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글은 "설교신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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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설교의 우위성
설교사역이란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었으며, 그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설교가 오늘날 폄하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볼드윈이즘(Baldwinism)은 스텐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라는 사람이 정치적 전략으로 연설과 웅변의 가치와 중요성을 낮추고 단순하고 평이하고 정직한 진술을 화려한 웅변과 말보다 앞세워 20대에 수상을 하게된 비법이었는데, 이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던 사상이다.
현대인은 문화와 교육의 혜택으로 위대한 웅변가가 필요했던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 필요한 정보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일반 역사는 역사를 참답게 이룩한 사람들은 말할 줄 알았고 메시지를 전할 줄 알았으며 자기들이 산출해 낸 효과적인 결과로 민중들을 행동케 했던 위인들이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②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과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가 그 원인이 되겠다.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색하고 논리화하고 억측을 부리게 되면 웅변이나 구변의 위대성은 여지 없이 하향 길을 걷게 되고 쇠퇴하는 법이다. 에드윈 해치는 말한다.
"역사를 좀더 가까이 바라보면 수사학이 철학을 죽였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철학이 죽은 것은 단지 아주 적은 소수로 인해 그것의 참된 것이 정지를 당했기 때문이며, 사상과 행동의 영역에서 해석과 문학의 영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즉 형식이 알맹이보다 더 중요시 되고 웅변과 능변이 그 본질로 간주된 설교가 오락거리 이상일 수 없었다.
③ 설교집의 발행도 한 원인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강조점을 메시지의 진리성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옮긴 설교집들은 설교자들을 수필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④ 설교의 퇴색은 예배의 의식적 요소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교독문,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된 것이다. 간증, 상담의 증가는 일상생활에서 긴장과 어려움의 증가로 더 많은 개인적인 배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적인 문제해결이 요청된 것에 대한 필연적 귀결이다.
성경은 다른 어떤 것보다 설교를 강조한다. 이적은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수단으로서의 표적(Sign)이었다. 초대교회 당시 권세자들의 최대 관심은 사도들의 전도함과 하나님의 도 가르치는 일을 중단시키는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였으며,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말씀을 전파하라고 강조하였다.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
현대인의 문제는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질병에 있지 않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묘사하는 일반적인 성경 어휘는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따르면 불행이나 참상, 육체적인 질고까지도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원죄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어두움"이라 표현되는 인간의 무지는 사망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구원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 구원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요구이며,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자아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peculiar) 임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복음을 반포하는 책임을 맡은 자(고전4:17)라고 하면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게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엡3:8-10)'라며
자신이 받은 은혜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임을 밝히고 있다.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명제로 붙들어야 한다.
드러난 증세의 원인을 파악지 않고 단순히 증세만을 멈추게 하는 것이 환자에게 범죄행위이듯이, 임시적인 행복감을 불어 넣어서 현대인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단정해 버리고 생각하기를 중단케 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문제 진단과 정직한 처방을 외면한다면 이는 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직무유기다.
거짓 평안을 주는 각성제나 수면제로 판단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각성제나 진통제, 흥분제 등을 복용하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는 현대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본질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그에 따르는 근원적인 처방으로 그것을 해결하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 정치조건에 대한 관심, 개인의 참된 행복 등은 언제나 기독교 내에 개혁과 부흥, 참된 말씀 전파가 일어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 졌음을 명심하라. 병원, 교육사업, 빈민구호법, 노동조합은 모두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제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본 장은 설교가 대화(dialogue), 소위 의견교환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므로,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복음은 생의 가장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경박한 정신과 변론의 태도를 가지고 흥밋거리처럼 가벼이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고전2:14)"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마11:25)"을 볼 때, 아이들은 변론이 대상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대상이므로, 대화나 토론은 진리 전달방식으로 타당하지 않다.
현대인들이 비록 설교보다 다른 방식을 선호할지라도, 로이드 존스는 참된 설교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그것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주장한다. 예전에는 충분한 양식과 필요한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교를 들으러 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데 이는 가난 때문이라 하였고,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부요하여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그들의 풍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 핑계에 다름 아니다. 양떼는 꼴이 있는 곳에 몰려 들게 마련이다. 설교는 전인을 다루는 것이며,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된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설교의 역할은 구별되어 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했다. 이는 설교자가 하지 않을 어떤 일들이 있으며,
그가 하려고 덤비지 않아도 될 어떤 일이 있으며, 우리가 준비해야만 할 특수한 임무가 있음을 시사한다. 첫째 구원의 메시자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 )로서 전도설교이며, 둘째는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디다케( ),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요약이다.
