일 x가 정신적(심적) 속성 m을 가지고 있다면 x는 물리적이고 x는 m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 p를 가진다.
a) 마음이 존재하려면 물질 속에 있어야한다
b)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을 남겨둠
ex) 고통
1) 행동주의 자극 -> ㅁ (특별한 언급이 없음) -> 반응 (행위)
input과 output만을 다룬다.
2) 심신동일론 (유형 물리주의)
고통 = c섬유의 작동
3) 기능주의
상자의 중요성을 인정 실재(real) 하다고 인정 + 인과적 (causal power)
자극 -> (고통) -> 반응
function 함수로 존재함
then 고통의 기능은 -> 조직손상의 발견 (고유한)
-> 생존에 기여, 이러한 기능이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님
2. 기능주의 vs 행동주의
공통점 : 심성(meantatily)의 본질의 자극과 반응
차이점 : 실재론적 입장(functionalism) vs 도구주의적 입장(행동주의)
a) 1) functionalism : 심적 상태를 인과력을 지닌 내적 상태로 봄
2) 도구주의적 입장 : 심적 상태를 행동으로만 설명할 뿐 인과력을 지닌 내적상태로 인정하지 않음
ex) 물에 녺음 : 수용성
1) 도구주의 : x는 물에 녹는다 = df 만일 x가 물에 들어가면, x는 녹는다.
2) 실재론 : x는 물에 녹는다 = df x가 s라는 내적 상태(속성)에 있으며, 그 상태 s는 x가 물에 들어가면 x를 녹게 한다.
-> 과정에 대한 설명 매개체에 대한 설명이 가능함
b) 행동주의 : 물리적 사건, 작극과 반응이 관찰가능한 행동으로 나와야함
기능주의 : input과 output에 따른 심적 상태가 들어가는 것을 인정 -> 행동이외의 상태(불쾌감, 괴로움)도 인정
3) 기능주의의 특징 (입장)
1. mental realism 심성 실재론 데카르트 이원론이 아님
-> 심적 상태(mental state)가 실재(real)한다는 존재론적 입장
2. holism 총체론 whole -> input과 output에 다른 심적 상태가 포함될 수 있음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심적 상태
총체론의 장점 : 행동주의가 설명하기 어려운 dba 법칙에 적용가능
dba desire belief action 욕구 믿음 행동
q) 이런 총체성을 순환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4. 기계 기능주의 함수 = 마음
인과 -> 물리적 영역에서 발생 그래서 마음도 물리적
기계 (연산, 계산) 마음을 turing 기계로 보는 것 -> machine table(마음에 해당) 에 의한 연산(계산) 작용
마음을 계산 능력(함수)으로 보는 것
심성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복잡성을 가진 물리적으로 실현된 튜링기계
한 유기체가 심성을 갖기위한 필요충분조건
1) 그 유기체의 기계 서술(기계표)에 해당하는, 적절한 복잡성을 지닌 튜링기계가 존재
2) 유기체의 심적상태가 튜링기계의 내적 상태와 동일
V: 심리적 주체 s의 모든 가능한 인풋(입력, 공역)과 아웃풋(출력, 치역)을 나열
(list)
C: S의 인풋과 아웃풋의 연결 관계를 제시
(심리)
C를 통해서 심리의 발생 이유를 설명, 예측
f(x) = x +1 -> 내적 상태(마음) c
1 -> 2
2 -> 3
3 -> 4
나열된 것 : v
기계 기능주의 : 내적 상태 c = 기계표 = 함수가 중요
real
인과력 (a가 없으면 b가 없다)
왜 도구주의 보다 실재론을 선호?
1) 심성과 관련된 이론의 설명능력, 특히 인과적 설명능력을 갖기 위함
2) 심적 상태의 기저에 있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찾고자 함.
행동주의의 경우 input – o – output 가운데항은 설명되지도 못하고 실재하지도 않음
튜링테스트
1) 기계가 지적인 업무를 한에 있어서 인간만큼 할 수 있는지 테스트
2) 판정 : 기계가 질문자를 지속적으로 속일 수 있다면, 컴퓨터에게 인간과 유사한 지적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
3) 문제점
1번 심성이나 지적능력을 갖기 위해서 꼭 인간만큼의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
2번 감각적 기능은?
튜링테스트 통과는 인간과 유사한 지적능력의 충분조건임
튜링의 주장
두 시스템이 인풋-아웃풋에서 동일하다면 그들의 심적 지위도 동일하다
즉 한 시스템이 마음을 가짐을 인정하면, 다른 시스템도 마음을 가짐을 인정함
반론) 인간과 튜링기계의 인풋-아웃풋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같은 심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려움
인풋-아웃풋의 연결은 단순한 연산작용만으로도 가능함 -> 내적상태에 대한 조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음
존 설(john sealr)
중국어방 논증
중국인 <-> 방 ( 미국인) -> 중국어를 이해 못함 모든 아웃풋을 내는 룰북
대화중...
과연 중국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ans 룸 시스템 자체가 이해하는 것 아닐까?
ans 시스템의 작동과 이해는 다른 영역이다.
2절 ‘대화함’로는 기계의 생각함이 해명되지 않는다.
튜링테스트는 인간과 기계가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다시 말해, 대화함이 생각함의 기준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제 그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모방해서, 즉,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맥락으로부터 단어를 조합하는 것을 그저 분석해서, 혹은 배워서, 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기계의 대화가 “분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input이라는 명령어를 넣을 때 output을 산출하는,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보다 정교한 형태의 자판기라는 것은 분명해도, 내가 동전을 넣을 때마다 원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즉, 내가 평소에 선호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 자판기가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판기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는 직관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튜링테스트의 적절한 반례가 된다. 대화로부터 “생각함”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무튼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튜링테스트를 좀 더 정교화해볼 수 있다.
기계가 생각하는 기계로 인정받기 위한 기준 iff)는
1) 인간과의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야하며,
2) 대화가 기존의 대화를 분석하여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대화의 본질에 대해 아직 정의내리지 않았기에, 이러한 기계에게서 무엇이 결여되어있는지에 대해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튜링테스트가 실질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거기에는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은 ‘생각함’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 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필요한 그것에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가 결여된 대화는 그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엄밀히 말하면 두 대화자 사이의 독백이라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가 생각함의 필요조건이 아니고, 오히려 생각함이 대화의 필요조건이며 대화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규정해야만 기계의 “생각함”이 드러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함은 이 “올바로 이루어짐”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생각함을 규정하는 데 있어 대화함을 넣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대화를 배운다.”고 표현해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스스로 배울 수 있으려면, “생각함”으로서 배워야하고, 이것은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배움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구현하려하는 그것(즉, 생각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직 서명도 되지 않은 수표를 사용하려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함이 대화랑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는 아직 몰라도, 대화함 그 자체는 생각함으로부터, 혹은 생각함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계의 생각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계의 대화함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게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함으로부터 대화함이 나온다면, 우리는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대화함과 생각함이 그저 같이 놓여있는 것이라면, 대화함으로서는 생각함의 문제를 건드릴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튜링테스트에 대해 이와 유사한 반박을 가한 철학자가 위에서 언급했던 존 설(John Searle)이다. 존 설은 그가 제시한 중국어 방 논변에서,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 기계는 심성과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논증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일련의 기호들을 받으면 다른 기호들로 변형시켜 산출하는 규칙들이 작동하는 중국어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기호들은 중국어 표현이고, 규칙들은 의미에 따라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적용된다. 방은 중국어 표현들을 받으면 그에 적절한(마치 중국어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대답들을 산출한다. 방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지만 이러한 형식적 규칙과 “통사론”에 따라 기호를 조작할 뿐이다. 그러나 밖에서 관찰했을 경우엔, 중국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랑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중국어 방에 들어간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러한 상황엔 중국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의미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설의 반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튜링테스트는 기계의 “생각함”을 증명하기에 부적절하며, 이에 따라 다음 장에서는 “생각함”의 의미를 명료화함으로써 “생각함”이 선험적 틀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를 보이고자 한다.
제 5장 인과적 구조로서의 마음: 인과론적 기능주의 <-> 기계 기능주의(인과력을 요청하지는 않음)
인과론적 기능주의 :인과적 역할을 통한 심성의 기능주의적 설명
-> 심적 상태 –인풋 아웃풋의 관계로 설명 피부조작 손상 -> 고통(인과력) -> 찡그림, 피함, 불쾌감
주의 1)다른 심적 상태가 포함될 수 있음 무한후퇴의 우려 -> 총체론을 택함으로서 해결
2)기계기능주의는 인과력이 반드시 포함될 필요는 없음
1) ramsey-rewis의 방법
ex) 고통에 대한 이론 t : if then
t) 임의의 x에 대해서 만일 x의 조직이 손상되고 x가 정신이 있다면(심적인 현상m1) x는 고통 속에 있다. m2
-> 만일 x가 잠들지 않은 상태라면, x는 정신이 있는(m1) 경향이 있다.
-> 만일 x가 고통 속에 있다면, x는 움츠리고 신음하며, 괴로운 상태에 있다. m3
중재 일반화(erisetentially generalizing) 램지화
Tr :
-만일 x의 조직이 손상되고, x가 M1의 상태에 있다면, x 는 M2의 상태에 있다.
-만일 x가 잠들지 않은 상태라면, x 는 M1의 경향을 가진다.
-만일 x가 M2의 상태에 있다면, x는 움츠리고 징그리며 M3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T -> Tr의 존재양화
ex) 문재인은 한국사람이다. -> 어떤 한국사람이 있다.
Hm
---------
some x Hx
-> 논리적 관계도 축약( 주장이 약화됨)
T – Tr은 물리적 측면에서는 동일한 내용
ex) x가 고통속에 있다 =df
고통에 대한 이론 T에 대해,
some x M1 M2 M3 [T(M1,M2,M3)^x는 M2의 상태이다.] -> 고통에 대한 물리적 설명이 가능함
우리의 관심은 T(고통 대한 이론 or 심적 상태에 대한 이론)
2) 기제에 있는 심리이론의 선택 1)상식적 심리학 2) 과학적 심리학
1)상식적 심리학 : 일반인이 공유하는 심적 개념을 기반
2)과학적 심리학 : 상식적 심리학이 지닌 오류가능성을 우리 과학이론이 심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사이의 인과적 법칙적 관계를 탐구
문제점
1) 상식적 심리학의 경우 : 모든 심리개념과 관련된 부분이 모두 참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ex) 고통 : 조직의 손상 + 정신이 있음 -> 불쾌감 (전장을 수행하는 군인의 경우 예외가 가능)
2) 과학적 심리학 : 이론들 사이의 갈등
과학 이론의 갈등 -> 심리적 개념이 작동
T Tr
근거
Tr1 -> T1
Tr2 -> T2
상충되지 않음
->심리적 개념이 상이해질 위험, 의사소통이 가능한가?
절충안)상식적 +과학적 심리학
ex) 통속의 뇌 vs 인간
인간과 다른 인풋을 가지지만 인간과 정확하게 같은 내적 상태를 가질 수 있다고 가정
(반론의 핵심) 기능주의에서 얘기하는 인풋과 아웃풋만으로 심적상태(심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심적 속성의 중요한 요소인 감각질(qualia)을 설명하기 어렵다.
3) 기능적 속성, 선언적 속성, 인과력
심적 상태(M)는 인과적 역할(인풋-아웃풋)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Q1,Q2,Q3)
인간, 문어, 화성인 등의 물리적 기반
M 은 Q1과 같지 않다.
M = Q1 V Q2 V Q3
물리적 속성
문제) Q1 Q2 Q3의 물리적 상태는 매우 상이함
-> 기능주의 입장에서 과연 이러한 서로 다른 물리적 기반으로부터 통일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 수 있을까? *과학이론은 통일성을 지닌 규칙을 발견하는 작업
1. 상식적으로 우리는 심적속성 M이 선언적 속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2. 설령 우리의 상식이 틀려서 심적 속성이 선언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에 어렵다
*인과력(Causal power)
주의:인과적 역할과는 다름 -> (뜨거운 물에 들어감 ->나오려고함)
인과력이란 실제로 인풋과 아웃풋을 야기시키는 힘이다.
o 뜨거운 물 -> (인간의 신경계를 자극) -> 몸이 불편함을 느낌 -> 나오려고 함
o 뜨거운 물 -> (문어의 신경계를 자극) -> 문어의 몸이 불편함을 느낌 ->나오려고함
인간의 신경계는 문어의 신경계와 같지 않음
M : P1 P2 P3 등에 의해서 실현, P1 P2 P3가 가지는 인과적 힘(인과력)은 다른 것임
정신이 인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 -> But 과학이 기대하는 통일성(법칙성)을 확보하기 어려움->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적절한가?
4) 개념과 속성
개념(concept) : 언어적 인위적
속성 (property) :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 인과가 성립하는 차원
*인과적 역할(관계) vs 인과력
인풋-아웃풋 구체적(물리적으로 실현된 상태)으로 A라는 사건 B사건을 야기 A CAUSE B
물리적 기반이 다를 떄 인과적 역할을 유사하지만 인과력은 다를 수 있음
정신인과, 심적 인과
Mental to physical
physical to mental
mental to mental
3) 물리주의로서의 기능주의
기계 기능주의 :기계표(기계 서술)가 물리적으로 실현되기를 요구
인과론적 기능주의: 그자체로는 물리주의를 함축하지 않음(물론 물리적인 설명으로 향하고는 있음) (램지-루이스 방법은 그 자체가 물리주의적이여야만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음)
P
램지화된 심리이론 Tr 의 존재함이 확인되는 상태는 물리적 상태이다
Tr의 변항인 심리상태 M1 M2 M3가 물리적 상태의 치역을 가즌ㄴ다.
