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牧會에 있어서 說敎의 向方 -강해설교를 중심으로
李 德 休
-차례-
Ⅰ. 들어가는 말 /2
1. 복음의 전달 /2
2. 전달자의 자질 /3
Ⅱ. 목회에 있어서 설교 /4
1. 설교의 구조 /5
2. 설교의 형식과 내용 /6
Ⅲ. 현대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7
1. 강해설교란 무엇인가? /7
2. 설교문의 작성 /8
3. 설교의 실제 /12
Ⅳ. 패러다임의 전환은 왜 필요한가? /14
1. 들려지는 설교를 위하여 /14
2. 전통적인 설교의 패러다임 /15
3.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 /16
4. 맺음 /16
Ⅴ. 제언 -결론을 대신하여 /18
* 주요 참고문헌 /
2000년 4월 27일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97동기회
이하의 글은 내가 신대원 학우들과 함께 목회자로서 길을 가는 마당에 목회의 알파요 오메가인 설교에 대한 방법과 원고작성의 방법을 함께 숙고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작성하였다.
이 내용에 함의된 것이 모든 목회자들의 설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나의 라이브러리에서 찾아 올립니다. -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Ⅰ. 들어가는 말
목회(pastoral)는 설교와 함께 시작되고 설교가 멈추는 시간과 함께 목회는 막을 내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목회사역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설교는 목회자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목회자에 있어서 최대의 작업은 설교를 위한 설교문의 작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회란 설교(preaching)행위만을 뜻하는 말은 아니지만, 설교는 목회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목회란 말이 씌어져 온 것은 종교개혁 이후 쯔빙글리(Huldreich Zwinggli)가 쓴 “목자”(The Shepherd, 1524)라는 책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여기서 보면, ‘목자=목사’(pastor)의 기능을 연장한 그런 의미로 사용하였다. 목자나 목회자가 하는 일은 모두 “목회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먼저 내용상으로 본다면 목자라고 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목양(shepherding)이며 논리적으로는 결국 목적을 위해서 목양을 한다는 의미가 내포될 수 있다.
다음으로 목회적이라는 말을 성서적 의미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은 소위 “양떼를 먹이고 돌본다는 동사 ‘포이멘’(poimen)이라는 희랍어에서 유래하는 ‘포이메닉스’(poimenic)라는 말이다. 여기서 ‘포이메닉스’는 목사와 교회의 여러 다른 기능을 포함하는 말들과 함께 쓰여졌었다. 가령 종교적인 교훈을 연구하는 교리문답(catechetics)이라든가, 설교를 연구하는 설교학(homiletics), 그리고 그 이외의 여러 것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말들을 논리적으로 끌고 간다면, 결국 목양이라는 말은 교회의 숫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으로 축소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설교는 그 중의 미세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양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는 복음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이면서 교회활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1. 복음의 전달
목사나 교회의 활동에는 전달하는 일이 그 하나의 목표가 되어 있다. 복음을 전달하는 일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다 꼭 같이 상대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의 전통에 의한다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한 복음으 전달은 확연히 구별되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 전달은 ‘전도’(evangelism) 또는 '사람을 낚는 일'(halieutics), 혹은 '변증학'(apology)이라고 하였다. 또한 교회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교’라는 말 이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교설(edifying)이라는 표현을 썼다. 교설이란, 교훈 혹은 문답식 교리(catechetics), 의례 혹은 예배 또는 예배 의식문(liturgics), 그리고 신앙을 돈독하게 하는 ‘교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다만 교회 밖의 사람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과 교회 안에서 전달하는 교설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 상황에 따라서 내용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전달하는 일은 말씀, 복음, 혹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취급한다. 이 초점은 아무 진리에게나 향해 던져질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이 아니고 오직 ‘구원사역’에 한 한다. 이러한 전달에는 복음과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봉사하는데 쓰이는 다른 여러 가지 지식들을 동원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이 소유하고 있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국면을 새롭게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일을 위해서 최근에는 의미론이나 심리학, 그리고 인류학이나 심지어 정신위생이 모두 동원되어서 복음의 전달과정에 봉사하고 있다.
전달이라는 것은 목사의 설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목회적인 활동이나 사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전달의 핵심은 정서적 감명을 주기 위한 하나의 교훈으로만 머무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전 존재 안에서 그 복음을 현실화하는 데 있다. 복음을 전달하는 것과 양떼를 돌본다는 것은 그 목적으로 보아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목회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서로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최초의 목회신학의 형성자라고 할 수 있는 부처(Martin Bucer)는 다음과 같은 간결한 어조로 목회에 있어서의 다섯 범주를 지적하였다.
1)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자를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불러들이는 일.
2) 떠나갔던 자들을 다시 인도해 오는 일.
3) 죄에 빠졌던 사람들의 생을 다시 원상으로 회복하는 일.
4) 악하고 병든 기독교인들을 강하게 만드는 일.
5) 건전하고 강한 기독교인들을 잘 이끌어 훌륭한 일에 전진하도록 하는 일.