제4장 설교의 형식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로 두어야 한다.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전도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통일된 메시지를 포착하기 위해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정통해야 한다.
바르트주의자들(Barthians)의 특징은, 말씀(the Word)에 관한 것들만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관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실제로 그 말씀 자체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말씀의 통로이며 운반도구인 것이다.
설교의 형식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리를 말하는 교리와, 그 원리를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실천적인 문제를 다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읽도록 쓰여진 수필과는 달리,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이다.
수필은 반복을 금하지만,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는 반복에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는 강의와 마음을 향한 호소로서의 설교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강의와는 달리,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설교준비는 택한 본문이나 구절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설교자가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함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본문의 중심원리가 완전히 포착되었으면 이것을 명제, 대지, 소제목으로 나누는 문제가 따르는데, 이는 중심적인 원리나 명제를 뚜렷하게 하기 위함이다.
설교의 형식문제에 있어서 논증과 주장의 진전이나 전진, 또는 논증의 발전은 절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처럼 설교는 반드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동시에 모든 단편적인 설교는 그것으로 완전한 전체성을 가져야 한다. 한 편의 설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할 수 없어서 갑자기 끝내는 설교는 전체성이 결여된 것이다.
제5장 설교행위
참된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의 전인적인 품격이 반드시 수반되는데, 이는 설교가 설교자의 품격을 통해서 존재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스처, 행동, 태도까지 다 동원되는 것이 설교이다.
두 번째는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자가 아니라,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 바로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자연스러움의 요소이다.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령에게 열려 있는 설교행위는,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게 되어 상호교감이 가능하게 된다
. 네 번째는 진지함의 요소이다. 설교자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필연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박스터(R. Baxter)는 "나는 설교할 때마다 그것을 마지막 설교로 알고 설교하였고, 한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입장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다섯 번째는, 박력과 열정이다. 진지함의 요소는 진지한 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치는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여섯 번째는 열심, 열정감인데,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뜨거움이다. 사도 바울은 최고의 지성인이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면서도, 그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눈물로써 전파했다고 한다. 위대한 지성이라고 해서 아무런 감정도 보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일곱 번째는 긴박감이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은 이유로 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설교행위의 전체목적은 청중들을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념(Pathos), 즉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감정주의는 옳지 않다. 사람들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감동을 충동하려고 일부러 애쓰는 화상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부르짖는 참된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청중은 틀림없이 그 진리에 감동된다.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도 잊지 않아야 하는데,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고전2장)고 말하고,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살전1:5)이라고 밝히고 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설교한다는 것은 불이 있는 진리, 감동적인 지리의 활동이다. 불이 타지 않는 신학은 결함있는 신학일 수밖에 없듯이 설교에도 두 요소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6장 설교자
로이드 존스가 전제하려는 제1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가르치는 장로, 즉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장로들인 목사와 교사들, 그리고 사도들, 선지자들, 전도인들에게 설교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었다. 즉 설교는 부업으로 삼을 수 없고, 부름 받은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며, 예외적 환경을 제외하고 그의 전시간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설교자의 직업은 무엇인가? 먼저 설교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소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한다.
즉 어떤 압력이 자기의 심령에 가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고 영계에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 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된다.
스펄전(C. H. Spurgeon)은 "만일 여러분의 목회를 안 하고도 견딜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는 말씀증거를 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은 절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가 부름 받은 일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그 일의 두려움을 너무나 느낀 나머지 그것에 위축되는 사람이다.
그럼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캠벨몰간과 같은 예외가 있지만...