심리적 상태 치역 물리적 상태 실험
M1 ----------> P1
M2 ----------> P2
M3 ----------> P3
반론과 난점
1. 감각질 (Qualia –qualitative state) : 특정한 (독특한) 질적인 속성(특성), 현상적 속성
Q) 모든 고통이 공유하는, 그것 때문에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
ans) 아픈 느낌
a) 고통과 같은 심적상태를 기능(함수)으로 설명하려는 기능주의의 입장에서는 감각질과 같은 질적상태(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음
고통과 같은 심적현상을 인과적 역할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반론에 부딪침
b) 뒤바뀐 감각질 qualia inversion. inverted spectrum
가 . 빨강 -1- 빨강
파랑 –2- 파랑
나. 빨강-2-빨강
파랑-2-파랑
c) 감각질이 없는 경우(absent qualia)
대표적으로 좀비 <--------------일상적으로 말하는 좀비의 의미와 상이함
심리철학에서의 의미 다른 사람과 인풋-아웃풋은 동일한데 감각질을 가지지 않은 경우
ans) 같은 물리적 기반(ex 사람의 신경계 + 감각기능)이 동일하면 같은 감각질을 가질 것이다
재반박) 1. 인간과 화성인의 물리적 기반이 다르다면 같은 기능을 하는 다른 감각질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임
2, 감각질의 문제제기가 바로 이 대답을 문제삼는 것. 위의 반론은 감각질이 물리적 기반에 수반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 전제가 바로 감각질을 반론으로 제기하는 사람이 공격하는 지점 – 선결문제의 오류임
2. Cross wired brain 혼선된 두뇌
일종의 감각질 뒤바뀜
가) 압정을 밟음 –pain box- 움츠리고 아야 소리를 냄
모기가 물음 –itch box- 가려운 곳을 긁음
나) 압정을 밟음 –itch box-움츠리고 아야 소리를 냄
모기가 물음 –pain box- 가려운 곳을 긁음
제 6장 정신인과 (mental causation)
-mental to physical causation 심물인과
ex) 내가 무언가를 쓰기를 원함(want) -cause> 칠판에 무언가 씌어짐
-mental to mental causation 물심인과
ex)불에 손이 닿음 –cause> 손의 통증
-mental to mental causation(심심인과)
ex) 헤어진 그녀에 대한 생각 -> 마음을 아프게함
(1) 행위와 심적인과 (mental to physical causation)
[DBA] s가 무언가를 원하고 D , A를 행하는 것이 원하는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면 B s는 A를 행할 것이다.
Desire Belief Action
-> 인과에 대한 설명 : DBA에서 원함과 믿음이 행위의 원인
-> 이런 설명이 심물인과에 적용됨(DBA를 기반으로 하는)
(2) 심적인과 심적 실재론 그리고 부수 현상론
-Physical to Mental(우리가 세상을 알게되는 중요한 요소) causation : 우리의 감각경험을 통해서 일어남
-mental to mental causation :추론
태양계의 행성의 수는 짝수이다.
태양계는 행성이 8개 있다
8은 짝수이다
-부수현상론(epi Phenomenalism)
ex) 자동차의 움직임 vs 그림자의 움직임
자동차가 움직이는 건 인과에 의한 것이지만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엔 인과가 없다. 부수된다.
심적속성은 그림자처럼 인과력을 가질 수 없다.(인과의 원인이 될 수 없다.)
-> 즉 심적인과를 아예 부정
mental to physical mental to mental을 부정
ex) 통증을 야기하는 물리적 상태 –cause> 약을 먹고자 하는 욕구에 해당하는 물리적 상태
cause 통증(심적상태) cause 약을 먹고싶어하는 욕구
둘 사이엔 인과력 없음
Alexander : 심성이 인과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쓸모가 없기에 실제로 인정할 필요가 없음 (부수 현상론에 대한 반론)
3) 데카르트의 상호 작용론 문제점 비공간적 비물질적인 실체가 어떻게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에 영향(인과력)을 줄 수 있을까?
4) 심물법칙(physcophysicae law) 과 무법칙적 일원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부정하면 mental causation의 설명은 상대적으로 쉬워짐
정신적 실체와 물리적 실체 사이의 인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 사이의 인과를 설명하면됨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과를 법칙으로 여김
Daned Davidson : 무법칙적 일원론 (주의) Davidson 부정하는 것은 인과도 아니고, 인과법칙도 아니고, 심물인과법칙임
상식선에서(D의 주장) 심물법칙을 부정하는 근거
1) 명제적 태도와 같은 심적상태(고통 등은 제외)
EX)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다
S1 S2 S3 등의 인식 주체가 P를 믿는 상태는 심적으로 동일 -> 과연 P를 믿는 물리적 상태가 과연 동일할까?
2) 퍼트넘 쌍둥이지구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
대부분의 사람이 구분을 못함
P자작나무는 어린이 대공원에도 있다
P에 대한 믿음 -> 일종의 심리상태
쌍둥이 지구의 예 쌍둥이 지구는 우리의 지구와 모든 것이 같으나 단, 그곳에서 ‘자작나무’는 너도밤나무를 지시하고 ‘너도밤나무’는 자작나무를 지시한다.
지구와 S1와 쌍지구의 S2가 P를 믿는 심적상태는 정확하게 동일 -> 믿음의 내용(지시체가 다르기에) 달라지는 경우
S1의 심적상태(지구) -> 믿음의 내용이 자작나무
S2의 심적상태(쌍지구) -> 믿음의 내용이 너도밤나무
직접지시론 Narrow content wide content
Davidson 논증의 전제 : 믿음이나 욕구같은 의도적(명제적) 상태(내적상태)는 합리성과 정합성을 따름
ex) 그 사람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 -> 모순으로 받아들이지 않음,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성향
ex) 서울에서 인천사이가 50키로미터 미만이다
-> 서울에서 인천사이는 100키로미터 미만이다
주의) 데이비슨이 정신인과 부정하지 하지 않음 인과법칙을 부정하지 않음
심 – 물
법칙이 작용하지 않음
합리성과 정합성은 심의 영역인데 물리적상태가 있어야 심물법칙이 생김
그런데 물리세계에는 합리성과 정합성이라는 물리적 상태를 관찰할 수 없으며 따라서 법칙이 되지 않음
심적 사건 m –야기> 물리적 사건 p
->c -> -> e 물리적 속성
야기하지 않으며
심물법칙 x
또한 심적 사건으로부터 물리적 사건 사이엔 법칙이 없음
물리적 속성(심적속성) <- 심적상태나 심적 속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
심적인과 “속성부수 인과론”
물리적 속성과 함께 심적 속성도 가짐
Davidson의 무법칙적 일원론
정신인과는 인정
인과는 법칙을 요구한다는 것도 인정, 하지만 정신 인과가 심물법칙을 요구함은 부정 무법칙적임
모든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정신적 사건도 포함) ->일원론 :물리적 사건의 일부는 정신적 사건
M(심적 사건)인 동시에 물리적 사건 -> P물리적 사건
법칙관계
물리적 속성(Q) <---------------> 물리적 속성(P)
정신적 속성(M) <------------X---------> 물리적 속성 P
심물법칙 부정
근거: 심적 사건은 합리적이고 정합적이나 물적 사건은 그렇지 않다.
심적사건은 물리적 속성과 정신적 속성을 지닌다
인과의 폐쇄성
5)속성부수 현상론과 심적 속성의 인과적 도전
고전적 부수현상론 : 정신인과를 부정
고통 <-야기------ 신경상태(물리적상태)
ㄴ-------> 움츠림
VS
속성부수현상론
정신인과는 인정
단 심적 속성은 인과력이 없음
물리적 상태가 인과의 원인 (인과력을 가정)이 될 수 있음.
to Davidson
Q) 심적 속성의 인과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정신인과는 인정하는가?
1. 데이빗슨의 심적 무법칙성을 부정
2. d가 말하는 인과법칙 개념이 유일한 설명방식이 아님을 밝히고, 무법칙성을 인정하면서, 심적속성이 인과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설명
6) 반사실적 조건문이 도움이 될까? counter factual
c가 e를 야기한다
-> 만일 c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e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반사실적 조건문을 설명(해설)하는 두 가지 방식
1. 법칙 추론적 접근법
만일 p가 발생 x then q도 발생 x
-> q와 p가 법칙적으로 연결
2. 가능세계 접근법 -> 양상가능성
-> p가 발생하지 않을 가장 가까운 가능세계로 가서 q의 t,f를 판정
ex) 성냥을 켜면, 불이 붙는다.
현실: 성냥을 키지 않은 상태
현실에 가까움 – w1 성냥을 켜고, 성냥이 마른 상태이고 산소가 충분히 있으면, 불이 붙는다.
w2 성냥을 켜고, 성냥이 마른 상태이고 산소가 충분히 있으면, 불이 붙지 않는다.
7) 심적 상태의 외재성
프로그램 :0과 1의 조합 -> 원인 -> 결과
어떤 내용 의미인지는 x
but, 인간의 마음은 인풋-아웃풋에서 내부적 고리
ex) 갈증이 난다. -인과> 물병에 손을 내민다
cf 쌍둥이 지구의 예 : 심적 상태의 내용은 그 마음을 가지는 사람의 내적 상태(물리적 상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님
meaning ain’t in the head
내 신체 속, 머리 속에 있는 신경 상태는 정확히 동일하면서 서로 다른 내용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 but 인과는 머릿속에 있는 물리적(신경계)의 상태에 의해서 이루어짐
-> 행동을 야기하는 심적 상태는 내적인 반면에 심적 상태의 내용은 외적인 부분을 포함
-> 외적 심적 상태의 내용이 어떻게 행동을 야기하는 인과에서 유도할 수 있을까?
내적인 것만으로는 심적 설명 불가
8) 물리적 영역의 인과적 폐쇄성
x가 물리적 사건이고, y가 x의 원인이나 결과라면 y 역시 물리적 사건이어야 함
예외 ) 데카르트의 이원론 : 물질 정신이 각각 실체
문제 : 정신인과 (mental causation)
-> 정신적 영역이 물리적 인과에 하는 역할이 있다.
정신인과는 물리적 영역으로 환원되어 설명해야 함
-> 환원주의: 물리주의자들 중에서도 환원되기 어려운 심적속성이 있음을 인정 ex) 감각질, 믿음의 내용
정신인과의 문제가 해결해야하는 난점들 : 무법칙성, 외재성, 폐쇄성
9) 심신수반과 설명적 배제
기능주의자 : 심적 속성(거의 물리적 속성으로 여겨짐)이 물리적인 것에 의해 실현
2절 수반 의존 최소 물리주의
1.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을 때(무엇의 같음인지는 해명되어야 한다.) 심적으로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반대로 심적으로 동일한 상태(예를 들면 고통)에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차이날 수는 있다.
3.수반(supervenience) :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df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의 심적(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 사실 / 있을 수 없다 – 필연성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4.물리적(A=B) -> 정신적(A=B) 심적 속성을 가진 주체의 물리적 측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심적 현상이 모두 다르고 어떤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같은 event를 다른 조건을 가지고 받아들임 개체/ 타입에서 타입 측면의 접근
5.만일 수반이론이 참이라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맞다고 해도 영혼은 많아야 하나만 존재 영혼: 물리적 속성이 없음 영혼 1의 물리적 속성 : 공집합 영혼 2의 물리적 속성: 공집합 공집합은 물리적 측면 -> 모든 영혼은 동일 *일반적으로 수반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데카르트적(실체이원론 부정)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 혹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
6.반 데카르트 원리 – 순전히 심적인 존재(영혼)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7. cf) 심신결정론 : 물질이 정신을 결정 ->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결정됨 심신 수반론 함축 심신 결정론 혹은 의존론은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내지는 우선성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
8.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 원리, 심물 의존이 최소 물리주의를 규정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최소의 물리주의자라 할 수 있고, 이 원리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하면 물리주의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원리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거나 아니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면서, 물리적이지 않은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더 강한 형태의 환원물리주의도 있으므로, 이를 최소 물리주의라 부른다.
*수반에 관한 기능주의자의 입장
물리적으로 같은 유기체는 심적 속성도 같다
*수반에 관한 물리주의자의 입장
1. M심적속성이 N신경체계에 수반된다면, N은 M의 충분조건(법칙관계)
2. M은 N1 N2 N3등에 의해서 다양하게 실현될 수 있음
3. M은 N1 N2 N3 와 모두 각각 다르다
Q) 수반이 정신인과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즉, 수반이 심신인과를 허용할 만큼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를 가깝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환원만 피할 수 있는가?
1. 상식
통증 ----Cause----> 움츠림
;
; 수반
;
신경상태 M cause
2.문제
1) overdetermination (과잉인과)
부수현상론
고통
; 움츠림
;
신경상태N
문제) 정신인과를 배제
설명적 배제
2)환원주의
통증 = 신경상태 N ----Cause---> 움츠림
문제) 다수 실현가능성
거시 수온의 상승 -----------> 물이 끓음
주전자에 수반 수반
열을 가함
미시 물분자의 활동이 빨라짐----------> 물분자가 공기중에 방출
3)수반적 인과 모델
거시적 차원/ 통증 ---------Cause----------> 움츠림
수반적
수반 야기 수반
미시적 차원/ 신경상태----------Cause--------> 근육수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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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철학 정리
2015년 2학기 "언어 철학" 수업을 정리한 글
1. 소박한 의미론
소박한 의미론은 “언어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다. 이를테면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이 지칭하고 있는 실제 사람을 지시하며, 그것이 바로 그 이름의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의 의미는 개별 물리학자들의 집합과 같다.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자다.”가 참인 이유는 ‘리처드 파인만’이 지시하는 대상이 ‘물리학자’의 원소이기 때문이다.
2. 소박한 의미론의 난점
(1) 동일한 지시체를 지시하면서 의미가 달라보이는 두 표현
김대중 = 2001년 12월의 한국 대통령?
이것을 참으로 받아들인다면
2001년 12월의 한국대통령 = 2002년 1월의 한국대통령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둘의 의미는 명백히 다르다.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은 옳지 못하다.
동일한 지시체를 가진 단어
소박한 의미론 -> 동의어
직관 -> 동의어가 아님
(2)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네모난 삼각형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 셜록 홈즈와 같은 가상(소설 속)의 인물, 용이나 페가수스와 같은 환상속의 대상
(...)은 일각수이다.