이러한 일들을 공적으로 해야 되겠지만, 사적으로 개인의 집을 방문하여 사사롭게 진행하는 것도 부쳐는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17세기의 박스터(Richard Baxter)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는 교회 내의 가구 방문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2. 전달자의 자질 -양을 기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박스터는 주장하기를, 목사는 첫째 것을 첫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이외의 것은 쫓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없는 겸손을 가지고, 또 인간으로서 자기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엄격함과 온유한 인품을 가져야 할 것이고, 남을 사랑하고 언제나 심각하며, 열의를 품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자기 일을 위엄을 가지고 준행 하며, 모든 일을 신령하게 해 나가는 사람이어야 마땅하다고 한다. 자기의 전 목회활동을 겸손과 사랑으로 하며, 한없는 인내를 가지고 부지런히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박스터의 “목사 자격론”의 요지이다.
그런가 하면, 19세기의 스위스의 목사요 교사인 비네트(Alexander Vinet)는 , 결국 목사가 양떼를 알고 양떼와 자기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요 10:14)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선한 목사라는 것이다. 즉 목양을 통해서 구원의 원칙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사의 성품을 형성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불가결의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인격을 따로 연구하는 학문이 생김으로써 풍부한 자료들을 가지고 인간의 동기가 얼마나 착잡한 것인가를 밝히 드러내놓고 있다. 가령 교인의 자식과 자기의 자식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것은 말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어느 한쪽을 조금 소홀히 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위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아무리 존경과 위엄을 갖추려고 애를 써도 거기 역시 색다른 동기가 혼재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목양을 위해서 정말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나왔다면, 그것은 참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그 사람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이나 남다른 정신적․지성적 미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사의 자격에 관한 일람표를 들여다보면서 평생에 다시 한 번 이것들을 실현해 보겠다고 결심하고 일을 시작해보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오히려 사람은 자기의 불완전함과 부패를 스스로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목양을 본 따서 하나님이 미리 내려주신 그 은총에 응답함으로써만이 필요한 자질을 구비할 수 있다는 신앙심을 가지고 목회에 임해야 한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너무 평범하게 말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느 목자 치고 완전히 이해심이 넘치고 수용태세가 갖추어져 있고, 어질고 유순하며 사랑에 넘쳐흐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부족한 점을 스스로 깨닫고 부적당한 성품의 일면을 인정하면서 일을 해 나가노라면, 필요할 때 가서 남에게 필요한 한 사람의 목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목양자는 완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과 부적절에 대한 어떤 태도와 자세는 꼭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이 자세는 물론 은총이 있어야 우선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하고, 자기 비판을 병행시키면서 신앙의 이해에 이 목양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음미하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은 확실히 현대적 색채가 있지만, 그 옛날 신앙의 선배들이나 현금의 목양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Ⅱ. 목회에 있어서의 설교
현대설교에 있어서 설교가 차지할 자리는 예배학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와 그 목표달성을 위한 선택의 방법에 따라 결정된다. 데이빗(Richard Davidson)은 예배를 가리켜,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가 어떤 분이고 아울러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으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배의식'(ritual)이란 '말하는 것'(의식, rite)과 ‘행동하는 것’(예식, ceremony)을 결합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예배의 방법에 불과하고,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데 있다.
기독교가 처음 발생하던 시기부터 설교는 이미 유대교 회당에서의 예배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예수께서도 설교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으며 복음서에서는 그가 회당예배에 참여 설교를 한 사례가 있다(눅 4:16-21). 초기 기독교 형성시기부터 사도들은 설교자들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설교된 종교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설교가 꼭 필요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기 때문”(롬 10:17)이라고 한다. 이 말 한마디가 종교개혁의 아버지 루터를 자극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되는 연설이었다. 이어서 바울은 복음 선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놓아주시는 길을 마련하여 주시기 때문이다(롬 1:16-17). 그가 복음을 신뢰하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삶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본질문제에로 복음의 내용을 접근시킨 것은, 설교에 대한 신학적 교두보를 구축한 최초의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 설교의 구조
설교자가 설교를 시작하면 회중은 기대를 갖고 설교자에게 집중한다. 설교자는 시작하여 한동안 계속하여 말하다가 마침내는 그의 말을 마친다. 이 사이에 설교자의 말하는 행위와 듣는 이들의 듣고 반응하는 경험이 있게 된다. 신학적으로 설교는 하나의 사건, 곧 잠재적인 구속적인 사건이다. 시간적으로 설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설교의 구조는 이상과 같은 기본적인 요인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1)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설교는 시간과 그에 맞는 사상의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 시작과 계속, 그리고 종결이 일어나야 한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해버릴 수 없기 때문에 서두가 있어야 한다. 서두를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하면, 본론과 결론을 제대로 강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진행이 있어야 한다.
처음과 나중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위의 연속성과 맥락을 같이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행과정이다. 다시 말하여 한가지만 가지고 너무 오래 끌면 회중이 지루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러 문제들을 이것저것 나열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오히려 산만하기만 하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의 관심사를 가지고 끝까지 진행하되 관심이 방향이 흩어지지 않도록 질서 있게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회중은 서로 연관도 없는 잡다한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20여분의 설교에서 수백 개의 문장 속에 담긴 수천 개의 말들은 하나의 단일한 사상으로 짜여져서 듣는 이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의 구조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너무나 인위적이거나 기계적 도식을 사용하면 듣는 이가 거북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설교는 단순하고 명쾌해야 한다.
