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2021년 1월 17일 새해 셋째주일 낮 예배
말씀: 마 7:1~5비판하지 말라
제목: 비판하지 말라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는 원죄(原罪)의 기사에서 출발하여 66권 전권이 일관하여 “죄의 문제”를 그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빠진 성경이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런데 현대인은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자기 자신의 문제로 다루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문제”가 빠진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참상을 당하셨다. 이는 우리의 죄 때문이다.
죄 중에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의 죄가 있고 인간과 인간에 관한 죄가 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짖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최후에 심판하실 권한과 책무에 대하여 침범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도 아직 가만이 계시는 데 저라서 잘났다고 먼저 남을 심판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을 주님께서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잘 아는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철학연구의 3대 비판서를 냈는데 그의 비판서는 모두'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제1비판서는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고, 제2비판서는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제3비판서는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에 대한 답변이다. 오늘 우리는 비판 즉 남을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새해의 큰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의 비판은 하나님의 심판 즉 최후의 심판(고전 4:5, 약 5:9)으로 이는 죄에 대하여 연민이 없는 엄격한 심판이고, “비판하지 말라”의 비판은 사람이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민이 없는 무자비한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사랑이 없는 증오의 마음으로 타인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비판은 결국 선을 선으로, 악은 악으로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이 없어진 인간이 이를 올바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므로 오만의 산물이다. 오만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성질(性質)이다. 그리하여 오만은 자기의 입장에서 자신의 장점은 잘 보이고, 단점은 안보여지고, 다른 사람의 장점은 안보이고, 단점은 잘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래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인간성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입장에서 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생래 인간의 본성이다.
교만은 일만 악의 원료가 된다. 왜 교만하는가 그것은 자기가 남을 이러쿵저로쿵 뒷담화를 하는 일이다. 즉, : 자기 이외에 보이는 것이 없는 죄악 중에 죄악이다.
훼방이 일보 전진하여 “교만”이 되는데, 이는 선에 대한 악의 우세를 자랑하는 죄이다. 악이 선의 위에 서서 이를 발 아래로 보며, 경멸하는 심적 태도인데, 겸손의 반대이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인은 특히 신앙심이 깊다고 존경 받는 분들은 이 말씀을 지켜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에서 발생되는 명백한 오류나 행위에서 드러나는 비위(非違)를 묵인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셨고(마 23:13~39), 바울도 베드로를 면책(面責)했다(갈 2:11). 그리하여 때에 따라서는 비판을 해야만 한다. 비판도 의무 안에 들어간다. 그러면 어떠한 경우에 비판이 허용되는가?
비판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그것은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사랑”이다. 무지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재판이 있을 수 없고, 사랑이 없는 자에게 자비로운 판단이 있을 수 없다. 칸트가 말하는 비판은 흠없는 순수이성에서 나오는 비판만이 인간을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서 나오는 일이다. 이것이 제1비판서 즉, 순수이성비판이 묻는 질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주님의 가르침은 결국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인데, 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사랑이 있어야 하며, ②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① 신앙에 관한 것은 우선 성경말씀에 근거되는 완전한 지식이어야 하며, 다음은 자기나 자기 파(교파)를 위한 것(인본주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신본주의).
② 타인에 대한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 위에 서야 한다.
그리하여 완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이 전제되었을 때만이 비판은 허용된다. 그 이외는 다 “비판하지 말라”는 철칙(鐵則)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는 실질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결국 남을 판단할만한 인물은 없다는 것이다. 의인이 없다는 말이 증명한다.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 이외의 자리에서 남을 비판할 때는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자리에서 무자비하게 그를 심판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과 사랑 위에 선 비판이란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7:3~5 3절 말씀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지극히 작은 티와 들보를 대비시키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는 들보와 같은 큰 결점이 있는데, 어떻게 타인의 결점을 올바로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바르게 보고자 하면 우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야 한다. 이는 5절의 “외식하는 자여”라는 힐책에서 볼 수 있듯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똥 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 내가 온전한가? 주님 앞에서 정녕 죄 없다고 흠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3. 의인도 남을 판단하면 안된다. 누가 의인인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다시 받고자 합니다.
롬: 3:10절에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바로 앞 장 2:1-13에서 말씀하신바,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울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고 하였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전노를 네게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앞서 우리가 뭐가 잘났다고 남을 심판하고 판단하고 비방하고 뒷담화를 합니까??? 왜???“: 여러분이 하나님 위에 군림하였습니까??????
제발 새해부터는 이제 하나님보다 더 잘 났다고 행세하지 맙시다. 전광훈이가 따로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몫입니다. 구분 좀 하세요.
결과적으로 인간의 비판은 자신의 눈에 들보를 가지고 남의 눈의 티를 운운한다. 완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에 의한 비판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빠지게 하신다. 그것은 인간의 들보와 같은 죄가 용서함을 받을 때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죄 자체인 자신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씻음 받을 그 감격의 순간에는 사랑의 비판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결론: 새해를 맞는 성도들의 신앙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깨달아 항상 마음에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 천국 백성으로 부끄럼 없는 바른 신앙으로 생활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 말씀 상고하고자합니다.
우리 마음이 항상 주 앞에 깨어 있어야 함(살전 5:6)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함(막13:35-37, 마24:42-43, 살전5:6)죄짓지 말고 정신 차려 깨어 기도해야함(벧전4:7, 약4:17, 요삼1:11, 엡5:6-7) 빛의 자녀처럼 빛의 생활해야 함(엡5:8, 엡5:9-10, 요8:12)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부르심 받은 우리들은 주님 재림하시는 날까지 항상 깨어 있어 기도에 항상 힘쓰며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하는 성도 되어야 합니다. 내 입으로는 남에 말하는 것은 이제 지나간 분토로 여기고 말하고 싶어도 참고 참는 인내는 내게 연단을 줄지라도 거기에는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롬5:4). 칸트의 3비판서의 세 번째 책, 판단력 비판은 새로운 희망을 찾는 다고 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방하고 책망하는 것은 결코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비판받는 우리가 되는 것은 새해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게 되는 우리 만나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설교(학)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합 3:16-19 / 의인의 믿음과 구원 (0) | 2021.02.28 |
---|---|
근심 있는 새 해, 근심 없는 새 해 (0) | 2021.01.31 |
받은 대로 거저 주라 (0) | 2021.01.10 |
염려하지 않는 신앙 (0) | 2020.08.30 |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0) | 2020.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