(...) 자리엔 singular term이 들어가야함.
일반 명사 ‘유니콘’이 지시하는 대상 -> 공집합
일반 명사 ‘페가수스’가 지시하는 대상 -> 공집합
두 일반 명사가 같은 집합(공집합)을 지시하므로, ‘유니콘’과 ‘페가수스’의 의미는 같아야한다.
그러나 둘의 의미가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부정적 존재 언명의 경우 -> “셜록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 명제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지시체를 결여하는 고유 명사는 의미 역시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소박한 의미론을 수용하여 셜록 홈즈의 의미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표현을 주어로 가지고 있는 문장 역시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라는 표현이 들어가있는 문장은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참인 진리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불투명한 맥락
소박한 의미이론을 따르면 진리치 보존의 법칙과 모순되는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S) 한 문장 내에서 그 문장을 구성하는 한 단어를 동일한 의미의 단어로 대체할 경우, 두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진리치는 동일해야한다.
*진리치 - 명제가 사실과 일치하면 진리치는 참이며,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면 진리치는 거짓이다.
3-1 명제적 태도
<이광수는 ‘흙’의 저자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믿음, 믿지 않음, 희망함, 의심함, 두려워함 등의 태도이다. 이러한 문장을 명제적 태도를 지닌 문장이라 한다.
a) 철이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고 생각한다.
b) 철이는 춘원이 흙의 저자라고 생각한다.
철이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광수의 호가 춘원이라는 사실은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a)는 참이지만, b)는 거짓이 된다. b)의 종속절의 내용은 참이지만 철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진리치는 주절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소박한 의미론에 따르면 ‘이광수’와 ‘춘원’사이의 의미차이는 없다. 그러나 a)와 b)에서 진리치가 변했다는 것은, '이광수‘와 ’춘원‘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2 양상 문맥
양상은 필연성, 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양상문맥이란 필연성 가능성 등의 양상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c) 필연적으로, 9는 7보다 크다.
d) 필연적으로, 행성의 수는 7보다 크다.
행성의 수가 지칭하는 수는 9이므로, 소박한 의미론에서 ‘행성의 수’와 ‘9’의 의미는 동일하다. 하지만 c)는 참인 반면 d)는 거짓이다. 행성의 수는 7보다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성의 수가 7보다 작은 경우를 상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행성의 수가 7보다 큰 것은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명제이고 따라서 d) 명제는 거짓이다.
3. 서술이론 개요
서술이론은 단어의 의미가 지시 대상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유명사의 경우, 관련된 서술의 의미가 곧 그 고유 명사의 의미 결정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이러한 서술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바로 그 단어의 지시체가 된다.
그러나 서술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론마다 이견이 있다. 프레게는 관련된 서술을 그 언어적 표현과 관련된 객관적 서술로 이해하는 반면, 러셀은 주관적 서술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프레게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한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고유명사와 관련되어 거의 무한하게 나올 수 있는 객관적 서술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술이론에서는 인식 주관이 알고 있는 주관적 서술을 관련된 서술로 인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서로 다른 관련된 서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4. 프레게 의미론
(1) 프레게 퍼즐 : 인지적 가치의 문제
동일성 명제(identity statement)의 문제
동일한 지시 대상을 지니면서 의미가 다른 두 단어는 소박한 의미론에 대한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게 된다.
a) 이광수는 이광수이다.
b) 이광수는 춘원이다.
a)와 b)는 각각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둘은 인지적 가치가 다르다.
<1> a)는 a posteriori한 종합판단이다.
<2> b)는 a priori한 분석판단(동어반복)이다.
<3> 만약 a)가 a posteriori한 종합판단이고, b)가 a priori한 분석판단이라면, a)와 b)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If, Then)
<4> a)와 b)의 인지적 가치는 다르다.
<5> 인지적 가치가 다른 두 문장의 의미는 항상 다르다.
<6> a)와 b)의 의미는 다르다.
<7> 만일 두 문장의 의미가 다르면서, 다른 곳은 모두 동일하며 한 곳에서만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두 문장의 차이는 그 단어의 의미차이에서 일어난다.
<8> a)와 b)에서 유일하게 다른 지점은 a)에서 춘원이, b)에서 이광수가 쓰였다는 것이다.
<9> 춘원과 이광수의 의미는 다르다.
<10> 소박한 의미이론은 틀렸다.
소박한 의미이론의 입장에서 반박할만한 부분 <3>: 인지적 가치는 허상이다. <5> : 인지적 가치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7>
(2) 프레게의 해결책
1) 춘원과 이광수는 동의어가 아니다.(지시체는 같지만 뜻이 다름)
2) 의미는 지시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뜻도 의미를 결정한다.)
3) 의미는 뜻(sinn, sense) 과 지시체(Bedeutung, reference)로 구성되며, 이중으로 구분할 수 있다.
(3) 뜻의 의미
1) 고유명사의 ‘뜻’이란 그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인식 주체에게 주어지는 방식이나 양식(mode of presentation)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떤 사람에겍 그것이 보여지는 방식이 다를 수 있듯이, 같은 지시체를 가지는 단어들이라 할지라도, 각 단어가 가지는 ‘주어지는 양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삼각형 세 꼭지점 ABC에서 마주보는 선분의 중점으로 그은 중선을 각각 abc라고 할때 선분 a와 b의 접점은 선분 b와 c의 접점 선분 c와 a의 접접과도 동일하며 그것이 바로 p이다. 따라서 ‘선분 a와 b의 접점’, ‘선분 b와 c의 접점’, ‘선분 c와 a의 접점’이라는 표현(주어지는 양식)은 모두 다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지시체)는 P로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단어가 지니는 뜻(과정)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의 지시체(도달하는 귀착점)은 모두 같을 수 있다.
2)프레게에 의하면 뜻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객관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뜻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파악된 대상(인식적 개념)이 아닌 인간에게 파악되지 않고도 객관적으로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이를 프레게는 망원경의 렌즈에 맺힌 상에 비유를 하고 있다. 밤하늘에 있는 별은 객관적인 대상이며, 그 별이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서 우리의 시신경을 자극하여 머릿속에서 별을 인식하게 된다. 별을 지시체로 비유할 수 있다면, 뜻은 우리가 인식한 머릿속의 별이 아닌, 망원경의 렌즈에 맺혀 누가 그것을 보더라도 그 사람의 시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뜻은 어감, 어조와는 별개의 것이다.
a)나는 어제 밥을 많이 먹고 바로 잠을 잤다.
b)나는 어제 밥을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잠을 잤다.
a)와 b)가 전달하는 말의 어조나 느낌은 다르지만, 이러한 차이가 뜻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프레게의 주장이다. 그 까닭은 a)와 b)의 어조 차이가 진리치 결정에 있어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a)와 b)를 기호화할 경우 어감이나 어조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같은 문장으로 기호화된다. 따라서 기호 논리로 번역했을 때 차이를 갖지 못하는 두 문장은 의미 역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4) 뜻은 지시체를 결정한다. ‘주어지는 양식’에서 알 수 있듯이 뜻이란 관련된 지시체를 찾아가는 나침반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단어의 지시체를 알기 위해선 그 뜻을 만족시키는 대상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 임의의 두 단어 t1, t2가 있을 때, t1과 t2의 뜻이 모두 동일하면, 그 단어들의 지시체도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그 단어의 지시체를 찾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뜻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면 된다.
(4) 개념과 대상 (Concept and Object)
1) 대상 :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체 (individual)
2) 개념 : 함수 - 정의역의 원소 모두가 각각 하나의 치역의 원소와 대응 하는 것
IF f(x) = y and f(x) = z, then y = z
개념 : 대상 ->진릿값으로의 함수
술어와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것
대상- 고유명사의 지시체
개념- 개념단어의 지시체(대상이 input, 진릿값이 output)
( )는 가수이다.
( )안에는 고유명사가 들어가며 이것은 대상을 지칭한다.
<~는 가수이다.>는 개념 단어
개념은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
ex) 모든 사람은 죽는다.
(...)는 죽는다. : 개념 Mx
사람은 대상이 아닌 개념이다.
(...)는 사람이다. : 개념 Hx
(...) : unsaturatedness
원칙적으로 개념은 (...)안에 들어갈 수 없음.
모든 대상 x에 대하여 -> ∀x( )
만일 x가 사람이면, then x는 죽는다. Hx -> Mx
∀x(Hx -> Mx)
모든<- 2차 개념
Hx-> Mx <- 1차 개념
1차 개념 :대상을 input, 진릿값을 output으로 하는 함수
2차 개념: 1차 개념을 input, 진릿값을 output으로 하는 함수
뜻과 지시체
뜻 차원의 함수 -> 언어적 측면
지시 차원의 함수 -> 형이상학적 측면
지시체 (Reference)
고유명사의 지시체 - 그 명사가 지칭하는 개별 대상
개념단어의 지시체 -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개념)
문장의 지시체 - 진리치
뜻 (Sense)
고유 명사의 뜻 - 그 명사의 지시체를 만족시키는(결정하는) 한정 서술들
개념단어의 뜻 -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
한정서술이 달라지기 때문
문장의 뜻 - 명제
Ex)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1. 이광수 (고유명사)
1) 지시체(Reference) - ‘이광수’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실제 대상
2) 뜻(Sense) - ‘이광수’를 만족시키는 한정 서술들
‘이광수’를 만족시키는 한정 서술들(뜻)이 ‘이광수’가 가리키는 지시대상(지시체)을 결정함
: 뜻이 지시체를 결정함
2. ~는 무정의 작가이다 (개념 단어)
1) 지시체(Reference) - 개별 대상들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 (개념)
X -> Y
김건모 ~는 무정의 작가이다. (F)
이광수 ~는 무정의 작가이다. (T)
이순신 ~는 무정의 작가이다. (F)
2) 뜻(Sense) - 개별 대상들로부터 명제로의 함수
X -> Y
김건모 ~는 무정의 작가이다. 김건모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광수 ~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순신 ~는 무정의 작가이다. 이순신은 무정의 작가이다.
3. 이광수는 무정의 작가이다 (문장)
1) 지시체(Reference) - 진리치 (T)
2) 뜻(Sense) - 명제(그 문장이 표현하는 내용)
<1>의미는 뜻과 지시체의 결합이다.
<2>고유명사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지시체)과 한정서술(뜻)의 결합이다.
<3>개념 단어의 의미는 개념-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지시체)와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뜻)의 결합이다.
-> 대상으로부터 명제로의 함수가 대상으로부터 진릿값으로의 함수를 결정한다.
<4>문장의 의미는 진리치(뜻)와 명제(지시체)의 결합이다.
(5) 프레게 퍼즐(동일성 명제)의 해법
“이광수는 이광수이다.”와 “이광수는 춘원이다”의 인지적 가치가 다른 이유
이광수와 춘원은 지시체는 같은 반면에, 뜻(이광수와 춘원이 가지고 있는 지시체를 만족시키는 한정서술들)이 다르기 때문에, 의미에 차이가 발생한다. 예컨대 춘원의 뜻은 이광수의 뜻에는 없는 “이광수의 호”라는 한정서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와 b)의 의미는 다르다.
(6) 지시체를 결여하는 경우
페가수스와 유니콘의 지시체(공집합)가 동일하다 할지라도 의미가 다른 이유
한정서술(뜻)이 다르기 때문 -> 이것은 고유명사의 뜻일 경우에 성립하므로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다.
보다 정확히는,
페가수스와 유니콘은 모두 일반 명사 -> 다시 말해 개념단어로 나타남
(...)은 페가수스다.
(...)은 유니콘이다.
개념단어의 함수
지시체
x -> y
임의의 대상 ~는 페가수스이다. 모든 경우에 F
임의의 대상 ~는 유니콘이다. 모든 경우에 F
페가수스와 유니콘 개념단어의 지시체는 동일함.
그러나
뜻
x -> y
김건모 ~는 페가수스이다. 김건모는 페가수스이다.
이순신 ~는 페가수스이다. 이순신은 페가수스이다.
로빈슨 부인 ~는 페가수스이다. 로빈슨 부인은 페가수스이다.
x -> y
김건모 ~는 유니콘이다. 김건모는 유니콘이다.
이순신 ~는 유니콘이다. 이순신은 유니콘이다.
로빈슨 부인 ~는 유니콘이다. 로빈슨 부인은 유니콘이다.
따라서 개념 단어 ‘유니콘’과 ‘페가수스’는 뜻 함수의 치역이 다르다.(다시 말해 뜻이 다르고, 이는 곧 의미의 차이로 이어진다.)
(7) 불투명한 맥락 - 명제적 태도
a)철수는 이광수가 흙의 저자라는 것을 믿는다.
b)철수는 춘원이 흙의 저자라는 것을 믿는다.
진리치 보존의 법칙을 위배함
a) T
b) F
명제적 태도에 대한 프레게의 해결책
택하지 않은 방식 -> 이광수와 춘원의 뜻이 다르기 때문
이광수는 흙의 저자이다. T
춘원은 흙의 저자이다. T
그러나 진리치는 지시체 차원의 함수이다.
대상 -> 개념(대상으로부터 진리치로의 함수)
x T
y F
z T
프레게에 따르면 진릿값은 지시차원의 문제이므로, 진리치 보존의 법칙을 위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Sense의 차이로 설명해선 안되고, Reference의 차이로 설명해야만 한다.
명제적 태도 문맥 하에서 종속절의 경우
“춘원”의 지시체 -> 춘원의 본래 뜻
“이광수의 지시체 -> 이광수의 본래 뜻
(S*) 한문장에서 지시체가 같은 다른 단어를 대입해도 진릿값은 보존된다.
종속절 안에 있는 지시체는 일반적인 지시체가 아닌 간접적인 지시체(indirect reference)(=일반적인 Sense)이다.
종속절 이광수 - 지시체 : 일반적 sense
뜻 : indirect sense
철수는 [이광수가 춘원임을] 믿는다.