4) 구조의 단일성과 주제의 단일성
하나의 단일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타당성을 가지기만 하면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한 두 가지를 열거하여 말하다보면 단일성이 깨지기 쉽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하나의 문장으로 담아낼 수는 없다. 다만 단일화한 설교란, 오직 한가지 주제만을 담아낸다는 것을 말한다.
2. 설교의 형식
오늘날 설교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주제를 다루는 설교로써 교리, 도덕, 정치, 전도, 경험 등을 취급하는 주제설교, 다음 본문의 구조와 관련된 설교로써 제목, 본문, 주석 등 이른바 설교학적 구조에 관련된 본문설교, 끝으로 주제의 구조적 전개에 따른 설교로써 이는 문제 해결식 설교, 부흥설교, 철학적 설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삶의 자리 또는 문제 해결식 설교형태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매우 인기를 끌고있는 문제 해결식 설교형태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 따른 단점도 또한 가지고 있다. 설교는 목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우러나온다. 설교는 실존적인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 해결식 설교형태이다. 문제 속에 얽힌 것은 당사자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찾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 해결식 설교는 문제상황을 분석하는 데는 최고의 수준을 나타내 보이지만, 정작 그 해답의 고리는 풀어보지도 못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다만 성서적 훈련을 잘 쌓은 설교자는 이 형태를 취하더라도 무리 없는 설교로써 타당성을 가진 능력 있는 복음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Ⅲ. 현대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강해설교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강단에서의 설교는 본문해석이 결핍된 그저 비슷비슷한 주관적 내용의 설교들이 유행하여 왔다. 1980년대 이후 강해설교의 붐은 목회자들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설교의 내용이 본문을 해석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본문의 올바른 해석과 그것의 현실적용은 설교의 두 축이다. 한 편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봉독 했던 본문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지고, 나아가서 설교를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밖 현실을 살아가는 데 유익함을 바로 성경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공부는 성경공부, 설교는 설교다. 설교시간은 결코 성경공부 시간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물 붓듯 부어 주시는 성령의 역사, 위대한 영적 부흥의 역사는 설교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은 설교 현장에서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데는 그 사역의 의미를 다르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공교한 제도나 사람의 조직에 의해 교회의 생명을 걸어보는 모험이나, 입심 좋은 설교자들의 구변을 즐기는 회중을, 예배당에 운집시키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잃어 가고 있는 교회, 진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 가는 냉담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의 개벽에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현대에 있어서의 성경적인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해설교의 형식에서 구하고, 결론적으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조국강단의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중대한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설교역사를 반성하고 선교 제2세기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 강해설교란 무엇인가?
먼저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강해설교가 아닌 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성경과 관계없는 종교적 담화로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제목설교"는 여기에 속한다. 다음 도약대식 설교(Jumping bord sermon)로서, 단어나 귀절을 아무 연관 없이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설교나 본문의 가르침과 전혀 동떨어진 설교, 또는 단순한 석의로 끝나는 설교나 나열식 주석으로 끝나는 설교 등은 강해설교가 아니다.
강해설교란 주어진 성경 본문을 문자적․역사적 방법에 의해 해석하여 일정한 조직 하에 현대의 회중에게 적용시키는 설교를 말한다. 강해설교의 협의의 범주는 위의 정의에 부합하는 설교이지만, 광의로 보면, 최소한 본문과 그 해석 및 적용이 있으면 초보적인 형태이나마 강해설교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강해설교가 붐을 일으키면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무조건 성경 한 권을 택하여 차례로 설교하는 것을 강해설교라고 주장하는 인사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오해다. 다음으로 제목도 없고 대지도 없이 그냥 한 절 한 절 읽어 주면서 하는 설교를 강해설교라고 주장하는 인사도 있다.
그러나 강해설교가 되려면 단순히 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조직되어야 하고 적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제목과 대지(大旨)가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설교의 권위, 즉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성경의 가르침만 설교하게 되고, 따라서 설교자의 주관적 견해가 극소화된다.
또한 설교자가 좋아하는 어느 부분만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르침으로써 다루기 힘든 문제를 말썽이나 오해를 일으키지 않고 설교할 수 있다. 그리고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에 깊이 잠기게 한다.