설교자는 그냥 되지 않는다. 훈련이 있어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설교자는 비상한 영성으로 특징지워져야 하며, 진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경건하며, 지혜로우며,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2:24)"라고 설교자의 자질을 지적하였다.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조직신학과 정확한 해당본문의 의미 사이의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어느 정도의 지력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삶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도 요청된다. 그리고 정확하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말의 재능을 로이드 존스는 첨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지식과 성경의 핵심메시지에 대한 지식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조직신학을, 성경지식의 정확성을 위해 성경신학을, 수많은 이단의 속임수와 미혹을 경계하기 위해 교회사를, 설교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위해 설교학을 권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영혼에 대한 사랑이요, 진리에 대한 사랑이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이것이 참된 설교자를 만드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제7장 회중
설교자는 설교단에 서서 그저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들 중 어떤 것을 소리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경의 교훈에 대한 일종의 신학적인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는 회중석과 거의 분리하여 거의 별도로 강단에만 나무 지나친 강조를 하는 경향성이 있었다. 그리고 회중석에 있는 사람들은 설교자를 거의 우상에 가깝도록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짙었다.
그 반동으로 우리는 "여기와 지금, 오늘의 상황, 오늘의 인간"에 계속 강조점을 두고 있다. "분위기를 만드는 일"은 큰 일이니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에 아주 간단한 복음의 말씀을 끝에 집어 넣자는 의견이 횡행한다. 또한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적 전문용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칭의나 성화나 영화 같은 용어는 그들에게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바와 같은 식의 세상과 사람, 타락과 기적, 역사 안에 있는 초자연적 역사 등에 관한 말을 그만 두고 종교적인 메시지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적인 타입의 현대인은 너무 현학적이라서 현대문학이나 현대예술이나 현대의상, 현대소설 등의 차원에서 문제를 생각하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아주 친밀한 이러한 어휘로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치기란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하여 로이드 존스의 설교관은 다음과 같다. 그는 40-50분 정도의 긴 설교를 한다. 현명한 설교자라면 자기의 시선을 하녀들에게 집중시킨다고 한다. 만일 훌륭하고 학식 있는 사람이 자기는 얻은 것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저주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칭의나 성화와 영화 같은 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무엇이 설교되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설교되는지를 결정하거나 정하지 못한다.
계시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이는 설교자며,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도 역시 설교자라고 논박한다. 이는 개신교의 일하는 원리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설교자의 임무란 증상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죄가 취하는 특별한 양태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설교자는 사람들에 관한 특수하고 상세한 상황들을 알 필요가 없다. 그는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필요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청중들을 공통분모에 이르게 해주는 것은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복음에 대한 평범한 설교는 특정 경우마다 성령에 의해 특정하게 적용된다. 교회의 영광이란 교회가 모든 유형의 사람들, 모든 계층의 사람들, 가능한 한 다양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함께 모이고 똑같은 설교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말씀은 피상적으로 살펴보면 회중에 의해 설교자가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오늘날의 주장을 굉장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말씀 증거보다 그의 일반적인 행위와 태도라고 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종교의 임시적이고 당분간 지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원리와 영구성이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도가 거듭 반복하는 것은 우리가 중요한 것은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반면, 하찮은 일에도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실제적인 설교 전달양식에 있어서는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방법들은 언제나 우리의 메시지와 일치하며 조화되어야지 어긋나서는 안된다. 우리의 법칙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대신 다른 것에 강조점을 둔다면 애초부터 실패를 맡아둔 것이 된다. 로이드 존스가 끝으로 덧붙이는 것은, 현대적 사고방식에 있어서 진정한 난제는 성령과 그의 능력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제8장 메시지의 성격
로이드 존스는 회중이 강단을 좌우하거나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청중의 상태와 지위를 평가하여, 그것을 메시지 준비와 전달과정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1-3)."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1-14)."
교사는 어떤 체제 가운데에서라도 그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학생이든지 제자이든지 간에 그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단단한 식물을 주지 않고 적을 먹이는 것은 위의 말씀이 지적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자기의 설교를 들을 회중의 수준을 평가하는 일은 설교자의 의무이며 직무임과 동시에 그 평가가 참되고 정확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설교자가 직면하는 주요 위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이들이 그 점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이다.
만일 그렇게 가정한다면 모든 예배에 기성신자에게 적합하게 설교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교훈적이어서 복음적도적인 요소와 요점은 무시되어 아마 거의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 아래로 인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세한 것과 정해진 시간을 요구하는 현대의 요청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는 말씀을 가지고 매일 설교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교훈하는 일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맞아들였다고 주장한다.