이광수의 지시체 -> 간접적 지시체 -> 일반적 sense
이광수의 뜻 -> 간접적 sense
춘원과 이광수의 지시체는 같지 않음
종속절 내의 지시체는 일반적인 sense이고, 춘원의 sense와 이광수의 sense는 다르기 때문
주절 이광수 - 지시체 : 일반적 reference (곧 대상)
뜻: 일반적 sense (곧 한정서술)
왜 프레게는 indirect sense를 일반적 sense라 하지 않았을까
만일 indirect sense가 일반적 sense라면
주절의 sense -> 일반적 sense (결정)-> 지시체 이광수라는 사람(대상)
종속절의 sense -> 일반적 sense (결정)-> indirect reference(간접적 지시체) - 즉 일반적인 sense를 지시함
같은 sense가 다른 reference를 결정하게 됨.
간접적 sense가 일반적 sense라면 주절에서는 일반적 sense가 대상 결정
종속절에서는 일반적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결정(즉 직접적 sense를 결정)
따라서 간접적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결정(즉 직접적 sense를 결정)해야함.
(8)이러한 명제적 태도의 설명이 지니는 문제
1) indirect sense에 대한 직관적 설명이 없음
2) indirect sense가 indirect reference를 어떻게 결정하는지도 설명이 없음
3) 나는 [철수가 [이광수는 흙의 저자라고] 생각하는지를] 의심한다. -> 좋지못한 무한후퇴를 발생시킴
5. Russel의 의미론
(1) 특징
1) Frege와 유사 : 일상언어의 문법적 구조는 논리적 구조와 전혀 다름
2) Frege 비판 - 반심리주의(sense는 객관적 서술)
프레게와 달리 언어의 의미를 지시만으로 설명하려 시도함
지시는 logical proper name 고유명사/ 한정서술 -> 지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음
유일한 지시표현 : “this + sense data"
3) 형이상학 : logical atomism (논리적 원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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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철학 정리
2018년 1학기 심리 철학 정리
1장 서론
1절 심리철학 개관
0. 이 글은 김재권의 심리철학과 김도식 교수님의 인공지능과 마음 수업을 정리한 글이다. 이 글의 목표가 정리에 국한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비판이나 코멘트를 최소화하기로 한다.
1. 우리는 사물들에 관해 통상 그 사물이 생물이냐 아니냐로 구분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 생물인지 아닌지를 모르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2. 마음이나 심성(mentality)을 가진 것들과 마음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때에도 위에서 말한 바가 똑같이 적용된다.
3. 심성은 심리학적인 이론을 통해 다루어져야 한다.
4. 식물적 영혼에는 이러한 심리학적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감각, 지각, 의식, 기억, 학습, 감정 등 인간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적 상태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동물들도 무엇을 의도하거나 숙고하거나 희망할 수 있을까?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을까?
5. 따라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여기에서부터 다루어져야한다. 이 물음은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첫째, 고등 심리에 있어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둘째, 인간의 마음은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즉,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는 다른 것이 있는가?
6. 고대인들은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플라톤은 영혼을 단순하고 신성하며 불변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영혼은 복잡하고(그러니까 분석될 수 있고) 신성하지 않으며(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변하는 신체와 구별되는 무엇이다. 또한 고대인들은 우리 각자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적이고 지성적이며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의식적, 지성적, 합리적인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7. 데카르트 역시 나는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즉 나는 마음이거나 지성, 또는 이성이다라는 말로 이를 다시 표현하였다. 사유하지만 비연장성의 존재로서의 마음(res cogitans)과 연장하는 신체(res extensa)의 구분.
8. 이로부터 비물질적인 마음과 물질적인 신체를 구분하는 실체 이원론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마음은 신체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종류의 개체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실체 이원론의 난점은 그러한 실체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비물질적인 마음이, 과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그러니까 관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마음과 물질적인 신체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9. 실체는 1)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2) 속성들을 갖고, 3) 다른 실체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독립적으로 존재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탁자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탁자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반면 두께를 가지지 않는 이차원의 표면은 그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대상의 속성이지 실체라고 부를 수는 없다.
10. 그렇다면 마음은 데카르트의 말처럼 실체인가? 심리철학에선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이다. 1) 일단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전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는지 확실치 않다. 2) 이러한 마음이 신체라는 다른 실체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비물리적인 실체가 물리적인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심성이 어떻게 세계에 대해서 인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심적 인과(mental causation)의 문제를 실체이원론은 해결하기 어렵다.
11. 따라서 마음이 독립적인 실체이고 이 마음에 다양한 속성들이 붙는다고 여기기보단, 차라리 마음을 물리적 신체의 속성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심리철학의 주류는 마음이라는 실체가 있음을 부정하려 한다. 따라서 마음은 속성, 역량, 또는 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을 가지고 있음은 특정한 종류의 행동과 기능(감각, 지각, 기억, 학습, 추리, 의식, 행위 등)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마음을 가짐 이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심성, 혹은 심적 상태로 말하는 것이 옳다.
12. 심성은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속성이다. 문을 닫다가 엄지손가락을 찧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움이라는 속성을 예화한다. 존재론적으로 일체의 사물이나 대상은 실체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들은 다양한 속성(property)들은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속성과 관계들을 합쳐 특성(attribute)이라 부른다. 또한 우리는 심적이나 물리적인 사건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는데, 사건은 시간성을 전제하는 반면(즉 변화를 암시한다), 상태는 그렇지 않다. 또 현상이라는 용어를 통해 사건과 상태를 모두 포괄할 수도 있다.
13. 심리철학의 주요 문제는 심성과 심적 속성들에 관한 것이다. 1) 마음을 가진 생물의 개념을 어떻게 명료화할 것인가? 심성의 개념을 정의함으로서 우리는 기계 장치에 마음을 갖게 할 수 있고,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 2) 심적 속성이나 상태, 사건들은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 고통은 감각사건인가? 아니면 동기적 요소도 있는가? 정서는 믿음을 포괄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믿음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3)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심신문제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매우 다름에도 또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칼에 맞는 물리적 사건을 당하지 않는다면, 칼에 맞았다는 고통(심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심적 사건으로부터 물리적 사건이 일어남을 우리는 당연시 여긴다. 우리의 욕구나 믿음에 의해 우리는 행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구나 믿음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물리적 행위를 유발하는가? 따라서 문제는 물리세계 내에서의 마음의 위치 혹은 위상을 정립하는 데에 있다.
2절 수반 의존 최소 물리주의
1.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심적 차이도 없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2.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을 때(무엇의 같음인지는 해명되어야 한다.) 심적으로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반대로 심적으로 동일한 상태(예를 들면 고통)에 있더라도 물리적으로 차이날 수는 있다.
3.수반(supervenience) :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 df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가 물리적 측면에서 모두 같으면 A와 B의 심적(심리적, 정신적) 측면에서도 차이가 없다 – 사실 / 있을 수 없다 – 필연성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4.물리적(A=B) -> 정신적(A=B) 심적 속성을 가진 주체의 물리적 측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심적 현상이 모두 다르고 어떤 이름을 공유하고 있을 뿐 /같은 event를 다른 조건을 가지고 받아들임 개체/ 타입에서 타입 측면의 접근
5.만일 수반이론이 참이라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맞다고 해도 영혼은 많아야 하나만 존재 영혼: 물리적 속성이 없음 영혼 1의 물리적 속성 : 공집합 영혼 2의 물리적 속성: 공집합 공집합은 물리적 측면 -> 모든 영혼은 동일 *일반적으로 수반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반데카르트적(실체이원론 부정)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 혹은 질적으로 구별되는 영혼은 하나만 있을 수 있다.
6.반 데카르트 원리 – 순전히 심적인 존재(영혼)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7. cf) 심신결정론 : 물질이 정신을 결정 ->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에 의해서 결정됨 심신 수반론 함축 심신 결정론 혹은 의존론은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내지는 우선성을 명시적으로 긍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적인 것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
8. 심물 수반, 반-데카르트 원리, 심물 의존이 최소 물리주의를 규정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면 최소의 물리주의자라 할 수 있고, 이 원리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하면 물리주의자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원리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지닌 모든 속성이 물리적 속성이거나 아니면 그 대상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면서, 물리적이지 않은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더 강한 형태의 환원물리주의도 있으므로, 이를 최소 물리주의라 부른다.
3절 심적 현상의 종류
1. 감각을 포함하는 심적 현상들 –고통, 간지러움, 가려움, 잔상, 색점을 봄, 소리를 들음, 매스꺼운 느낌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이거나 질적인 면모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그 상태들이 보여지거나 느껴지는 방식 고통은 고통만이 가지는 독특한 질적 느낌이 있다. 초록색 점을 볼 때는 그 색점이 당신에게 보여지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즉, 초록색으로 보인다. 이러한 질적인 심적 상태를 가리킴에 있어 감각질(qualia)란 표현을 사용한다.
2. 믿음, 소망, 걱정 등의 명제적 태도가 있다. 이러한 명제들은 하나의 사실명제에 대해 주체가 갖고 있는 특정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철수는 중간고사에서 100점을 맞기를 희망하다.”에서 “중간고사에 100점을 맞는다.”는 내용문장(혹은 지향적 상태, 내용적 상태)이고, “철수는 ~을 희망하다.”는 명제적 태도이다. 이 중 내용문장은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감각질이 갖고있는 질적 측면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비전문적으로 심리학적인 사고와 이론화를 시도하는데 이것을 가르켜 통속 심리학이라 부른다. 통속 심리학은 명제 태도를 포함하며, 믿음과 욕구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명제 태도이다. 느낌과 정서라는 총괄적이면서 다소 모호한 심적상태들을 살펴보면 더 분명해지는게, 분노 기쁨 슬픔, 침울, 의기양양, 당황, 후회, 비탄 등의 정서들은 흔히 주체에게 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어떤 정서 상태들은 명제 태도이기도 하다.
3. 의지함이라고 불리는 심적 상태가 있는데 의도함, 결정함, 자원함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상태들 역시 명제 태도이고, 의도와 결정은 내용을 갖는다. 의도를 통해 행위가 결정된다고 흔히 말하며, 행위는 전형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단순한 신체적인 움직임과는 구분되는 것 같다. 신체를 움직임에 있어 우리는 욕구나 소망을 느끼고 그에 따라 행위하기 때문이다.(DBA)
4절 심적인 것의 특징
1. 인식론적 기준 1)직접적 지식 2)사밀성 혹은 일인칭적 특권 3) 오류 불가능성 교정 불가능성
2. 비공간적인 것으로서의 심성 : M이 심적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대상 S가 M을 가진다는 명제는 S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M을 가진 것은 실제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논리적으로 상충되지 않는다. 즉 심성 개념은 심성을 가진 대상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갖는 물체여야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심성을 가지는 모든 대상이 공간적 연장성을 갖는 것은 하나의 우연적 사실일 뿐이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닌 X가 속성 M을 가진다는 명제로부터 X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라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추론되지 않을 경우에만 M은 심적 속성이 된다.
3.마음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 나 : 직접성, 사밀성, 타인 : 행동
4. 심적현상이란?
1) 감각(내용) qualia(감각질) sensation –느낌 (질적 상태) qualitative state
2) 명제적 태도 (propositional attitude) - 믿음 원함 피함 궁금함 의심함
belief + desire = 행동
3) 느낌(feeling), 감정 -> 1,2로 환원할 수 있음
4) 의지, 욕구, 욕망 -> 행동과 연결
5) 성격, 인성
5.qualia / 명제적 태도(의지를 명제화)
감각(내용) sensation –느낌 (질적 상태)
감각을 초래하는 요인(물리적 상태=양적상태)
양적상태로부터 질적 상태로의 이행 환원가능성 여부
re + presentation (기억)
6. mental 의 기준
1) 인식적 기준 : 직접성(direct), 사밀성(private), 오류불가능성(infallible)
2) 비공간성 – 속성으로부터 얻어짐(non-snatial)
3) 지향성(intentionality) - 브렌타노, 존 설, 무엇을 향함 (대상이 실재하지 알아도 됨)
물리적 상태 -> 심리적 상태 (공간성 – 비공간성) 물리적 -> 물리적(인과) 심리적(대응, 부수)
2장 행동주의
1. 등장 배경: 직접성, 사밀성에 대한 반향(관찰 불능) 마음은 주관적이고 관찰이 불가능하다.(비과학적) 으로만 접근가능하다는 비판에 대한 반응 -> 관찰가능(행동을 통해) the problem of other mind 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없다. -> 극단적으로 가면 유아론으로 흐름
2. 타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상 : 타인의 행동(언어 포함) 행동은 객관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상호주관적)
3. 행동이란 무엇인가 – 행동(행위) = df 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람 기관 기계가 하는(do) 것들 – 물리적 행위로 취급
주의 단순한 신체의 움직임이 아니고 한다와 행해지는 것으로 구분함 – 의도가 있느냐의 여부, 로봇이 책상으로 가서 책을 집는 것도 행동으로 포함(?)
4. 행위의 네가지 유형
1) 생리적 반응 : 땀이 남, 침을 흘림, 맥박, 혈압의 증가
2) 신체적 운동 : 팔을 올림, 냉장고 앞으로 감, 공을 던짐
3) 신체운동을 포함하는 행위 : 가계 수표를 씀, 친구를 맞이함, 도서관에서 책빌림
4) 명시적인 신체 행위를 포함하는 행위 : 추론 추측 계산 판단 결정
5. 걷다가 발을 헛딛음 – 걸음(의도) 내가 어떤 것을 기대함 내가 걷는 순간순간마다 어떤 것을 의도하는가? 의식적이지 않은 의도, 로봇도 의식적이지 않게 의도함 어떤 매커니즘으로? 사람의 행동과 로봇의 행동에 차이가 있는가?
6. 행동주의의 3가지 입장
1) 논리 행동주의 (logical behaviorism) : Hempel : 심리 상태를 서술하는 명제의 의미가 신체의 물리적 반응 양식의 서술을 축약 -> 심리상태를 서술하는 명제나 표현은 행동적으로 물리적인 현상으로 번역/정의할 수 있음
2) 존재론적 행동주의 (ontological behaviorism) : 행동과 관련된 사실이나 사건을 넘어서는 심리적 사실이나 사건은 없다.