그러나 강해설교는 준비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큰 난점으로 등장한다. 성경 본문을 깊이 연구해야 되기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하고, 게으르고, 적당히 말씀을 증거 하겠다는 사람은 한마디로 강해 설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음으로 일정한 조직 하에 설교를 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2. 본론 작성의 단계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 본문을 선택할 때 개역성경의 시작하는 동그라미에서 다음 동그라미까지의 범위를 본문으로 선택한다. 물론 동그라미는 문단을 표시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표시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무난한 경우가 많지만 잘못된 경우도 있으므로 반드시 하나의 주제, 즉 단일 사고 단위의 원칙에 입각해서 본문의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강해설교에 접근이 어려운 근본 문제는 대다수의 기성세대가 잘못된 국어교육을 받고 성장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주제’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를 못한다. 주어와 술어를 합한 것을 중심내용을 ‘주제’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어는 문법 상의 주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의미상의 주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어는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밝혀 주는 단어이고, 술어는 주어를 묘사하는 단어다. 예를 들어서 “믿음은 안보고 믿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여기서 주어는 "믿음"이고 술어는 "안보고 믿는 것"이다. 주어는 술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문장은 주어만으로는 목적하는 바를 분명하게 밝히지를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술어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야고보 2:14-26에서는 행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정리하면 “참된 믿음은 행함을 낳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는 참, 온전, 살아있는 믿음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술어는 "행함이 따른다"이다. 따라서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설정할 수 있다. 강해설교는 어떤 성경을 1장부터 계속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듣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강해설교란 반드시 하나의 단일한 사고 단위를 가지는 본문을 택하여, 관찰․해석하고, 조직하여 대지 및 소지 구성하여 적용단계에서 교인들이 실천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주제가 한 개 이상이라면 본문선택에서 실패했다고 봐야한다. 그럴듯하게 전달되고 아멘이 많이 나왔다고 기뻐할 일은 절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듣는 이들에게 필요한 본문"을 선택하여 깊이 있는 묵상을 통하여 관찰 해석과 조직 작업을 해야하는데, 이 일을 원활히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문장 실력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강해설교 접근을 위한 잠정적 내용으로서 주제가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파악된 주제와 본문 전체의 내용을 연결해 주기 위한 수정 작업을 거치게 된다. 다시 말하여 이제까지의 언급이 숲 전체를 보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숲을 구성하는 부분 하나 하나를 살피는 작업을 하게 된다. 먼저 본문을 연구하고 자료의 수집단계로서, 얼마만큼의 효용성을 지니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반드시 "삶"과 정황이 있어야 한다.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 주체는 문맥이다. 그러므로 단어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다만,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단어 풀이에 치중하면 중대한 오류를 야기 시킬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는 항상 동일한 뜻을 갖는 것이 아니다. 어떤 용법으로 어떤 문장에 쓰여졌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문자적․문법적인 연구단계는 강해설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문자적으로 원어를 아는 경우와 모르는 경우의 차이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12의 온전이란 단어는 그냥 놔두면 쓸모 없어지는 것을 쓸모 있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그래서 11절에 네 가지의 직분이 나온다. 그 중에 현재 “교사와 목사"라는 직분이 있는 데, 목적은 "온전"케 하기 위해서다.
1) 본문과의 대화 그리고 청취
먼저 문맥을 파악하지 위하여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본문만 가지고 씨름한다. 아직은 연구하는 단계는 아니다. 기회가 있는 데로 본문을 여러 번 읽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다. 문맥을 파악하는 것은 강해설교의 생명이다. 문맥을 상실한 강해설교는 자기증명을 위한 도구가 되기가 싶다.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문맥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계속 읽는다. 설교를 위해 선택한 한 단락만 읽는 것이 아니라 전후문맥을 읽는다. 어떤 때는 처음부터 책을 읽곤 한다. 계속 읽는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는 연구단계가 아니다. 단순히 문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문제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다. 설교자의 선험적 주제는 백성들의 문제를 아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 위해 먼저 백성들의 필요, 질문들을 알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의 신앙을 가진 사람의 약점은 삶의 현장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다. 사람의 현장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하는 것은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을 듣는데는 실패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히 전하고자 한다고 해도 현장에 분리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듣고자 아니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를 사람들의 필요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출발은 본문 그 자체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 삶의 정황과는 다른 환경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일어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당시 상황의 문제를 보면서 오늘 백성들의 고민, 회의, 마음의 짐 등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백성들을 대신해서 우리는 본문 속에서 청취해야 한다. 그래서 제사정적인 청취라고 하는 것이다. 제사장적인 청취를 위한 다음 단계는 본문의 질문, 필요 등을 파악해야 오늘의 현실에 맞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계속 읽으면서 오늘의 본문이 우리 양들의 어떤 필요와 연관되어 있는 가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만이 가장 현장감 있는 설교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실제적으로 전할 수 있는 설교자라고 할 수 있다.
2) 중심사상파악과 제목결정
이것도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하는데, 분문의 주된 사상(내용)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칼빈은 "말씀의 위대함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료성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본다. 해석의 역사를 보면 알렉산드리아는 본문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고, 안디옥 학파와 종교개혁파는 본문이 명확한 메시지를 주기에 위대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강단은 후자에 대한 훈련이 없기에 우화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설교해 왔고 그 결과 본문의 내용이 희석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중심사상을 파악하는 단계에 있어서 얼른 중심사상이 파악되지 않으면 이하의 방법을 동원해 본문을 본다.
첫째, 설화체인 경우에는 육하원칙을 질문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한다. 성경에 말을 걸지 않으면 성경은 우리에게 대답하지 않는 다. 질문을 할 때 살아있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다음, 강화체인 경우에는 교리의 틀을 한 번 사용해 봐라. 본문은 하나님 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등등. 그러면 여러 질문을 통 해 본문의 핵심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많이 하고 나면 더욱 쉽게 중심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끝으로 본문의 중심사상을 한 문장으로 써본다. 기록하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중심사상에 근거해서 제목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하고 목요일에는 늘 사무실에 본문의 제목과 본문을 주게 된다. 설교제목은 중심사상을 근거해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설교가가 이런 말을 했는데 설교제목은 air(attractive - instructive - reflective)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매력적이어야 한다- 요즘 책이 잘 팔리는 것은 제목이 기발한 것이 잘 팔린다.
