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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문

남은 자의 고난

by 이덕휴-dhleepaul 2023. 4. 30.

날자: 2023.04.30

말씀:골로새서 1:22-25
제목: 남은 자의 고난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본문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1:23).

 

문맥 읽기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1. 고난의 기쁨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본문 24절과 25절에서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직분을 받아 교회의 일꾼이 되었고, 이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고난도 자신의 육체에 채울 만큼 기꺼이 기쁨으로 감당하려 함을 말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사도가 그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그 속에 있는 깊은 내면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24절 전반부에서 사도는 “너희를 위한 괴로움”이라고 하여,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며 받은 괴로움은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의 박해와 이방인으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핍박과 같은 것이다.
사도는 복음을 위하여 그가 당하는 이런저런 고통과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며,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종, 구원받은 성도라면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트 대요리 문답 제1번의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분명히 사도는 자신의 매임이 복음을 위해서는 유익이라 보아, 그 스스로 시편기자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 아니겠는가(롬 8:18)

 

2. 남은 고난


24절 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한 고난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의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여러 가지 괴로움을 말하는 동시에, 이러한 고난은 사도를 포함한 성도들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역시 동일하게 마음을 아파하시며 함께 그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따라 온 것이다.

 

즉, 여기서의 고난은 보편교회적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프면 머리도 아프고, 머리가 아프면 몸도 아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 것이며 머리되시는 주님의 지체가 되는 우리 남은 자들의 몫이 주님의 고난과 함께 동시적으로 받은 괴로움을 함께 누리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만나성도 여러분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얻어지는 유익에 함께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아~~~~~~~~멘

그런데 사도는 이와 같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고 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당하는 괴로움은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며, 그가 육체로 겪는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가 여기서 채운다는 말을 사용한 것은, 기꺼이 고난을 당할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정도와 수량에 있어 넘치도록 받는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괴로움을 기쁨으로 받듯이 그렇게 꽉꽉 채우겠다는 것, 그리고 이것도 감사함으로 감내하겠다는 각오와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3. 하나님이 주신 직분


사도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당하는 괴로움을 기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울 수 있는 데는 이 직분이란 그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소명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위임명령이자 선교명령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직분은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있음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직분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르심을 따라 소명을 주신 바로 ‘청지기 직분’(눅 16:2-4)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직분은 비단 바울 사도만 받은 것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그 부르심에 따라 소명을 주셨고, 그 소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가 바로 직분이며, 또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받은 분깃입니다.

따라서 넓게는 직분이 직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그 직을 가지는 것 역시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산이자 심부름이요 마땅히 처신해야 할 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질그릇에 담음 보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소명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를 향하여 “네 발에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 한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다.

 

- 이야기 한 토막 - 전주 치명산 이야기 https://barongl.tistory.com/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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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이야기는 내가 존경하는 사도 법관 홍섭 김판사님의 책, 무상을 넘어서 에서 읽은 글입니다.

 

조선 시대 천주 교회사에 보면 ‘동정 부부’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부이지만 동정을 지키면서 사는 부부를 말합니다. 1700-1800년대는 조선시대에 유교가 한창일 때인데 이 때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유교시대인 만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혹했던 때입니다. 유명한 한 천주교 신자 가정에 이순이라는 딸이 태어납니다.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여러모로 뛰어났고 신앙심도 투철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곧 이 당시는 처녀가 혼자산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를 찾아 갑니다. 주 신부님은 중국에서 온 선교사로서 몰래 천주교를 전파하였고 끝내 순교를 당한 신부입니다. 이순이는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어느 천주교인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그 집의 아들 중철이가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믿음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 결혼 생활도 3년만에 마칩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고,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천주교 박해시 체포되고 끝내 순교를 당합니다. 이 때 중국 선교사 주준모 신부도 함께 순교 당합니다. 주 신부님은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 오는 길을 택하고 곧 체포되어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주 신부님의 중매로 두 사람은 동정 결혼을 하였고 3년 후 세 사람 모두 순교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울 수 있는 각오는 물론, 복음을 위하여 괴로움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넓게는 우리가 갖는 직업 속에서도 거룩한 소명의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신학원 졸업논문 마지막 소절로 인용했던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씀일 수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갖가지 마귀들의 유혹으로부터 받는 고난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그 고난을 주님 혼자 감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했듯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되는 우리가 그 고난의 분깃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주님가 우리는 이제 형제입니다ㅣ 아바 아버지의 양아들과 독생자의 관계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소명을 함께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늘의 상급으로 알고 지금의 고난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ㅣ . 할렐루야~~~

 

맺음

현세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은 사랑의 법을 내가 성실히 지키는 일입니다.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사도가 말하기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라고 했다"(cf. 롬 13:8). 우리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본문의 명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고 나아가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cf. 옙 3:17-19).    

 

더 알아볼 수 있는 곳 - https://kcboston.org/ministry/?p=829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골로새서 1:24-29) 03/19/2017 | Korean Church of Boston

조선 시대 천주 교회사에 보면 ‘동정 부부’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부이지만 동정을 지키면서 사는 부부를 말합니다. 1700-1800년대는 조선시대에 유교가 한창일 때인데 이 때 천주교가 전파되

kcbost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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