3) 방법론적 행동주의 ( methodological behaviorism) : 심리적(내적) 상태를 서술하는 표현의 의미는 인정할 수 있지만 심리적(내적)상태의 존재자체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 -> 심리학이 과학으로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
7. 기계는 행위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의 행동가능성과 행동주의 고찰 – 행동을 의도함으로 봄의 의미, 개는 희망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 관점에서 행동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함.
8. 논리 행동주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서술의 의미는 신체의 물리적 반응 양식에 대한 서술의 축약
1)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 실증주의 의미있는 언어의 의미는 적어도 다음 둘 중 하나를 만족시켜야 한다. 1) 경험적 검증가능명제 2) 논리적이나 수학적 증명이 가능할 것
2) hempel의 논증
2-1) 의미 있는 진술의 의미는 검증 가능한 조건들에 의해서 나열되어야 한다.
2-2) 한 진술이 타인과 공유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면 검증가능성 조건은 공적 관찰이 가능해야한다.
2-3) 행동적인 현상만 공적 관찰이 가능하다. 의미있는 심리진술은 공적 관찰이 가능하다. 행동에 대한 검증 조건에 의해 나열되어야 한다.
9. 철이는 치통을 가지고 있다.
1) 철이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뒤틀고 있다.
2) 무슨일이야? 라고 물어보면 치통이 있어 라고 대답한다.
3) 검사결과 충치가 발견되었다.
4) 철이의 혈압, 소화과정, 반응속도 등에 변화가 있다.
5) 철이의 중추신경계에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한다.
10.논리 행동주의의 난점
1) 심리 상태에 대한 의미를 안다는 것이 관련된 물리적 상태(신경, 혈압, 소화)를 알기 요구하지 않는다.
2)심리상태를 일반적으로 야기하는 원인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님
3)복잡한 명제를 믿는 심리 상태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어려움 ex) 원래부터 북미대륙에 있던 표범은 없다고 s는 믿는다.-> 일상적인 행위로 표현이 어려움 – 유일한 대안은 언어적 행위이다. s는 p를 믿는다 -> p가 사실인가에 대해 s는 사실이다라고 신실하게 대답할 것이다. -> 언어행동으로 확인하기 어려움
3-1) ‘신실하게 답해야함’의 조건을 추가할 필요 없음(관찰불가능)
3-2) 질문과 대답에 대한 이해 성향 인과적 경험적
3-3) 사실을 말하기를 원해야한다. 특정 질문에 대한 특정한 대답을 하는 성향을 갖는다는 방식으로 설명
12.심리 상태 – 행동
DBA desire belief action
어떤 사람이 p라는 상태를 원하고 a라는 행동을 통해서 p를 얻을 수 있다면 s는 a를 행할 것이다. 1)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2)거시 측면에서 인과율에 의해서 다음일이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결정되어 있다.
kripke – 고통 = 고정지시어 (공적으로 지시할 경우만) 지시가 의미를 결정
과학자들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탐구가 먼저 있지 않을까? 의지와 세계의 사건은 무관하다.
13. 심리상태와 행위의 상관관계 : “필연성”
심적 상태에 의해서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나오는가? ex) 반가움 ->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나타나지 않음 심적
상태가 행위를 지시한다는 믿음 벽에 못이 박혀있으면 못이 벽을 지시하는가? 그러나 벽은 못과 같이 있을 뿐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줄 경우, 진주목걸이가 돼지를 의미하는가?
q) 고통은 고통과 관련된 행위를 엄밀함축하는가?(필함 – entail)
a entails b: 1) a, b가 개념 a is b가 분석판단 2) a, b가 명제, a가 참이면 b도 반드시 참
q)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가 반드시 행하는 행동이 있는가?
스토아 학자 혹은 스파르타 병사
수정 -> 경향성
그런데 필연적이 아니잖아
s가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은 일정한 행동의 경향을 지닌다. -> 행동으로 관찰가능
ex) 신음소리를 낸다 -> 성대 등의 특정한 신체구조를 가져야함 -> 그 구조를 안가진 생물은 고통을 못느끼는가?
14. 존재론적 행동주의
행동과 관련된 사실 이상의 심리적 사실은 없다(상태 사건)
심적 상태와 행동은 동일
1) 고통은 움츠림과 신음함 (존재론적 행동주의)
2) 고통은 움츠림과 신음함의 원인 (데카르트의 이원론 마음/실체 논리행동주의)
15.pain -> 필연성 -> 행위
고통과 고통행위의 진정한 관계 : 우연적
고통은 c섬유의 작동
ex) 1m 특정 금속의 길이 de re 필연성 ->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내용은 있음
de dicto 필연성이 아님
16. 방법론적 행동주의
심리학이 과학으로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
1) 심리학에서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료는 관찰 가능한 행동 -> 언어관련 행동을 배제
2) 심리학 이론은 심리 주체의 내적 상태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s(자극) -> ㅁ -> r(반응)
3) 언어행위는 “이해” “믿음” “의도” etc의 관찰가능하지 않은 내적요소(내성)
긍정적 측면 - 의식을 심리영역에서 배제
수동적 반응 – 행위는 의도를 어느 정도 지님 –순수한 행위를 분리해내기 어려움
4) 심리학 이론은 심리적 설명을 위해서 내적인 심적 상태를 언급하지 말아야한다.
문제점) 상식 : mental causation 인과 물 <-> 심 인과
-> 내적 심리적 상태를 너무 배제하는 인상 function – 기능/함수 f(x) = 반응
3장 두뇌로서의 마음 : 심신동일론 ( mind – body identity theory)
1 마음과 두뇌(신체)의 상관관계
ex) 대뇌의 손상 : 정신활동에 제한
술을 마심 : 정신을 혼미
마취제의 투임 :통증을 못느끼게 하는 생물체 o에게, 심적상태 m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상응하는 두뇌의 상태 b가 있다.
m의 발생 <-> b의 상태 (필요충분조건)
1) 이러한 상관관계(m<-> b)는 법칙
2) 수반관계 (supervenience) 심적 상태의 차이는 물리적 상태의 차이로부터만 온다 -> 두뇌의 상태가 변하지 않으면 심적상태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2.심신 상관관계의 여러 이론
1) 상호인과작용 –데카르트 mental causation의 문제
2) 예정조화설 – 라이프니츠 -> 공통의 과거 원인 (특정시점) 시계주인이 시간을 동시에 맞추어놓음
3) occasionalism – malblanch -> 공통의 원인 시계가 계속 변화함 오차가 발생할 때마다 수정함 (끊임없는 개입) 시계끼리는 상호작용이 없음
4) 양면이론(double aspect theory) : 스피노자 -> 같은 실체의 서로 다른 양태(측면)
5)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 : 정신현상은 인과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
.... -> A -> B -> C -> D -> .... (물리적 현상)
ma mb mc md
인과(x)
심적상태가 없는 행동은 가능하다. (DB가 없는 A) 그렇다면 행동으로부터 부수되지 않는 심적상태가 가능한가?
6)심신동일론 :심적상태와 물리적 상태가 동일하다(같은 상태이다)
7)창발론 : 설명불가, 심리현상이란 단순한 사실이다. ->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3. 심신동일론에 대한 논증 : JJ C Smart
Simplicity(단순성)
if 심 =신 하나의 실체
논증 : 오컴의 면도날 존재하는 것들은 필요이상으로 상정되어서는 안된다. (형이상학적 주장) 존재자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상정(증명되지 않음) 필요 없는 기호는 제거되어야한다.
1) 형이상학적 측면 -> 단순성 확보
2) 개념 언어적 측면 -> 단순성 확보
3) 무한후퇴를 방지
4. 심신동일론 : 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
5. armstrong의 논증 : 인과를 통해 심적 사건(현상)을 설명 ex) 유전자 ans) 유전자의 개념을 인과적 기능으로 정의 <정의> 생물의 세대적 전이를 인과적으로 책임지는 신체만이 요소 생물학자: 이 기능을 하는 것이 DNA
마찬가지로 고통도 인과적으로 정의하면 -> 생체 조직에서 발생하여 움츠림이나 신음등을 나타나게 하는 내적 요소
생물학자 : c섬유의 작동
반론 1) 고통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맞는가?
2) 다수 실현 가능성
6. 심적 인과
고통= c 섬유의 작동이라고 가정
상식 : 고통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원인
심적 사건 -> 물리적 사건 인과
고통 -> 얼굴을 찡그림(심적 인과)
c섬유 작동 -> 얼굴을 찡그림 (물리적인과)
심적인과가 하는 역할이 없음
따라서 과잉인과가 발생함
-> 해결책 고통이 c섬유 작동이다 (심신동일론)
정신사건의 이면에 물리적 사건이 깔려있다.
인과는 물리적 세계에서 발생하므로 물리적 사건의 원인 역시 물리적 사건이다.
7. 동일성의 의미
1) token identity vs type identity
token ; one and the same (하나의 개체)
type : 같은 종류, 같은 집합
2) 선험적 동일성 vs 후험적 동일성
선험적 동일성 : 5 +7 = 12
후험적 동일성 : 물 = h20
라이프니츠의 법칙
1) if x=y, then 모든 속성 p에 대해서 x가 p를 가지면 y도 p를 갖는다.
2) if x가 p라는 속성을 가지고, y는 p라는 속성을 안가지고 있으면 x=y가 아니다.
8. 개별자 물리주의 vs 유형 물리주의
사건에 대한 두 형이상학적 입장
1) 사건 실체론 : 사건 자체가 대상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 사건은 더 이상 분석되지 않음
2) 속성예화이론 ; 사건 자체는 독립적 위상을 지니지 않음 사건은 대상이 특정시간에 특정 속성을 예화
2)에서는 token과 type의 구분이 중요치 않음 사건이 대상 시간 속성으로 분석되기 때문
1)에 따르면 사건이란 물리적 대상들과 함께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라고 본다. 사건들도 물체들처럼 속성을 가지며 유 아래에 포섭된다. 이에 따르면 개별적인 고통의 발생은 고통의 유 아래에 포섭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 그 사건은 하나의 고통사건임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9. 토큰 물리주의
심적 사건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물리적 사건에도 포섭된다. 즉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을 물리적 속성도 갖는다. 사건 : 심적 속성을 가지면 반드시 심적 속성과 더불어 물리적 속성도 있다 -> 각각의 심적 사건은 곧 물리적 사건이지만 이 두 측면에 법칙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님
개별자 물리주의는 어떤 심적 사건 류 아래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또한 물리적 사건 류 아래에 포섭된다. 또는 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은 또한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진다.
사건의 모든 속성은 사건의 한 유를 정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 개별자 혹은 개별 사건은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발생한 고통처럼 시점이 명시되는 개별적인 사건이다.
사건 개별자는 고통들이나 가려움들과 같은 사건 유형이나 사건 류와 대비된다.
따라서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적유형과 물리적 유형간의 동일성을 필함하지 않는다.
1)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사이의 특별한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 하진 않음)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
2)수반을 함축하지 않음
물리적 차이가 없이는 정신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정신적 차이가 있으면 물리적 차이가 반드시 있다.
현실 ps1 – ms1 ps2 -ms2
가능세계 ps1 –ms2 ps2 -ms3
3) 비환원주의
token물리주의와 관련된 비우
ex 지우개(사건) 검정(ps), 네모(ms)
반면 유형 물리주의는 심적 사건의 유형과 물리적 사건의 유형이 동일하다. ex 고통은 c섬유의 작동
환원주의 환원적 물리주의
10. 유형물리주의
심적 사건 유형과 물리적 사건 유형은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은 동일하다.
1) 색깔을 가지고 있는 모든 대상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2) 색깔과 모양은 동일하다
1)만을 주장하는 것은 토큰, 1)2)를 주장하는 것은 타입이다.
심적 속성을 가진 모든 사건이 물리적 속성을 가지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심적 속성들이 체계적으로 물리적 속성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우연적)
이러한 까닭에 심리-신경 동일론은 일반적으로 유형 물리주의로 해석된다.
유형 물리주의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속성예화이론이다. 하나의 사건이란 한 시점에서 대상이 어떤 속성을 예화하는 것이다. 즉, 고통스러운 시점에서 내가 고통스러움이라는 속성을 예화하는 경우는 하나의 사건이다.
t시점에서 x가 속성 p를 예화하는 사건이 t2시점에서 y가 속성 q를 예화하는 사건과 동일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x가 y와 동일하고 p와 q가 동일하며 t와 t2가 동일하여야 한다.
개별적인 심적 사건의 예로서 조지가 어느 시점에서 고통스러워함 이라는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 사건이 물리적 사건인 조지의 c섬유가 자극된 상태에 있음이라는 사건과 동일하다면,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심적 속성이 c섬유의 자극이라는 물리적 속성과 동일해야 한다. 그래서 속성예화이론에 따르면 개별적 심적사건과 개별적 물리적 사건의 동일성으로부터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귀결되고,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물리주의 사이의 차이가 없게 된다.
11. 심신 동일론에 대한 반론
1) 인식론적 반론 :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는 인지적속성이 다르다.
즉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서는 잘알지만 c섬유의 작동은 잘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제1) s는 x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다
전제2) x=y (t가정)
--------------------------------
결론) s는 y에 대해서 무언가를 안다. f
전제) s는 x에 대해 무언가를 안다
전제) s는 y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x=y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법칙은 know bys 인식적 태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답변) 논증1과 논증2는 타당하지 않다.
s는 물을 안다 t
물은 h2o t
--------------
s는 h2o를 안다 f
2) 위치문제
ps는 공간을 차지
ms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음
ps는 위치를 가지고 ms는 위치를 가지지 않음
위치를 가짐이라는 속성이 ms와 ps를 구분하는 속성
답변) 물리적 속성의 위치 -> 중추신경계
따라서 정신적 속성의 위치도 여기임 -> 응 선결문제의 오류
통증이 느껴지는 곳 혹은 통증이 발생하는 곳이다
-> 응 환상통
3) 심적 상태의 현상적 속성들
심적 상태 = 물리적 상태
심적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느낌(현상)들이 있음
EX) 핀에 찔렸을 때 고통 : Sharp 날카로운 느낌 아픈 느낌
q) 물리적 상태(상응하는) 날카로움과 아픈 느낌을 가지고 있느냐?
ans) aristoteles – 실체 vs 속성
심적 상태가 날카로움이란 속성을 지닌듯한 인상
-> 심적 상태가 그 자체로 어떤 현상적 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q) 그렇다면 우리가 갖는 경험은?