다음 교훈적이어야 한다- 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너무 기발한 생각에 휘말리다 보면 안 된다. 나는 예전에 누가복음 15장을 가지고 '어떤 여자'라는 제목을 정했다. 유혹에는 성공했지만 주는 메시지가 없기에 좋은 제목이라고 말할 수 없다.
끝으로 본문의 내용을 반영하는 본문이어야 한다 - 나는 이런 노력을 한다. 그래서 제목을 대충 정하려고 하지 말라.
3) 개요확정의 단계
지금까지도 어떤 보조자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중심내용이 어떻게 본문에서 전개되었는가를 찾는 것이다. 아직 개요를 확정한 것이 아니기에 잠정적인 개요라고 한다. 단순한 개요를 잡는다. 옛날 나의 설교를 보면 절로 웃음 짓는 것이 많이 있다.
초년생은 '정보'에 관심이 있지만 오랜 세월 설교를 하는 사람은 '성도의 변화'에 초점을 둔다. 본문의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단순한 개요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점직적인 개요설정을 한다. 즉 ① 석의적 개요 ② 강의적 개요 ③ 설교적 개요 이다. 다음의 표는 점진적 개요의 예를 보여준다.
<이론적배경>
구 분 | 석의적 개요 | 강해적 개요 | 설교적 개요 |
언 어 | 성서언어 | 원리적 언어 | 현대언어 |
시 대 | 고대 | 모든 시대 | 현대 |
대 상 | 고대인 | 모든 사람 | 현대인 |
순 서 | 본문의 순서 | 논리적 순서 | 동기적 순서 |
목 적 | 정보파악 | 명료 | 사람을 변화 |
생 명 | 정확성 | 명료성 | 삶의 적용성 |
<실제적인 예>
롬6:14-24 주께 순종할 이유 |
석의적 개요 | 강해적 개요 | 설교적 개요 |
1.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에 죄를 지을 수 없다(14-15). |
1. 은혜아래 있기에 | 1. 은혜 때문이다. | |
2. 은혜아래 있는 자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17-18). |
2 죄에서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었기에 |
2. 자유 때문이다. | |
3. 순종함으로서만 의로운 종이 되어 거룩한 자가 된다. |
3. 거룩함의 열매를 맺기 위해 |
3 .열매 때문이다. |
롬8:18-32 탄식에서 영광으로 |
석의적 개요 | 강해적 개요 | 설교적 개요 |
1.모든 피조물은 탄식하면서 영광의 자유의 때를 기다린다. |
1.피조물의 탄식과 영광 |
1. 피조물 탄식 | |
2.성도도 탄식하면 서 영화를 기다린다. | 2.인간의 탄식과 영광 |
2. 인간 탄식 | |
3 성령님도 탄식하면서 성도를 기도 함으로 영화를 성취코자 하신다. |
3.성령의 탄식과 영광 |
3. 성령 탄식 |
롬9:1-13 내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
석의적 개요 | 강해적 개요 | 설교적 개요 |
1.바울은 자기 민족 의 영적구원을 소원 |
1.민족구원의 소원 | 1.민족구원의 소원 | |
2.자기민족을 향한 특권이 아직도 유효함을 인정 |
2.민족구원의 약속 |
2.민족구원의 계획 (순서가 바뀜) |
|
3.주권적 부르심으로 약속 인정 | 3.민족구원의 계획 | 3.민족구원의 믿음 |
4) 석의의 단계
석의적 단계는 목요일 아침부터 한다. 수요일까지 1에서 3단계까지 했기에 이미 설교의 틀을 가질 수 있다. 석의에서 중요한 점은, 배경관찰과 문학적인 관찰이다.
문학적인 관찰를 위해서 좋은 성경연구서의 서론만이라도 읽어야 한다. 그 리고 문체나 문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반복되는 단어를 찾아라. 그 이유는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함이다. 키텔 사전보다도 짤막한 자료를 이용해도 좋다고 본다. 또 석의에서 난해점에 대해 질문을 던져라. 교리와 윤리의 관점에 같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틀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도움을 준다.
5) 정리의 단계
이 때 다른 설교집들과 책들을 참고한다. 주로 목요일 밤과 금요일 오전까지 한다. 여기까지 오면 설교 제목, 개요, 석의 등을 통해 설교를 준비 할 수 있지만 다른 자료를 본다. 이런 곳에서 다른 분은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기까지 오기 전에는 절대로 다른 것을 참조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다른 것들과 비교, 참고한다. 그리고 대략 정리를 한다. 아직은 수정을 할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서론과 결론, 그리고 예화 등을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서론 및 결론 작성
세속화된 성도들과, 믿지 않은 자들과 접촉점을 갖기 위해서는 서론이 중요하다. 오늘의 현장 속에서 말씀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지금 미국 강해 설교가들은 이 서론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회중과 접촉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느 학자는 초전박살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들을만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다.
공감대를 갖게 하기 위해, 청취이유를 설득하기 위해, 메세지의 본론을 소개하기 위해 한국교회에서 서론연구가 좀 잘 되었으면 한다. 고전적 충고는 서론은 짧아야 하나 지금은 대화식 설교가 강조되면서 좀 길어도 무관하다. 나는 거의 마지막에 서론을 작성한다.