제9장 설교자의 준비
설교자는 매주 실제적으로 어떻게 준비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는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일에는 휴일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듯이 같은 의미에서 설교자도 휴일이란 없다. 어떤 특수화된 문제로 시선을 돌림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제일되고 가장 중요한 일은 그의 설교가 아니라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해가 갈수록 더욱 느끼는 것은 설교자를 위한 대규칙 중 하나는 아침을 보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다른 모든 것보다 기도하고 싶은 모든 충격에 대해 언제나 반응을 보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경을 매일 정규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전체로 읽는 것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자기가 애호하는 구절만을 편협하게 읽는 것을 방지하며, 설교본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방지한다. 읽다가 한 구절이 유별나게 부딪쳐 오면 계속 읽어나가지 말고, 즉시 멈춰서 그 구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교집을 읽으며, 이를 위해 독서의 시간을 확보하고 변증학에 대한 독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독서에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과 같기 때문이다. 독서의 목적은, 책이나 간행물로부터, 정말 모든 종류의 이상한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에 있지 않다. 독서의 일차적 목표는 정보를 제공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자극을 받는 것이다.
책의 임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독서의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도 좋은데,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모차르트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차르트는 그를 좋은 정취로 들어가게 했으며. 그의 정신에 안정감을 불어 넣었고, 칼바르트를 소생시켰으며 그의 생각을 자유롭게 했다.
제10장 설교준비
어떤 유혀의 설교여야 하는가? 무엇이 복음적인 설교인가? 교회 기성신자의 건덕과 위안과 강건함을 위해서 하는 설교인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서 보다 보편적인 교훈형태의 설교인가? 등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스펄전은 연관된 설교를 하겠다는 결심이 어딘지 주제넘은 점이 있다고 말한다.
본문들은 설교자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자기는 이 일로 주님을 찾으며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집하기를 설교자는 결정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며, 이 일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도, 우리가 성령의 자유하심을 고수해야 하고 그것을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구체적인 설교준비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 나가되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성경 중 한 책의 한 부분을 세밀히 검토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설교를 하는 것의 장점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일 뿐 아니라 목회자의 부담과 노력을 크게 덜어 준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을 파헤치는 강해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언제나 성경에서 연원되어야 한다. 본문이 결정되면, 첫 번째로 해야할 일은 해당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취급하되,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 점에 관심이 없고 오직 "아이디어"만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해당본문이나 진술의 주요 메시지와 주요 핵심, 요점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주요 핵심에 확실히 도달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제11장 설교의 조직
우리는 본문의 주요 메시지와 주요 요점을 발견하였으면 그 본문의 실제적인 배경과 적용 가운데서 이 주요 메시지를 진술해야 한다. 먼저는 당시대의 문맥을 잘 파악하고 진술한 다음, 이것이 언제나 타당한 근거를 가진 보편원리의 진술임을 계속적으로 보여 주되, 성경의 다른 곳에 있는 대구에 주의를 돌림으로서 이것을 강화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래서 그 본문의 보편원리가 단순히 그 구절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 모든 성경에 흩어져 있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제목과 원리와 주제로 유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청중들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유익하다. 설교의 골격을 준비한 다음 그 대지들이 절정과 결론적 적용에 이르도록 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준비의 전체 포인트요, 목적이요, 설교하는 일의 모든 초점이다. 소제목(대지)을 정할 때는 반드시 본문 안에 있어야 하고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대지는 대개 세 개여야 한다. 대지를 말할 때, 우리는 너무 명석한 척하지 말고 너무 멋있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의 함정이다. 우리는 기교를 부리기 위한 기교(Art for Art's sake)를 신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설교의 방식에 있어서 자신 안에서 좋겠다고 느껴지는 것을 먹칠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들이란 엄청나게 다양하다. 소제목들은 한꺼번에 기계적으로 다 밝히는 것은 가능한 삼가는 것이 더 좋다. 설교의 개요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는 인체와 같이 척추가 있고 뼈들이 있고 그것을 덮는 살이 있다. 인용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학자도 사상가도 아니기 때문에, 인용하는 사람의 정신능력, 그의 사고능력, 그의 창의력입니다. 경고할 것이 있다면, 설교원고를 너무 세밀한 논리를 따라 작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12장 예화, 웅변, 유머
즉흥설교의 위험은 부족하게 준비하고 크게 만족한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회중들과 설교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인격성과 심령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수반한다. 설교자는 수사술가라기보다 웅변가여야 한다.