아픔/날카로움
ans) “날카로운 고통” : 앞의 입장과 다른 점 -> 물리적 상태와 동일
오렌지에 대한 색
orangish – yellow – visual – image (x)
visual image -> orangish yellow를 가짐
4) 다른 측면의 현상적 속성
고통 = c섬유의 작동 -> 간지러움 or 가려움 etc
-> qualia의 문제 : 심적 사건이 가지는 느낌은 물리적 사건은 갖지 못함
ans) 심적 사건의 현상적 속성을 배재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서술하려는 시도
smart – s가 왼쪽 손가락에 핀을 찔려서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고 있다.
핀이 s의 왼쪽 손가락을 찌르고 그가 손가락을 잡으며 신음할 때 발생하느 ㄴ것과 같은 일이 s에게 벌어지고 있다.
armstrong – s는 핀이 2의 왼쪽손가락을 찌름에 의해 원인이 되고 그의 손가락을 잡으면서 신음하는 것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다. (인과적 설명)
5)고정지시어로서의 고통
고정지시어 :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언어적 표현(그 대상이 존재하는 가능세계 안에서)
고통 = c섬유의 작동
경험적 (우연적 참, 필연성 x)
=> ‘고통’ 고정지시어, ‘c섬유의 작동’ 고정지시어
<고통=c섬유의 작동> 필연적이어야 함 귀류법
그런데 거짓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음
만일 고통= c섬유의 작동이 우연적 경험적이라면 고통이나 c섬유의 작동은 적어도 하나가 고정지시어가 아니다. 고통 = c섬유의 작동이 아니라는 상상을 할 수 있음
그런데 고통과 c섬유의 작동은 고정지시어임 따라서 고통은 c섬유의 작동이 아니다.
6) 다수실현 가능성 논증
파충류/연체동물들은 c섬유가 없지만 고통을 느낀다
고통 = c섬유의 작동
but 고통 발생 ->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a=고통 c섬유=고통 a=c섬유가 아님 물리적 상태가 다른데 고통이 발생하는 문제
12. 퍼트넘 - 쌍둥이 지구의 예시
서술이론에 대한 반박
퍼트넘이 가정한 서술이론의 전제
: 심리적 상태가 언어의 내포를 결정하며, 언어의 내포가 언어의 외연을 결정한다.
지구 - 물이라고 부르는 무색 무취 갈증 해소등의 물질 -> H2O = 물
쌍지구 - 물이라고 부르는 무색 무취 갈증 해소등의 물질 -> XYZ = 쌍물
H2O와 XYZ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음
지구의 철이가 쌍지구에 가서 쌍물을 보고 물이라고 “저기에 물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가 참이겠는가?
퍼트넘은 참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형이상학적으로 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는 <저기에 물이 있다>인데, 실제로 저기에 있는 것은 쌍물이기 때문에.)
직접 지시론자가 지시하는 지시체의 본질 - 속성, 한정 서술 등의 서술들은 모두 본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류로부터의 논증을 참고할 것.)
철이와 쌍철이가 정확하 같은 심리 상태에 있지만 그들이 물이라고 할 때 지시하는 대상 즉 외연은 다르게 된다.
퍼트남 말하는 지시 관계의 결정
ostensive definition 지적하여 이름을 붙이는 작업
눈에 보이는 것을 찍음
사물과 언어 사이의 관계
사물이 놓여있으며, 거기에 언어로서 명명함
사물 - 언어의 관계 도식
명명
사물 -------- 언어
그 지적된 대상과 sameness relation을 갖는 것이 외연에 포함됨.
의미의 본질 -외연 -> 직접 지시론 : 크립키
- 외연은 4가지 중의 하나이다. : 퍼트넘
직접 지시론 : 실제 대상 -> 의미
인식 -> 의미(서술) -> 대상
심리적 상태 ----> 내포 ----> 외연
서술이론에서 한정서술은 머릿속에 있는 것.
경향성 - 관념론
심리적 상태가 내포를 결정한다는 것은 인식과 언어사이의 관계맺음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실재 - 실제로 존재하는 사태들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태들의 총체
실재와 관련하여, 서술이론과 직접지시론의 차이.
서술이론은 실재와 언어의 관계맺음에 있어,
직접지시론은 실재와 언어의 관계 맺음에 있어, 언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 상황에 있어서도, 지시적 정의/혹은 설명을 통하여 실재가 있음을 전제한다. 이른바 이름을 갖지 않은 사물은 가능하나 이름을 갖지 않는 사물이 가능한가에 대해, 직접 지시론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름을 원초적으로 부여할 수 없는 실재가 존재하는가?
언어노동의 분업.
우리의 언어 사용은 그 대상의 전문가가 지니는 배경지식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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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학기에 정리했던 현대 영미 인식론 글 모음.
1. Epistemology 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⑴ 간단하게 말하면 그저 Theory of Knowledge, 앎에 대한 학문으로 불리는 인식론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형이상학, 가치와 규범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학과 더불어 철학의 세 가지 기본분과 중 하나이다.
2. 인식론자들은 지식 그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혹은 사실)의 내용을 궁금해하지는 않는다. 자연과학의 명제들, 윤리적 명제들, 역사적 사실들과 같은 '구체적 지식'은 과학자나 철학자, 사학자들의 탐구대상이지 인식론자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3. 철학자들은 세계와 존재를 탐구하기 이전의 탐구, 즉 세계와 존재의 바탕이 되는 작업틀이나 구조를 탐구하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자들의 구체적 탐구대상은 바로 앎의 내용 이전의 앎이 성립할 수 있는 틀, 즉 앎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이것은 다시 말해 앎과 모름 사이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4. 말하자면, "어떠한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한 사람(인식주체S)이 무언가(명제 P)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5. 수학시험에서 답을 찍어 문제를 맞춘다해서, 그 사람이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째서? 풀이 과정의 결여, 그가 답을 맞춘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해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명제가 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나온 것이라면 그 명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식을 세우고 풀이과정을 통해 답을 도출해낸다면 우리는 그가 답을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어떤 지식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안다는 것에는 어떤 과정이, 앎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심지어 그 결과물이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나온 결과와 일치한다 할지라도.
6. 따라서 무엇을 안다고 일단 확신한 후에 근거를 찾아해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근거들은 진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식적 정당성은 믿음에 선행해야한다.
7. 따라서 신학의 문제들은 인식의 문제와 전적으로 무관하다.
8. 인식론의 문제는 '인식주체S가 명제 P를 안다'는 답을 도출해내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이다.⑵⑶ 이 알고리즘은 앎의 조건에 관해 명확히 정의된 유한개 절차의 집합들이다. 즉, 인식주체가 받아들인 외부로부터온 모든 명제들의 입력 중, 앎의 조건에 관한 유한개의 절차를 통과한 명제들을 앎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9. 나는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안다'는 것을 일상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앎의 개념을 보다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10. 먼저 다음과 같은 지식들을 보자.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안다."
"나는 축구를 할줄 안다" -> "나는 공놀이를 할줄 안다"
이들을 모두 Knowing-How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지식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발로 페달을 돌리기에", "균형을 잡기에", "손잡이로 방향을 조정하기에"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것일까? 이것은 그러나 어떠어떠한 하나의 문장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11. (그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의 '과정'을 서술하는 여러 '절차'들로 나타낼 수 있다.
12. 따라서 이러한 지식들을 Procedural knowledge(절차적 지식)⑷이라 부를 수 있다.
13. 그런데, 이러한 지식들을 여러 개의 절차로 만든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쓸모가 있는가? 이를테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절차화하여 나에게 알려준다 해서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오히려 그 지식만 가지고서는 자전거를 타기는 커녕 넘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내 감각적 경험을 통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있다.
14. 이러한 지식들은 그것을 머릿속에(혹은 마음속에) 떠올리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특정한 기술이나 능력에 가까운 것이다. 인식체계가 적절한 훈련을 통해 규칙에 따라 hard-wired되어 있다면 그것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릴 필요는 없다.
15. 이렇게보면, 절차적 지식은 인식론자들의 주요한 과제들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⑸ 오히려 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를 구현하고자 하는 Cognitive Science(인지과학)의 영역에서, 절차적 지식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16.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지식들을 보자
"나는 어젯밤에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물이 100℃에서 끓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Thomas Harriot이 1621년에 죽었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모두 Knowing-That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들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내가 자전거를 타고있을때 굳이 자전거와 관련된 생각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이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 내린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서 비가 내린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먼저 그 지식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떠올려야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마음속에서 대상을 그려내야한다.
17 . 따라서, 이러한 지식들을 표상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18. 표상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표상적 지식은 언뜻 보기에 절차적 지식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와 같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특정한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내가 특정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키가 된다 할지라도(이를테면 불이 났을때는 자세를 낮추어 연기를 흡입하지 않아야한다는 지식) 그것은 그 지식을 활용한 결과지, 지식의 내적 본질에 그러한 능력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즉,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만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절차적 지식은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하기 전부터(혹은 깨닫기도 전부터) 스스로 드러날 것이 자명하기에 나로서는 그 지식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지식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활용할 생각을 하고 있던 말던 이미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 내가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러한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증명된다.
19. 표상적 지식을 떠올리는 것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 절차적 지식은 현실속에서 실천되는 행위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20. 그렇다면 절차적 지식을 절차화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1. "나는 레몬을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안다"는 절차적 지식인가? 그렇다면 신경계의 조건 반사역시 절차적 지식으로 볼 수 있는가?
22. 물론 절차화는 일상생활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조건들은 이미 인간에 내재되어있다. 인간은 경험의 반복을 통해 그것을 익힌다. 그렇기에, 절차적 지식을 일련의 명령들로 절차화시키는 작업은 그러한 학습능력이 부재한 인공지능에게 필요한 일이다. 인식적 추론 능력 역시 절차적 지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인식적 추론이 표상적 지식이 아닌 절차적 지식에 속한다는 주장엔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절차적 지식의 예시들은 모두 신체적 행동을 통한 기술이나 능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표상없이 인식적 추론이 가능하단 말인가?'
24. 누군가가 "JFK가 암살당했으며, 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JFK가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그가 <암살당했다>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암살당했다>라는 뜻에는 <죽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죽었다>라는 뜻에는 <현재 살아 있지 않다>라는 뜻이 내포되어있기에, JFK가 암살당했으면서 살아있다는 진술은 모순된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 능력은 "JFK가 암살당했다"는 표상적 지식을 떠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될뿐만 아니라, 그것을 굳이 마음에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인식적으로 hard-wired된 추론규칙으로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지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자연스러운 인식적 추론 능력은 절차적 지식에 속하며, 이러한 절차적 지식(기본적 추론능력)이 표상적 지식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룬다고 볼 수도 있게된다.
25. 이는 참으로, 우리가 논리학을 실제로 배우지 않고서도 그것이 묘사하는 바대로 논리적 추론규칙에 따라 일상적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 이것의 보다 간단한 예는 수학문제의 공식을 암기해서 푸는 것이다.
⑴ 이 명칭의 기원이 된 고대의 인식론과 -epistēmē와 doxa- 인간 주체가 전면으로 나서게된 이후의 Descartes, Locke, Kant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 인식론에 관한 사유는 다른 글에서 다룬다. 적어도 앞으로 전개하는 현대 인식론의 논의에서는 간단한 언급만 하고 넘어갈 것이다.
⑵ 그러나 인식론의 문제를 단순히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에 대한 알고리즘 설계로 국한시킨 것은 The Gettier Problem (Edmund Gettier,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1963)이 등장한 직후부터의 현대 영미 인식론의 논의를 살펴보기위한 서술 트릭일 뿐이다. 이것이 현대 인식론에서 다루는 모든 문제도 아닐뿐더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주요한 문제들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⑶ The Gettier Problem 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앎에 대한 전통적인 분석이 Plato(Menon) 이후로 계속해서 문제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Descartes, Chisholm, Ayer) 이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⑷ 절차적 지식이란 단어는 현대 인식론(김기현,1998)에서 번역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혹은 기술적 지식(김도식, 현대영미인식론의 흐름, 2004), 실천적 지식- Practical Knowledge- (현대 인식론, 이병덕, 2013)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⑸ 이는 인식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지식들이- 선험적 지식, 경험적 지식, 도덕적 지식과 같은 - 모두 마음에 떠올려지는 표상으로서의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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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2) 철이는 자취방에서 라디오를 켜지 않은 상태로 혼자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철이는 라디오가 꺼져 있음을 직접 확인하고 다음의 명제를 믿고 있다.
(b) 지금 내 방에는 라디오가 꺼져 있다.
철이는 지금 sns를 사용할 기기나 컴퓨터 혹은 전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찾아올 사람도 없다. 한편 그 시각에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노래가 방송되고 있었다. 물론 철이는 라디오를 켜고 있지 않기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k2) S가 P를 안다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은
1)P가 참이고 2)S가 P를 믿으며 3) S가 P를 믿는 것에 인식적 정당성을 가지고
4)P에 대한 S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상쇄자가 없다.
단, D는 P에 대한 S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상쇄자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1) D가 참이고
2) 만일 S가 D를 정당하게 믿는다면, P에 대한 S의 믿음은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
즉, 예2)는 무상쇄자 접근방식에 대한 반례가 되는가?
답
S가 가지고 있는 지식 P
Iff) (1) P가 참이고, (2) S가 P를 믿으며, (3) S가 P를 믿는 것에 대해 인식적 정당성을 가지고
(4) P에 대한 S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상쇄자 D가 없다.