서론을 예화로 대치할 수도 있는데 설교에서는 연역적인 것보다는 귀납적인 서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귀납적 서론은 서론에 문제를 제기하고 회중들로 하여금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한다. 예를 들면, 신자의 실태를 소개하면서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그럼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요? 첫째는... 이렇게 함으로 회중들을 본문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서론은 특별한 원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귀가 뛸 만한 것을 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결론을 작성한다. 결론은 서론보다 간결해야 하고 긍정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결론은 다양하게 할 수가 있다. 직접 권고 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시를 읽을 수 있고, 초청 및 선택의 여지를 남겨둘 수도 있다.
7) 예화를 생각함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예화는 나의 삶의 주변 이야기, 즉 가정, 친구, 이웃사람들을 원천으로 한다. 그 다음으로 나의 예화 화일을 사용한다. 예화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주의 할 점이 있는데 '예화를 위한 예화'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고정화하지 말라. 그리고 강조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8) 완전 원고화 - 작품 완성의 단계
원고를 철저하게 쓰는 것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좋은 글을 쓰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원고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토씨까지 쓰는 습관이 중요하다.
9) 낭독 및 수정의 단계
낭독 및 수정의 단계를 금요일 저녁까지 완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토요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원고를 큰 소리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수정할 부분이 쉽게 포착된다. 몇 번 낭독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수정할 것들이 눈에 띄게 된다. 시간 있는 대로 낭송하라.
10) 기도
"성령님께서 기름 부어 주옵소서. 이 설교를 당신 앞에 드립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되어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3. 설교의 실제
설교를 잘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설교자 자신의 설교를 타인이 관찰하게 하고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서 세세히 지적을 받는 것이다. 여러 전문가 또는 선후배 목사님들 앞에서 자신의 설교 스타일이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검증 받는 방법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설교를 비디오를 통하여 스스로 관찰하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자신이 설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설교법에 관한 이론을 백 번 보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찍은 비디오를 끝까지 바라보는 것은 천하장사의 뚝심을 요구한다. 비디오에 나타나는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녹취하여 들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설교에 자신감을 갖는 설교자라 할지라도 비디오에 비춰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에서 한없는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빠지면 일어날 수 없다. 충격이 크면 클수록 개선하고 싶은 욕구에 비례하여 자신의 설교 스타일은 무한히 발전된다.
1) 목소리
비디오를 통하여 스스로의 설교 스타일을 개선하고자 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목소리이다. 설교에 있어서 목소리의 강약․장단은 회중의 수와 예배당의 크기,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 관계된다. 그러나 많은 설교자 중에는 톤의 강약이 강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설교자를 볼 수 있다. 설교자의 목소리가 너무 찌렁찌렁 하거나 너무 작거나 흐름이 없으면 전파효과가 감소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성대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무기나 진배없다. 그 목소리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목에서 소리를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고, 뱃심으로 밀어내듯 소리를 내야한다.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배에다 손을 대고 배의 근육이 움직이는가 살피면서 몇 번만 연습하면 금방 익숙하게 될 것이다.
말의 속도가 너무 느리면 회중들에 설교와 무관한 잡생각에 빠질 우려가 있다. 반대로 속도가 너무 빠르면 회중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바쁜 나머지 감동의 메시지를 놓치기 쉽다. 적절한 말의 스피드는 전파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다. 말이 들리기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경제”를 “갱재”로 하는 경우, 너무 기교를 부려서 “하였으며”를 “하엤시며”로 하는 경우, 처음 말은 또박또박하다가 끝에 가서 흐지부지 흐리는 경우, 회중에게 하여야 할 말을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웅얼 중얼”하는 경우, 느린 말에다가 “에.. 으~음” 등 불필요한 말을 섞는 경우, 빠른 말투로 인하여 단어들이 “뒤덤벅”되거나 말이 “더덕더덕” 붙어버리는 경우, 튀겨 나오는 침 피하느라 말의 내용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는데, 말의 내용이 확실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 하나 하나가 정확히 전달되어야 설교의 내용이 살아난다.
설교에 있어서 목소리의 변화는 설교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진행하는 설교는 설교자나 회중에게 모두 부담으로 나타난다.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소리의 크고 작음, 음의 높고 낮음, 속도의 빠르고 늦음에 따라 적절히 안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영적으로 감동되고,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감동을 제시하여야 한다.
2) 몸 동작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에 보면 몸 동작이 의사 전달에 미치는 영향은 50%이상을 점유한다고 한다. 불필요한 동작은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낸다. 시계를 자꾸 본다던가, 삿대질하기, 두 손으로 허공을 잡고 흔들어대기, 천장이나 바닥 내려다 보기, 두 손을 주머니에 넣는 다거나 만지작거리는 동작은 설교자가 뭔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회중을 불안하게 한다.
다음으로 서 있는 자리를 적당히 옮겨주는 동작이 필요하다. 현재나 과거의 설교단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신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매개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설교자와 회중은 수직적 구도에서 이제는 수평적 관계라는 사실이다. 설교자의 위치는 오직 설교단이라는 구시대적인 위치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신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자리로 내려 와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당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신자 한 분 한 분의 자리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시선의 안배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아멘을 유도하기 위한 시선의 집중은 설교자 스스로의 무능력을 노정 하는 것이다. 이는 물건을 팔려는 상인이 애걸 구걸하는 모습과 같다. 시선은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드리는 바로 그러한 자신감에 넘치는 시선이어야 한다. 시선은 따발총 쏘듯 휙휙 지나치는 것이 아니고 회중의 눈동자 하나 하나에 정조준 하여 사격하듯 백발백중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테크닉은 목회자가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도 도움이 된다.
