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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모세와 기드온을 중심으로

by 이덕휴-dhleepaul 2021. 7. 18.

날자: 2021년 7월 18일 주일 낮 예배

말씀: 출 33:12-23/삿 6:33~40

제목: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모세와 기드온을 중심으로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본문 출 33:12-23절은 시내산에서 떠나야 할 그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하나님은 그 요구에 대답하십니다.

 

1. 모세의 요구와 기드온의 신앙

모세는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33:13)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충분하게 입었는데도 그걸 다시 요구하는 겁니다. 이 요구가 16절에 다시 나옵니다. 당시 모세가 이렇듯 다급하게 은총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6절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그가 요구한 은총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가리킵니다. 그런 증거가 있어야만 주변의 다른 종족들과 자신들이 구별되는 게 아니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닥친 물과 양식 문제도 기적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았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모세는 무슨 증거를 더 원하는 것일까요?

역설적이지만 초신자이거나 어린애신앙일 때는 하나님 임재를 확신하지만, 신앙의 깊이가 더 해갈수록 하나님 부재를 경험합니다. 이게 하나님 경험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순간에 그 하나님은 또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경험입니다. 일찍이 신학자이자 독일의 실존철학을 외쳤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긴 그가 죽어갈 때까지 신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25살에 교수가 되고 강의하며 바로 질병으로 고생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신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은총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외칩니다. 기드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뒤를 이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할 사람으로 여호수아를 불러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의 족속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고통 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지도자를 세워 구원시키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기드온입니다(히11:32).

기드온은 다른 이름으로 여룹 바알(삿6:32)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과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자신을 지키면서 왜 이같은 현실이 닥쳐왔는지를 판단하면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삿6:12~13). 그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실 때에 기드온은 약하고 작은 자이기에 못한다고 말하였고(삿6:15), 표징을 달라하였으며(삿6:17),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내어 하나님의 단을 쌓으라고 하였을 때도 두려워하여 밤에 행할 만큼 확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삿6:27).

이같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확신을 가지게 하셔서 믿음의 용사로 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도 확신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모세든 기드온이든 이들의 공통점은 겸손과 확신의 신앙이었습니다.

믿는 믿음이 너를 구원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구약시대의 사사들의 이야기에서 신약의 주님을 예표하였던 것입니다. 반석을 치랴?? 그러자 반석에서 생명수가 폭포처럼 품어져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주님에 대한 예표입니다. 할렐루야!!!

기드온의 신앙은 ‘겸손한 신앙’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에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겸손한 믿음의 자세를 가질 때에 그 사람을 큰 용사로 위대한 일꾼으로 써 주십니다(삿6:12~16).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자기의 무능함과 약함과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일어나서 싸운 믿음의 사람입니다(삿6:34). 그가 일어나 나팔 불면서 군사를 모집했을 때 3만 2천명이나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의 수가 많음으로 이긴 줄 알 것이기에 그 수를 줄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습니다(삿7:2,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면서 사방을 살피는 사람 3백 명을 구별하여 135,000명의 미디안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의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 입니다.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둔 후에 백성들이 와서 자신들을 다스려 달라고 말할 때에 그는 우쭐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삿8:22~23).

 

2. 은혜를 베풀 자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모세의 요구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것이 바로 은총의 증거니, 봐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17절)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실 뿐입니다. 은총은, 즉 절대 생명이나 존재의 깊이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는 뜻입니다. 삶을 어떤 구체적인 형태나 현상으로 묘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어떤 형태나 현상에 제한해서 묘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18절에서 다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은총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나의 영광은 이것이니, 봐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19(후)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카리스마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구절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오늘의 설교제목이지요.

은혜와 긍휼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자 믿음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은혜가 성경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 즉, 카리스라는 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아버지 하나님만이 소유하시고 절대적 권능입니다.

카리테스(그리스어: Χάριτες, 라틴어: Gratiae)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생의 아름다움, 우아함을 나타내는 우미(優美)의 여신들을 말한다. 이들의 단수형은 카리스(그리스어: Χάρις, 라틴어: Gratia)이며 로마 신화에서는 그라티아이이다.

은혜 또는 은총이란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 히브리어로 헨(חֵ֖ן)(恩寵)이다. 가톨릭에서는 성총(聖寵), 개신교에서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자연, 인간, 문화, 역사 등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수여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카리스)을 가리킨다. 또한 본래는 죄가 많아서 은혜를 입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돌봄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와 관련시켜 은혜를 해석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하나님의 호의로 인간에게 '무상(無償)의 은총'이 주어졌다고 주장하고, 루터는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수동적으로 은총을 받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오직 은혜(솔라 그라티아)를 주장하였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역의 총체이기 때문에 그 의미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창조나 섭리와는 달리, 죄의 구제를 위해 행하여진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의 대속에 나타나 있어, 이를 은혜라고 인정하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자는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준비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은혜를 베풀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는데도 그 초대를 거절한 사람을 잔치에 데리고 올 수 없는 경우와 같습니다.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3. 긍휼히 여길 자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며 자비로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비를 바라는 마음은 내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속죄의 마음입니다. 하긴 저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교회다니는 사람없고 만일 다닌다면 교회다니면서 잇속 얻어내려는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사람이겠지요.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할 자유가 아닙니다. 할렐루야!

모세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자로, 그리고 긍휼히 여길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였고 그는 스스로 긍휼한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은혜와 긍휼의 현존재입니다. 구약을 예표하신 분이지요.

 

결론

사사기 7:1-14 <기드온의 300용사>

[사사기 7:3절] “두려워하며 떠는 자가 누구냐? 그는 돌아갈지어다”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300용사를 선발하시는 장면입니다. 기드온의 소집령에 따라 소집된 이스라엘 군대의 수는 총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그 수를 축소시킴으로 최종 300명만 남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단 300명의 군사를 선발하셨을까?

첫 번째 기준은 두려움을 극복한 용기였습니다. 두려워서 떠는 자가 있으면 돌아가도 좋다고 하자 32,000명 중에서 당장에 22,000명이 떠나버렸습니다.

[역대상 17: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오늘 말씀을 따라서 우리 만나인들도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기죽지 말고 용감하게 하나님 믿고 승리하는 삶 즉, 은혜와 긍휼이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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