D는 P에 대한 S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상쇄자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1) D가 참이고
2) 만일 S가 D를 정당하게 믿는다면, P에 대한 S의 믿음은 더 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
명제(b)에 대해서 철이는 분명하게 믿고 있고,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인식적 정당성도 확보했으므로 철이는 명제(b)에 대해서 정당화된 믿음을 지니고 있다.
명제(b)가 참이라면 이것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므로 1,2,3번 조건에 모두 부합한다.
(4) 철이가 명제(b)를 알기 위해서는 명제(b)에 대한 철이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상쇄자가 존재하지 않아야한다.
철이의 믿음의 정당성- 철이가 라디오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P: 라디오가 꺼져 있다.
E: 철이의 감각적 경험
D: 앞집에 살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던 순이가 맞은편 문에서도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가 들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철이의 방에 라디오가 켜져 있다고 철이 친구에게 카톡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철이는 sns를 사용할 기기나 컴퓨터 혹은 전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찾아올 사람도 없다.
또한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노래가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라디오를 켜고 있지 않기에 모르고 있다. - 즉, 순이의 증언과 인식적으로 격리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철이가 순이가 철이 친구에게 하는 증언을 들었더라면(이를테면, 철이 친구가 순이에게서 받은 카톡 메세지를 보았더라면), 철이는 '혹시 라디오가 켜져 있지 않았나'하고 믿을 수 있다. - 즉, 상쇄자로서 기능한다.(상쇄자는 인식주체가 직접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치킨 배달부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치킨을 배달하고 있었고, 그가 마침 철이의 문앞을 지나갈 때 순이가 그 노랫소리를 들었기에 철이의 자취방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인식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으므로, 순이의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하며, 그로부터 나온 상쇄자 역시 1) 참이고, 2)만일 철이가 이 상쇄자를 믿는다면 명제(b)에 대한 믿음이 더이상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기에 상쇄자로서의 조건을 만족한다.
어쩌면 철이가 방안에서 직접 라디오가 꺼져 있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상쇄자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 2) 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있지않은 내용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철이가 잠시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갔고 위에 있었던 일들이 모두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라면? 그리고 철이가 담배를 태우는 동안 우연히 만난 철이 친구가 (그 친구도 같은 건물에 산다고 가정하자) 방금 있었던 순이의 증언을 철이에게 말했더라면? 그러면 철이는 이러한 상쇄자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라디오가 꺼져 있었다는 자신의 감각적 경험을 의심하지 않을까? 그래서 철이가 "어 라디오를 끈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명제 (b)에 대한 철이의 믿음이 더이상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철이 자취방에는 라디오가 꺼져있었고, 철이의 믿음은 전통적인 앎의 정의에 따르면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므로 직관적으로 볼 때 앎이라 보기에 무리가 없는 믿음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앎이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k2)의 지식분석에 따르면 앎이 아니게 되어
T Iff) F가 되버리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직접 경험한 감각적 경험도 지식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예2)는 (k2)에 대한 반례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철이가 상쇄자 D가 거짓이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D가 거짓이라는 믿음에 대해 아무런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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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희망할 수 있는가? -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 : 생각함의 선험적 틀에 관하여 (0) | 2018.12.26 |
2018년 1학기 "인공지능과 마음" 수업에서 제출한 레포트
개는 희망할 수 있는가? -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
: 생각함의 선험적 틀에 관하여
【주제분류】 심리철학, 언어철학, 비트겐슈타인
【주요어】 인공지능, 생각함, 의도함, 언어
【요약문】 기계(인공지능)와 인간은 더 이상 차이가 없는가? 오늘날 인공지능의 끝없는 발전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과 기계가 차별화되는 영역은 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문학, 번역, 작곡, 바둑 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계는 인간을 거의 따라잡았거나,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역할은 과학에게 있지만, 과학이 인공지능을 최종적으로 구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위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의 “의미”는 여전히 명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능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계”로, 특히 “생각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계”로 정의한다. 그런데 생각함, 특히 고등차원의 생각함-추리, 계산, 의도, 희망 등은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위의 정의를 우리가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연구에 선행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생각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성찰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철학, 특히 심리철학에서 다뤄온 문제이다.
따라서, 본고는 “인간에게 생각함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함으로써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크게 두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첫째로, 생각함의 의미를 명료화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는 언어 철학의 관점에서 위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가능성을 모색하기 이전에, 그러한 문제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를 먼저 분석해봐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작업의 구체적 방법으로 생각함의 선험적 틀을 분석한다. 인식이란 경험이라는 input을 받아들여 그대로 output으로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틀을 통해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함은 이러한 선험적 틀 위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따라서 인공지능의 구현가능성 역시 “이러한 선험적 틀은 설계 가능한 것인가”를 중심으로 사유해봐야 한다.
최종적으로 본고는 하나의 언어를 숙달한 존재만이 생각하거나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인공지능이 공학적 설계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인공지능을 통해 구현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목차
1. 서론 – 인공지능 연구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 의미의 명료화
2. 본론
2.1. 인공지능과 생각함 – 튜링 테스트와 중국어 방 논증을 중심으로
2.2. 생각함의 선험적 틀 –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와 『확실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2.3. 언어 놀이와 삶의 형식 : 생각함이란 언어를 숙달한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3. 결론 – 마음의 환원불가능성 - 자연과학의 물음들과 철학의 역할
“우리는 동물이 화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서론. 인공지능 연구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 의미의 명료화
기계(인공지능)와 인간은 더 이상 차이가 없는가? 오늘날 인공지능의 끝없는 발전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과 기계가 차별화되는 영역은 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문학, 번역, 작곡, 바둑 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계는 인간을 거의 따라잡았거나,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에 등장하여 바둑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알파고(Alpha Go)는 계산과 추리가 필요로 하는 게임 중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여겨졌던 바둑마저도, 기계가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인간의 활동에 있어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예술마저도,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나, 번역문, 교향곡 등이 속속들이 발표되면서 기계가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구현하는 역할은 과학에게 있지만, 과학이 인공지능을 최종적으로 구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위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의 “의미”는 여전히 명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의미를 일차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능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계”로, 특히 “생각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계”로 정의한다. 그런데 생각함, 특히 고등 차원의 생각함-추리, 계산, 의도, 희망 등은 오랜 시간동안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위의 정의를 우리가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연구에 선행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 생각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성찰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적으로 철학, 특히 심리철학에서 다뤄온 문제이다. 우리가 생각함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학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것을 알아볼 수 있을까? 2
따라서 인공지능의 의미에 대해 한번 고찰해보자. 우리는 기계를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을 대신 수행하는 도구로, 혹은 인간이 수행할 수 없는 일까지 수행하는 도구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인공지능도 기계이므로, 인공지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까지 수행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는 인공지능에게만 들어맞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이자면, 망치나 나사, 끌 같은 도구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나,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도구이고, 증기기관이나 컴퓨터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 더 정의를 좁혀보자면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 중에서도, 설계도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보다 고차원적인 도구를 기계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우리는 증기기관이나 컴퓨터 등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증기기관이나 컴퓨터와도 명백히 다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증기기관, 컴퓨터의 차이는 수행할 수 있는 일의 차이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인공지능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공지능들은 각각의 부여받은 목적에 따라 상이한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본질은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가짓수에 있지는 않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소크라테스 식으로 그 모든 인공지능들을 인공지능이라 부를 수 있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데에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인공지능은 인간의 마음, 혹은 지능을 구현하고자 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음으로 볼 것이냐, 혹은 지능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인공지능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지능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마음의 소관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테면 지능이 없거나 거의 없는 물고기나 가재 같은 생물들도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인간의 마음을 구현하는 기계라고 정의한다면, 사고, 추리, 계산, 의도, 고통을 느낌, 희망함 등의 모든 인간 마음의 능력들을 포괄해야할 것이다. 반대로, 인공지능을 마음 중에 지능만을 구현하는 기계라고 본다면, 마음의 어느 부분 까지를 지능으로 보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지능이 없는 생물체도 가능하지만, 그러한 고통을 정의하고, 적극적으로 회피하거나 관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인간이 지능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니 말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인공지능을 인간의 마음을 구현하려는 기계로 정의하고, 본고에서는 그 중 지능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 다시 말해, 고통을 느낌과 같은 마음의 역할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다는 뜻이다. 3
그런데 인공지능이 구현하려는 것을 생각함으로 한정한다 할지라도, 생각함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를테면 표상함이나, 의도함, 희망하거나 기대함, 논리적 추론, 수학적 계산 등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인간에게 생각함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함으로써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한다. 이를 위해 본고는 크게 두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첫째로, 생각함의 의미를 명료화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는 언어 철학의 관점에서 위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가능성을 모색하기 이전에, 그러한 문제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를 먼저 분석해봐야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작업의 구체적 방법으로 생각함의 선험적 틀을 분석한다. 인식이란 경험이라는 input을 받아들여 그대로 output으로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틀을 통해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함은 이러한 선험적 틀 위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따라서 인공지능의 구현가능성 역시 “이러한 선험적 틀은 설계 가능한 것인가”를 중심으로 사유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 연구에 있어 주목할 점은 우리가 앞서 정의한 것처럼, 그것이 설계된 기계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마음을 구현하려는 기계라고 정의하였으므로,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마음이 설계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보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물리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철학사적으로 영혼이나 정신과 동일시되기도 했었던 마음은, 흔히 물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인공 지능을 구현함에 있어 심리철학에서 해결해야할 가장 핵심적인 물음은, “인공 지능을 통해 구현하려는 인간의 마음이 물리적으로 환원 가능한 종류의 것인가?”라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인지가 1차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물리적 차원에서 설계한 기계가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더라도, 어떠한 과정을 통해 물리적 차원으로부터 “생각함”이란 물리적이지 않은 차원이 도출될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그것을 “생각함”이라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의 정당화는 외견상 유사성으로서만(이를테면 행동함) 파악될 수 있는 것일 텐데, 행동으로부터 생각하고 있음이 나올 수 없음은 존 설(John Searle)이 그의 중국어 방 논증에서 보여준 바 있다.
우리는 이것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철학적 명료화를 통해 다루고자 한다. 철학적 명료화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어떤 하나의 단일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원초적 환원 불가능성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우리의 문제가 사실은 성립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음을 보이는 것이다.
1장 인공지능과 생각함 – 튜링 테스트와 중국어 방 논증을 중심으로
1절 The Modern Prometheus,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인공 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무엇인가? 튜링(Alan Turing)에 따르면 그것은 바퀴가 달린 기계에 바퀴를 떼고 발을 붙이는 것이다. 튜링은 이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표현하여 튜링 테스트를 창안했는데, 이것은 “기계랑 대화하는 인간이, 상대방을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4느끼게 된다면, 그 기계는 지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조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튜링이 살던 시대와 비교해본다면, 우리가 오늘날 거의 모든 소비행위에서 기계랑 대화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기계랑 대화를 하지, 종업원이랑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길을 찾을 때나, 웹 검색을 할 때나, 심지어는 위로를 받을 때조차도 우리는 기계랑 대화함을 더 이상 신기하거나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단적인 사고 실험으로 보여준 작품이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가 주연한 영화 《Her》이다. 5
이 영화에서 기계는 단순히 상황적 맥락을 파악해 대화를 예측하는 수준을 벗어나, 심지어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는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이 영화에서처럼 기계가 정말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인간이랑 더 이상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공지능 연구가 최종적으로 꿈꾸고 있는 이상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설계한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예측하며, 희망할 수 있는, 의도를 갖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또 다른 인간을 창조하는 것. 우리는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학자들을 Mary Shelley가 이름 붙였던 것처럼 The Modern Prometheus로, 제 2의 Frankenstein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인공 지능을 만들려고 하자마자 곧바로 발생하는 문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튜링테스트의 조악함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튜링이 테스트에서 가정했던, 기계가 인간이랑 대화하는 상황은 오늘날 지나칠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깜빡 속고, 지금 대화하는 저 기계가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설령 그러한 착각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해서 우리가 저 기계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6
2절 ‘대화함’로는 기계의 생각함이 해명되지 않는다.
튜링테스트는 인간과 기계가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으면 그것이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다시 말해, 대화함이 생각함의 기준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제 그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모방해서, 즉,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맥락으로부터 단어를 조합하는 것을 그저 분석해서, 혹은 배워서, 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기계의 대화가 “분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input이라는 명령어를 넣을 때 output을 산출하는,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보다 정교한 형태의 자판기라는 것은 분명해도, 내가 동전을 넣을 때마다 원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즉, 내가 평소에 선호하는 음료수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 자판기가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판기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이는 직관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튜링테스트의 적절한 반례가 된다. 대화로부터 “생각함”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무튼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튜링테스트를 좀 더 정교화해볼 수 있다.