3) 칠판 또는 OHP의 활용
현대 목회에서의 칠판의 이용이나 OHP의 이용은 시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매체이다. 물론 설교의 상황에 따라서 이용여부는 결정되겠지만, 교육목회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도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칠판에 판서하는 양이 많거나 설교시간 내내 OHP를 돌리는 것은 자칫 역효과를 자아내므로 적절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을 제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회중의 관심도를 저하시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판서나 OHP는 설교를 돕는 보조수단 그 자체에 머물러야지 그 이상이 되면 설교의 효과는 저하된다.
4) 전자영상매체의 활용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입을 통한 언어는 45%의 효과를 거두고, 신체언어인 얼굴을 보면서 소통하는 메시지는 55%의 효과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케 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감정전달은 영상이나 기타의 전자매체를 사용할 경우 감소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설교는 예배 가운데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설교행위(preaching)는 엄숙히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과 환경을 지켜나가면서 전자영상매체를 활용한다면 그 효과는 대단하리라 전망된다.
Ⅳ. 패러다임의 전환은 왜 필요한가?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회중의 삶의 자리와 정황, 그리고 회중들이 메시지를 받는 방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전통적인 설교방식과 설교자의 권위로 강요하는 메시지의 전달은 필연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제 목회에 있어서 21C의 설교는 새로운 인식론적, 문화적 상황에 대처하여야 한다. 월터 브르그만(Walter Brueggemann)은 "교회가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과거의 형식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설교가 행해질 상황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옛 방법들이 점점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의 도래는 설교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위기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옛 설교방법들에 대한 불신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설교현장으로부터 기인되었으며, 전달되지 않는 설교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들려지지 않는 설교는 설교일 수 없다.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1. 들려지는 설교를 위하여
현대의 설교는 단순히 설교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말해야 전달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여 “들려지는 설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현대 설교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씀 전파의 사역을 위임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힘쓸 것을 명하였다. 초대교회 당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목회현장 역시 말씀 전파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더구나 한국교회의 독특한 설교문화는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소산이 팽배하여 설교에 있어서도 권위주의적인 설교형태, 논리와 명제위주의 설교, 그리고 논쟁적인 설교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틀(frame)은 포스트모던 현상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설교에 커다란 도전으로 부각될 수 있다.
포스트모던의 사회상황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문화․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되는 가운데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적 표현이 공유되면서, 절대적 진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다원주의 시대정신을 낳았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 있어서도 문자 이전의 구두문화시대를 거쳐서 인쇄매체의 발달은 문자시대를 열었고, 작금의 현실은 전자시대의 도래와 함께 영상매체의 시대를 열었다. 프린트 문화의 선적이고 분석적인 구조는 기독교의 설교를 그 내용에 있어서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논쟁적으로 형성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현대의 전자영상 매체에 익숙한 회중들에게는 논리와 명제에서 이미지와 메타포, 스토리, 그리고 가시적인 영상이 맺어주는 언어에 의해서 전달되어질 때, 그 개념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은 70년대 이후 강단설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설교의 방법론에서뿐만 아니라 성경해석, 설교자와 회중의 새로운 관계설정, 설교의 언어, 설교의 목표에 대한 재해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해를 담고 있다. 설교사역은 주어진 문화여건 속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말씀 전달자이며, 또한 들어야 하는 설교자는 복합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사회의 상황을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2. 전통적인 설교의 패러다임
한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설교문은 목적과 관련하여 볼 때, 성경적인 교훈과 윤리적인 지침들을 가지고 일관되게 회중들을 설득하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는 설교자의 일방 통행식 커뮤니케이션으로서 설교는 회중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때 설교자는 하나의 커뮤니케이터이고,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는 필연적으로 설교자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전달자이며, 일방적이고 명령적인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와 회중은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관계로 이어진다. 설교자의 언어는 서술적인 언어보다는 명령적인 언어가 주종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의 패러다임은 논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주로 연역적인 구조를 통해 설교가 형성되어지며, 이야기는 명제를 설명하기 위한 예증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예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설교 패러다임은 권위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보 전달로서의 설교형태를 취하며, 명령적이고 지시적인 언어가 주로 사용되며, 상상력과 이미지, 은유, 이야기와 같은 메타포리칼한 언어(metaphorical language)나 시적인 언어사용은 등한시하고, 추상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리적 언어들이 특징을 이루는 산문적인 설교형태를 가졌다. 이러한 설교 이해에서는 설교자가 회중과 함께 설교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측면을 간과하고, 주로 가르치고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마치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실이나, 어떤 사실을 변증하는 재판정의 모습을 보여 온 것이 한국교회의 설교강단이다.