문장을 완벽하게 하는 것에 비중을 두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성령에게보다 설교원고에 둔다는 것은 정말 큰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주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진리가 우선이요 그것이 크게 드러나야 되고, 예화는 그 목적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약간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예화는 하녀에 불과하다. 우리의 임무란 진리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지 우리의 상상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유머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본성이 그렇다면 허용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제13장 금기사항
1. 설교하려는 주제를 미리 알려 주어서는 안된다.
1)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2) 사람 중심의 예배를 막기 위해서
3) 주제를 해당 성경의 문맥 안에만 고립시키는 경향 때문에. 성경을 원자화하여 전체성을 일어버리게 함.
4) 청중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는 위치에 있지 않다.
2. 19세기의 두드러진 현상: 주제를 발표행습, 성가대를 가짐.
3. 1920년 이후 설교에 대한 신뢰도 상실의 원인: 토론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대화나 인터뷰
4. 방송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 오는 것을 나약하게 하고 다른 습관을 길러준다.
5. 직업주의를 피하라. 직업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동시에 기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6. 지식의 과시를 금하라. 준비하는 것에 의지하지 말라.
7. 설교내용이 너무 논증적이지 않게 하라.
8. 목사다운 목소리를 피하고 수다스러움을 피하라.
9.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라. 자아는 설교자의 가장 큰 적이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1. 오르간 사용과 시편 이외의 찬송 부르는 것을 반대함.
→ 예배당의 건축양식, 예배의식, 성가, 음악, 조명 등에 기울이는 관심 정도가 클수록, 거기에 강조점을 두면 둘수록, 영적으로는 보다 빈약해지기 쉽다.
2. 네틀튼과 피니의 논쟁
3. 결심을 요청하는 것의 문제점들.
1) 의지에 직접적인 압작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다.
롬6:17, 진리는 이지→감정→의지
2)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하다.
→ 진리 자체보다 전도자의 개성이나 희미한 두려움, 일종의 심리적인 영향을 유발.
→ 진리 자체에 대한 분별력을 감퇴시킴.
3) 말씀 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카톨릭 성례전의 문제: 성례행위 자체가 결신을 창출)
4)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과 자기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의 우려가 있다.
5)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은연중의 암시가 있다.
6) 피상적인 죄의식을 산출하게 한다. (은혜의 방편이 결신하는 행위와 연결)
7)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게 한다.
8) 중생교리의 전반적인 문제가 유발된다.
→ 눈으로 확인되는 성공과 실패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무너진다.
9)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신을 할 수 없게 한다. (사람 앞에서의 결신)
4. 호소는 설교 전체를 통해서 설교자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막간을 가진 다음에 찬송을 부른 뒤에 하는 특별한 호소와 따로 떼어 하는 호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강권할 때만 허용된다.
제15장 함정과 낭만
1. 설교를 반복하는 것
1) 설교가 실천될 때가지 반복하여 설교한다.
2) 설교자는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일이다.
3) 설교내용이 전해진 결과로 더 나아지고 발전한다.
4) 자연스러움을 연출하지는 말라.
2. 설교의 낭만
1) 예배 내에 있는 불확실성: 무엇이 일어날까를 아무도 모른다.
2) 연약한 몸과 빈약한 준비 속에서도 강단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힘.
3) 설교 준비할 때는 덮여 있던 것이 강단에서 벗겨지는 것.
4) 설교를 들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
3. 윌리암 케리; 하나님의 큰 일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커다란 일을 기대하라
제16장 영력 있는 증거
1.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
2. 면밀한 준비와 성령의 감동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3. 선지자들의 신분: 눅1:15∼17.
4. 제자들의 필요: 모든 것을 목격하였으나(알고) 더 필요한 무엇이 있었다. (눅24:46∼49)
5. 사도들의 모든 활동은 "성령이 충만하여"의 열매이다.
6. 오늘날과 사도시대의 차이
1) 신유집회에 대한 예고 없이 나타남.
2) 실패가 없음.
7. 능력과 권위로 옷입는 것의 증거; 생각의 명료함, 말의 명료함, 전달의 용이함, 설교시 굉장한 권위감과 확신, 자신의 존재 외에서 비롯되는 능력의 확신, 형언할 수 없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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