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8
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sheep and my sheep know me— 15just as the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6I have other sheep that are not of this sheep pen. I must bring them also. They too will listen to my voice, and there shall be one flock and one shepherd. 17The reason my Father loves me is that I lay down my life—only to take it up again. 18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This command I received from my Father.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상반절)
예수님은 친히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하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 선한 목자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4장의 기록을 보면 사도들이 심문을 받는 광경이 나옵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해서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다가 이튿날 끌어내어 사람들 앞에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하반절) 그러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기적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았다고 대답하면서 또한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도둑이나 삯꾼은 결코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행동, 즉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목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겉과 속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말씀의 뜻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런 권능을 가진 분이 양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셰퍼드는 구약에는 목자의 모습 아래서 하나님에 대한 많은 암시가 있습니다. 스물세 번째 시편은 성경의 고전입니다. 아마도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도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이 소박한 작은 시편처럼 세상에서 그러한 축복의 사역을 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목자"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성품과 말씀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의 지하 묘지에서는 선한 목자의 그림만큼 다른 어떤 그림도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열 번째 장은 위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어서 몇 가지 주요 제언들만 지적할 수 있다. 장의 시작 부분에서주의는 양떼에게 불려집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적용하면, 그 주름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그분의 양들을 위해 마련해 주는 피난처입니다. 양떼는 벽으로 둘러싸인 울타리로, 저녁에는 목자들이 양떼를 인도하여 밤을 지킨 목자의 보살핌에 맡기고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침에 여러 목자들이 와서 두드리고, 포터가 문을 열고, 각 목자는 자신의 양을 부르며, 그들은 그의 음성을 알고 그에게 나온다.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을 하루 동안 목초지로 인도합니다.
목자의 사랑과 보살핌은 개인적이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이든 지도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할 텐데... 벌써부터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라고 하면 우두머리라는 이미지부터 머리 속에 떠올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도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까?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할 때에 보면 늘 국민을 잘 섬기겠다고 말은 하지만...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장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그런 지도자의 역할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선한 목자는 또한 자신을 그분의 양 떼의 인도자로 제시합니다. 그분은 "그들을 이끌어 내십니다." "그가 그들 앞에 가고, 양들이 그를 따르느니라." 그분은 그들을 몰아내지 않으십니다 - 그분은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은 그분을 따릅니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합니다. 그들은 그분이 그들을 데려가시는 곳마다 안전하다는 것을 압니다. 양들은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처럼 자신의 길을 찾는 본능이 없습니다. 특정 종류의 개를 어느 곳에서나 내려 놓고, 이전에 머물렀던 곳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두면 본능적으로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어디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우 쉽게 길을 잃고 고의적이고 방황합니다. 그들은 인도될 필요가 있으며, 신성한 인도가 없이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신다면, 그분의 양인 우리는 순종하고 기쁘게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어려움과 위험에 자주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처럼 그분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낯선 자는 따르지 아니하리니 그에게서 도망칠 것이니, 이는 그들이 낯선 사람들의 음성을 알지 못함이니라." 이것은 항상 양들에게 해당됩니다. 낯선 사람의 음성은 그들을 두렵게 하며, 심지어 그가 그들의 올바른 이름으로 그들을 부를 때조차도,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모방하여; 그들은 그분께 나아오기보다는 그분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음성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도 그래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듣는 음성이 실제로 그들의 목자의 음성이 아닐 때를 알아야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젊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경험이없는 그리스도인들의 귀에 끊임없이 떨어집니다. 그들을 무리에서 벗어나 방황의 길로 유인하고 파멸로 끝나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그분의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덜 사랑하게 하고 그분을 덜 자신 있게 신뢰하게 하려는 거짓 가르침이 있습니다. 순수함과 진리의 메모가 부족한 쾌락의 권유가 있습니다 - 낯선 사람의 목소리. 이익을 제공하고, 보상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손실과 상처와 파멸 만 가지고있는 것들에 대한 초대장이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며, 불행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목소리를 기꺼이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하는 사람들은 종종 위험과 파괴로 유혹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는 음성이 목자의 음성이며,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것들에만 그리고 항상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예수은 선한 목자일 뿐만 아니라 문이기도 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문은 들어가는 길입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인정됩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1:12 참조). 이것은 항상 열려있는 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와서 그것을 닫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도시로 표현할 때, 요한계시록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는데, 네 면에는 각각 세 개가 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든, 우리는 항상 입구의 문을 발견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무리에 들어갈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공급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들어가면 내게서 구원을 얻으리니 들어오고 나가서 목초지를 찾으리라." 목자는 양 떼를 먹이는 것을 잘 본다. 그분은 양들을 푸른 목초지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그들을 위한 음식을 찾기 위해 도처에서 찾아다녔다. 한 지점이 여름 더위로 불타 버리고 양 떼를위한 더 이상 준비가되지 않을 때 목자는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마다, 우리는 항상 그분이 우리를 어떤 선한 것, 어떤 공급, 어떤 축복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목초지이며, 그곳의 목초지는 항상 선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여는 곳마다, 우리는 굶주림을 먹일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다른 책들에는 유독 한 가르침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의 모든 단어는 우리 삶에 건강에 좋은 음식입니다. 섭리의 밭은 또한 그리스도의 밭입니다. 삶의 모든 일반적인 방법으로 -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음식을 찾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올바른 방법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그의 양떼를 어두운 골짜기를 통해 인도했을 때, 그것은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목초지를 찾을 수있는 곳으로 데려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는 투쟁, 시련, 상실의 어두운 방법을 통해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이것이 그분께서 그들을 기다리시는 어떤 선한 길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일에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 동방 목자는 종종 그분의 양 떼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다윗은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야생 동물에 대항하여 양떼를 방어하는 목자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때때로 그는 심지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잃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는 그분께 상처를 입으셨으며, 우리가 언제 그들을 받으셨는지 묻는다면, 그분의 대답은 "내 양을 변호함으로!"입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양들은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모든 양 떼가 함께 모일 큰 가정 모임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다른 양들, 이 무리에 속하지 아니한 양들: 그들도 내가 데려와야 하노라... 한 겹과 목자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가장 슬픈 점 중 하나는 신자들을 다른 교단으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모일 것이며, 마침내 모든 것이 한 목자와 함께 한 무리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홈지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Ludwig Feuerbach -Essence of Christianity (0) | 2022.09.22 |
---|---|
법신학의 존재론적 가치와 의의 (0) | 2022.09.05 |
죄로부터 자유함을 (0) | 2022.09.01 |
무위진인(無位眞人) (0) | 2022.08.29 |
음악으로 가는 길 (0) | 2022.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