3.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
이러한 설교구조가 가지는 한계는 삶의 변화와 말씀의 역동성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형태는 사람의 감각기관과 연관하여 볼 때, 오직 귀만을 집중 공격하는 형태가 되어 도무지 보게 하고 느끼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전자 영상매체시대에는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전혀 새로운 상황이 태동되는 현시점에서 유달리 교회에서만이 전통적인 설교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것은 교회의 위기를 자초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부모세대의 설교 스타일이 자식 대에 있어서 고스란히 연출되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와 삶의 정황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주어야 한다. 지난 100년간의 조국교회는 설교의 영광의 시대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의 역사는 설교자에 있어서 끊임없는 설교의 부흥을 희구하면서 설교의 갱신에 대해 새롭게 관심 한다.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은 어디서 나와서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유진 라우리(Eugene L. Lowry)가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지난 20여 년을 자세히 돌아볼 때, 그 동안 설교학이 추구해 왔던 결과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역적인 것에서 귀납적인 것으로, 수사학적인 것에서 사회학적인 것으로, 공간적인 것에서 시간적인 것으로, 문어적인 것에서 구어적인 것으로, 산문적인 것에서 시로, 교리적인 것에서 찬송으로, 명제적인 것에서 비유로,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것으로, 논증적인 것에서 미학적인 것으로, 논지 중심에서 사건 중심으로, 해설에서 이미지로, 대지를 통해서 설명하는 것에서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권위적인 것에서 민주적인 것으로, 설명에서 경험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4. 맺음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이다. 교회와 설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 보완과 지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난 한 세기를 설교의 영광의 시대로 구가하였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는 곧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라는 현상을 보여 주었다. 설교를 통하여 개신교는 부흥하였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높이 추앙 받는 신적인 권능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교회성장에는 다양한 교회 내적․외적 요인들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한국의 특별한 정치, 경제, 역사적인 상황이 함께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설교는 한국교회를 세워왔고 지탱해 준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었던 한국 개신교회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철저하게 설교중심의 목회와 예배로 특징지어진다. 메시지를 잘 전하고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목회자를 청빙하는 데 있어서 능력 있는 목회자의 요건에 필수적 목록으로 꼽히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역시 설교에 생명을 거는 열정과 헌신, 그리고 뜨거운 사명감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여 왔다. 이제까지의 설교는 논리적이고 명제적인 설교형태와 주제설교의 형태, 3대지 형태를 쫓아왔으며, 성서해석학의 형태에서 볼 때 주로 본문의 온전한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설교자의 설교 아이디어를 위해 추출하는 해석방법과 본문증명(proof text)의 방법에만 매달리는 오류를 범해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패러다임은 논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주로 연역적인 구조를 통해 설교가 형성되어지며, 이야기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예증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예화의 수준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전통적 설교방식에 따라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킨 강단의 선배들에 대한 업적은 한국교회의 설교사를 훌륭하게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 어찌 한 번 흘러간 물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겠는가? 물줄기를 돌려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역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한국 개신교회의 대부분은 설교중심의 교회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설교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기에 설교의 역사는 한 시대를 말해주는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이지만, 그 내용과 형태, 그리고 전달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
Ⅴ. 제언 -결론을 대신하여
지난 한 세기를 담당해 온 우리의 설교사역은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말씀의 전달사역을 감당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이 마당에 다음의 부분만은 새롭게 각성하고 반성하여야 한다.
1) 설교사역을 위한 신학교육의 빈곤은 한국교회의 설교현장을 어둡게 하였다. 평양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43년까지 있었던 곽안련 교수 외에 1980년까지 설교학을 전공하여 신학교육에 사역한 교수가 없었다. 이것은 설교신학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한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사역하여 때로는 성공하기도 하였지만, 혼탁한 역기능을 나타낼 수 있었다.
2) 한국교회는 예배는 없고 설교만 있다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예배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배와 집회를 분간하지 못하는 경향을 부인하지 못한다. 예배라는 이름 하에 실상은 집회로 일관되는 조국교회의 예배현상이다.
3) 교회의 모든 모임은 예배라는 이름 하에 항상 목사의 설교가 따르는 일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의 목사는 일주일에 줄잡아 열 번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횟수는 질과 관계하지 않겠는가? 주일 대예배에 한번만 설교하는 서구의 예배문화를 생각하라.
4) 설교와 강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해야 한다. 성서의 본문은 읽되 설교는 없다. 설교자의 신학만담이나 신앙수필을 들려주어서야 되겠는가?
5)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그런데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을 유도하는 기이한 설교현상을 연출하고 있다.
끝으로 설교자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설교문의 도용의 문제이다. 남의 설교문을 마치 자기 설교하듯이 하는 목회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상과 같은 반성 하에서 다시 한번 종교개혁가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의 회중들은 대부분 성서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고 풀어주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종교개혁가들은 강해설교자들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새로운 세기에도 조국강단은 이러한 설교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해설교에 대한 정의를 로빈슨(Haddon Robinson)의 말을 빌어 보면, 강해설교란 성서구절을 연구한 후 얻어진 말씀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성령님은 본문에 나타난 개념을 먼저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시키고, 그 다음에 설교자를 통하여 회중에게 전달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새로운 설교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설교자들은 강해설교 형식에서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회중들은 설교자가 시사평론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신학만담가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의 사역자들은 다음의 사항만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회중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허기져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가 진정 그 날의 회중에게 들려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직무에 전념하고 정성을 다 하여라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보고 알 수 있게 하라 그대 자신을 조심하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펴라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리라
사도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딤전 4:15-16)
* 주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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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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