기계가 생각하는 기계로 인정받기 위한 기준 iff)는 7
1) 인간과의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야하며,
2) 대화가 기존의 대화를 분석하여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화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대화의 본질에 대해 아직 정의내리지 않았기에, 이러한 기계에게서 무엇이 결여되어있는지에 대해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튜링테스트가 실질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거기에는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은 ‘생각함’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대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 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필요한 그것에 “생각함”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요소가 결여된 대화는 그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엄밀히 말하면 두 대화자 사이의 독백이라고 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가 생각함의 필요조건이 아니고, 오히려 생각함이 대화의 필요조건이며 대화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규정해야만 기계의 “생각함”이 드러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함은 이 “올바로 이루어짐”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므로, 생각함을 규정하는 데 있어 대화함을 넣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대화를 배운다.”고 표현해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스스로 배울 수 있으려면, “생각함”으로서 배워야하고, 이것은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배움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구현하려하는 그것(즉, 생각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직 서명도 되지 않은 수표를 사용하려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함이 대화랑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는 아직 몰라도, 대화함 그 자체는 생각함으로부터, 혹은 생각함과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계의 생각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기계의 대화함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게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해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함으로부터 대화함이 나온다면, 우리는 결국 생각함이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대화함과 생각함이 그저 같이 놓여있는 것이라면, 대화함으로서는 생각함의 문제를 건드릴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튜링테스트에 대해 이와 유사한 반박을 가한 철학자가 위에서 언급했던 존 설(John Searle)이다. 존 설은 그가 제시한 중국어 방 논변에서,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 기계는 심성과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시도한다. 논증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일련의 기호들을 받으면 다른 기호들로 변형시켜 산출하는 규칙들이 작동하는 중국어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기호들은 중국어 표현이고, 규칙들은 의미에 따라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적용된다. 방은 중국어 표현들을 받으면 그에 적절한(마치 중국어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대답들을 산출한다. 방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모르지만 이러한 형식적 규칙과 “통사론”에 따라 기호를 조작할 뿐이다. 그러나 밖에서 관찰했을 경우엔, 중국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랑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중국어 방에 들어간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러한 상황엔 중국어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의미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설의 반론의 핵심이다. 8 따라서 튜링테스트는 기계의 “생각함”을 증명하기에 부적절하며, 이에 따라 다음 장에서는 “생각함”의 의미를 명료화함으로써 “생각함”이 선험적 틀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를 보이고자 한다. 9
2장 생각함의 선험적 틀 –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1절 생각함의 의미에 대하여 – 표상함과 희망함을 중심으로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각함의 의미는 다의적이다. 첫 번째로, 생각함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표상함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의 표상함이란 일차적으로 외부의 경험을 인식 주체가 직관을 통해 받아들여 산출해낸 인식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함은 위에 언급한 자판기의 비유에서처럼 단순한 input과 output의 관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모든 인식을 얻지만, “감각 재료들 그 자체는 경험을 통해 수시로 수용되는 ‘잡다’한 것으로, 이것이 정리 정돈되어 하나의 주어[실체] 표상에 결합될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사물이 인식된다.” 10 그러나 이 잡다를 정리 정돈하는 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감성과 지성의 형식들로서 선험적(a priori)인 것이다. 따라서 잡다한 감각재료들은 선험적인 표상들에 의해 정돈되고 종합됨으로써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 11 즉, 경험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인식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생각함, 즉, 사고(思考)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인공지능의 과제란 경험에 앞서 경험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선험적인 틀을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경우, 그러한 선험적 틀이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것인가에 그 방점이 찍히게 될 것이다. 12
두 번째로 우리는 생각함을 희망함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동물이 화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동물이 희망한다고 상상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동물이 희망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화나 동화에서 충분히 희망하는 동물을 그려낼 수 있다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이나 무생물이 희망하는 상상을 할 때 다만 그것들을 의인화시켜서(사람으로 만들어서) 상상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희망하는 일을 우리는 믿을 수 없을뿐더러,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왜 그들의 행위에 “희망함”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단어도 인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동물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냐는 반론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고통의 경우 인간과 다른 동물은 동일한 선험적 틀 위에 서있으며, 다만 희망함에 대해서는 인간만이 같은 선험적 틀을 공유한다고 대답하겠다. “어떤 개념이 사람의 글씨체가 지닌 특징에 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글을 적지 않는 존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13 14
따라서 본고가 주장하는 선험적 틀은 칸트와는 달리 의미론적 틀이다. 그것은 언어의 의미가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는 선험적 틀이며, 또한 그것은 실재에 앞서 자의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2절 언어의 자의성, 즉물적 정의의 문제
위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본고가 품고 있는 언어철학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본고의 언어철학을 드러내고자 한다. 현대의 언어철학은 크게 두 가지 조류로 나눠진다. 이름의 의미는 그 이름에 덧붙여진 기술어구의 연언이라는 기술이론과,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라는 직접지시이론이 그것이다. 이 두 이론은 모두 설명에 있어 장점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에 대해 논하는 것은 본고의 범위를 벗어남으로 다루지 않겠다. 또한 본고는 저 질문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이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름의 의미를 무엇인가?”를 우리는 “아이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는가?”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이름의 의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어른은 이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고, 이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곧,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이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는가?”라는 문제를 나는 즉물적 정의의 문제라 부른다. 왜냐하면 아이에게 어떠한 이름을 가르쳐줄 때에는 “이것은 책상이고, 저것은 의자야” 하는 식으로 사물의 예를 가리키면서 이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흔히 언어를 실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실재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혹은 실재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실재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언어관은 우리의 상식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간단히 말해, 우리에게 언어가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는 실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실재가 언어에 선행하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은 고전적인 언어철학에서부터, 크립키(Saul Kripke)의 직접 지시이론으로 대표되는 현대적 버전의 언어철학에서까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누군가 이제,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언어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에게 그 사물의 이름을 가리켜주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는 어린아이에게 ‘빨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그렇다면 그가 어린아이에게 온통 빨간색 물감으로 칠해져 있는 도화지 한 장을 보여주고, 그 밑에 빨강이라는 명찰을 붙여줌으로써 아이는 ‘빨강’의 의미를 알게 되는가? 그러나 여기서 아이가 받은 ‘빨강’이라는 이름 하나로는, 아이는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다. 이것을 과연 지시적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가 준 ‘빨강’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A’라는 문자로 대체해도 좋을 텐데, 어떤 이가 나에게 위와 같은 도화지를 보여주면서 “이것의 이름은 ‘A’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그 이름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A’라는 이름은 도화지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도화지의 네모난 모양을 일컫는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내가 그가 보여준 그림을 보고선 떠올린 심상에 대한 이름인가? 나는 그가 취한 지시(무언가를 가리키고, 그것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그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빨강”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방식이지, 이름이라는 텅 빈 기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29. 어쩌면 누군가는 ”둘“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만 지칭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수(數)는 둘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여기서 “수”라는 낱말은 우리가 언어에서, 문법에서 어떤 자리를 그 낱말에 부여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칭적 정의를 이해하기 전에 “수”라는 낱말이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정의에서 “수”라는 낱말은 실제로 이 자리- 우리가 그 낱말을 두는 위치-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색깔은 이러이러하게 불린다.”, “이 길이는 이러이러하게 불린다.” 등으로 말함으로써 그러한 오해를 막을 수 있다. (중략) 자 우리는 바로 이 낱말들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낱말들을 통해서 설명하라! 그리고 이 사슬에서 마지막 설명은 어떤가? “ 17
문법이란, 그 이름이 문장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고, 어떤 규칙을 따르는지에 대한 일련의 사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름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은 우리가 실제 대상을 지시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논리적인 제한으로 인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법을 따르지 않았을 때에 생기는 문제는 단지 대화의 상대방과 우리 자신조차도 그 문장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알지 못하는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도로 위에 서있는 이정표의 규칙을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혼란은 이제 그 도로를 어떻게 주행해야할 지 알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빨강’에 대한 지시적 정의를 사용하기 위해서, 나는 아이에게 “지금부터 ‘색깔의 이름’에 대해 알려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파랑색을 대조해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빨강’이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설명을 위해 사용한 “색깔의 이름”은 문법에 관한 설명이며, 어떤 기호의 선험적 문법이 그 기호 자체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장기에 있어 왕의 의미를 배울 적에, 그 장기의 전체적인 규칙과 다른 장기 말들의 복합적인 역할 수행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기 말에서의 ‘왕’의 의미는 지시체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들과의 상대적인 관계로부터 규정된다. 즉, 지시는 이 상황에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단지 지시만으로는, 우리가 받은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떤 규칙에 따라야할 지에 대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법은 언어가 실체와 관계를 맺기 이전에 준비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이 실재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립적으로 존립해있다. 다시 말해, 문법의 규칙은 언어가 실재를 그려내기 전에 미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논리적 동일성을 가지고 실재를 (거울처럼) 반영하지 않는다.
a) 따라서 기호와 사물 간에 논리적 동일성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말과 사물 간에 존립하는 모종의 내적, 논리적 관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과 사물 간에 그러한 관계의 존립은 모종의 근본적인 -내적인- 동일성의 존립이다.
b) 논리 문법은 [이른바] 실재에게 자신을 해명하지 않는다. 논리 문법적 규칙들은 의미를 비로소 결정(bestimmen)하기 때문에, 혹은 구성(konstituieren)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른바] 의미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논리 문법은 자의적이다. 18
따라서 문법과 실재는 내적으로 동일하다. 문법은 그것이 성립되는 순간 곧바로, 실재의 무엇임(Was)에 대해 말하지, 실재의 어떠함(Wie)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에 대한 근거가 되며, 인식 주체에 있어서는 선험적 틀로 작용한다.
3장 언어 놀이와 삶의 형식 : 생각함이란 언어를 숙달한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앞서 본고 2장 2절의 논의에서 언어가 실재에 선행하는 선험적 틀이라고 주장하였으므로, “문법이나 규칙들은 실재나 자연의 사실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험적 틀이 실재나 자연의 사실들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물리적 차원에서 설계하는 것, 다시 말해,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19
그렇다면 이 선험적 틀이란 물리적 차원에서 분석할 수 없다는 뜻인가? 그 틀이 언어의 의미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뇌 활동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면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본고는 이러한 일이 세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로, 언어의 의미는 문맥 속에서만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로부터 생각함이 구성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구현한다는 것은 문맥을 구현한다는 것을 뜻할 텐데, 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생각함 이전에 선행되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구현에 있어서는 적어도 설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설계 이상의 것에는 과학적 탐구의 기반이 되는 단일한 설명을 제시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기초적인 설계로부터의 창발이 아닌, 전체적인 마음의 설계도를 얻는 일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위에서 살펴본 문맥이란 인간이 정당화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는 사소한 자연사의 영역에 속한다. 자연수열의 덧셈이라던가, 원초적 신화의 유사성, 상징의 부여, 예술의 창조 등은 인간이기에 그렇게 행하는 것일 뿐 다른 정당화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공지능이 어떤 삶의 흐름을 갖게 될 것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인공지능은 그 자신의 고유한 삶의 흐름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왜 인공지능의 특정한 행위를 인간적 의미의 “생각함”에 귀속시켜야 할까? 인공지능이 도구를 벗어난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의 특정한 존재방식에 더 이상 “생각함”이라는 능력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함이라는 현상들은 인간의 복잡한 삶의 형식이 변형된 것들이다. 인간의 삶의 형식이 언어 속에서 구현될 때에만 생각함이라는 단어는 의미를 갖게 된다. 20
마지막으로, 이러한 언어적 틀의 경계는 확고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틀은 인간의 인식에 있어 선험적 조건이지만, 반대로 인간의 구체적 행위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고, 변화한다. 인식의 틀로서 존재하는 언어적 명제들은 문화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이를테면,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히려 나의 믿음의 출발점을 이루는 전체 이미지의 일부이다.’(OC: 209) 이것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것이 우리에게 확고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유통에서 배제된다. 그것은 말하자면 죽은 궤도이다.’(OC:210)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통에서 배제된 것, 죽은 궤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우리 연구들에 형식을 주며, 우리의 모든 고찰의 골격에 속해 있다.‘(OC: 211)” 따라서 이러한 주체와 언어 간의 상호작용, 역사와 언어와의 상호 작용은 또한 인공지능 설계에 있어 난점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가 물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인공지능 연구가 구현하려하는 “생각함의” 영역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의 본질을 “물리적 표지인 글자와 소리로 이루어져 있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데, 이러한 방식으로는 시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의 기능만 그대로 복제해 온다고 해도 설이 제시했던 중국어 방 논증의 핵심- 형식적 규칙과 통사론의 모방만으로는 적절한 의미론을 함축하지 못한다.- 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21
결론 마음의 환원불가능성 : 자연과학의 물음들과 철학의 역할
본고는 인공지능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본고가 글의 서론에서 제시했던 인공지능의 정의 – 인간의 마음을 구현하도록 설계된 기계라는 정의를 부합하면서 “생각함”을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함은 물리적 차원에서 설계 될 수 없는 것,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라는 상자에 대해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현대과학의 집요한 욕망은 특정한 세계관이 모든 것을 설명해낼 수 있다는 과학의 진리성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현대의 어떤 다른 학문들보다도 뛰어난 설명을 제시해준다는 믿음이 현대의 모든 지배적 사유에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을 순전히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학문의 대상이, 탐구라는 과정을 통해 곧바로 학문의 지식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력의 요구, 인정, 타자와의 긴장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생산되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리를 대상과 판단 사이의 일치로 여기는, 현대 학문의 이념 역시 결코 확고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순수한 지식은 허상이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학문의 대상과 지식의 조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학문의 대상이 과연 지식의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역설적으로 그러한 조건이 탐구 방향을 이미 결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는 오늘날 학문의 엄밀함으로서 요구되는 가치중립의 태도가, 역설적으로 하나의 가치를 지향함으로써 현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마음을 탈-신비화하는 과학과 물리주의의 경향들이 결코 객관성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가치와 이념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모든 지배적 가치는 진보라는 단어 속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철학은 결코 온전히 평가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가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라면 여기에 철학이 오늘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한 암시가- 비판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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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생각” 대신에 “생각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는 생각의 능동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표현이다. 기계는 보통 input이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output이라는 결과를 “산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생각할 수 있는 기계라면, 그것은 인간이 내리는 수동적인 명령어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보다 능동적으로, 스스로 받아들인 것을 구성하여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본고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까지 인공지능이 구현하고자 하는 목표로 설정하겠다.(희망함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동명사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 한겨레, 《물고기도 고통에 빠져 모르핀을 찾는다.》, 2018 http://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827729.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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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id p.521 [본문으로]
- 연언이란, 논리적 상항의 하나로서 “그리고”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임마누엘 칸트의 의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의 저자”와 같이 기술 어구를 연언화하여 표현할 수 있다. [본문으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청색책, 갈색책》, 번역 이영철, 책세상, 2006, p.15 [본문으로]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9, 번역 이승종, 아카넷, 대우고전총서 041, 2016, p. 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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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건, 《비트겐슈타인과 선험적 관념론》, 철학논집 제31집 Sogang Journal of Philosophy Vol. 31, 2012, pp.119-153 p. 13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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