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eles-Nikomachische Ethik(~ 322 vor Chr.) Übersetzung: Eugen Rolfes, 1921
Aristoteles - Ethik: Eudämonie (textlog.de)
《니코마코스 윤리학》(고대 그리스어: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은 도덕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담은 책이다.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리케이온에서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하레스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바치는 형식이거나 그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이 책에서 윤리학은 정치학에 직결되고 일체화되어 있다. 우리들의 행위는 모두 그 어떤 선(善)을 희구하는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가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선의 실현보다도 국가적 선의 실현이 궁극적이고 신적(神的)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때문에 모든 선을 연구하는 윤리학도 통수(統帥)나 가정(家政)이나 변론이란 제학(諸學)과 더불어 정치가에게 결부되는 것이어서, 이 사실은 10권의 종장(終章)에서 명백해진다.
선 내지 최고선은 행복이 되므로 행복의 문제가 1권 4장 이하에서 다루어지고 다시 10권에서 결론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행복은 결국 영혼의 덕(德)을 따른 유동(流動)에 불과하므로 영혼의 두 부분―아로곤(無理的)·로곤(有理的)―에 입각한 두 개의 덕, 즉 윤리적 덕과 지성적 덕을 논하게 된다. 2권에서 5권에 걸쳐 에티케 아레테(윤리적 德)에 관한 일반론과 각론이 전개되고 다시 6권에서 지성적 덕이 논구(論究)된다. 윤리적 덕은 에토스(습관)에 의하여 생기는, 즉 쾌고(快苦)를 수반하는 행위의 습관화에 따른 것이다. 덕이란 이(理)에 의하여 결정된 중용(中庸)에서 성립되는 행위 선택의 상태라고 규정된다. 중용이란 두 개의 악(超過와 不足)의 중간을 일컫는다. 덕을 로고스(比)적으로 본다면 중간이지만 '최고선'이라든가 '좋음'에서 본다면 정점(頂點)인 것이다. 요컨대 덕이란 파토스도 능력도 아닌 성격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중용에 있는 것이다. 프로네시스(思慮)는 지성적 덕이지만 누스(理性)나 소피아(知慧)와도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온갖 선과 악에 관하여 이(理)를 수반한 진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론적인 학문이나 제작 기술과도 달라서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관계되는 사려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다. 말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의 사려도 정치적 사려이다.
7권 후반과 10권 전반에 쾌고(快苦)와 선악 내지는 덕과의 관계가 언급되는데, 전자는 아소스 시기의 것이며, 다시금 발전한 후자에서는 쾌(快)를 에네르게이아(現實態)로서 포착하여 젊은이의 상냥함에 비유된다. 인간의 쾌라 함은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다운 적극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 8권·9권의 필리아(友愛)론도 행복인 덕론(德論)을 보충하는 중요한 것이다. 필리아는 서로가 알려져서 마음에 지니는 호의(好意)이다. 완전한 필리아는 덕이란 점에서 동류(同類) 사이에 성립되지만 드물다. 자기의 이성을 사랑하는 자애(自愛)를 중심으로 이기(利己)와 이타(利他)가 문제로 되어 있다.
10권 후반에는 궁극적인 행복을 이성의 활동에서 구하여 그것이 자족적(自足的)이고 한가해서 인간에게 가능한 한도의 무피로적(無疲勞的) 기타 조건을 모두 갖추어 신적(神的)으로 되면서도 이 순수 관조(觀照)로서도 이것을 함께하는 자가 있다면 더욱 좋다고 하는 부언을 잊지 않는다. 결국 덕과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자족적인 순수 관조마저도 인간의 경우에는 친애에 의하여 보완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덧붙여 말하면 10권 종장에서 청소년을 덕으로 바르게 인도함에는 법률이 필요한 것과 법률과 국제(國制)의 수집이나 검토가 인간에 관한 철학을 완전하게 한다고 역설한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련을 알려준다.
저스티스(Justice) 즉 '정의'(正義)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윤리학(Nicomachean Ethics) 제5권 정의론에서 정의는 평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1][2]
목차
- 제1권 좋은 삶
- 제2권 성격적 탁월성
- 제3권 탁월성의 조건과 개별적 탁월성
- 제4권 개별적 탁월성들
- 제5권 정의
- 제6권 사유의 탁월성들
- 제7권 자제력 없음과 즐거움
- 제8권과 제9권 친애
- 제10권 즐거움과 좋은 삶
제1장.
[정치의 일부로서의 윤리]
(1094a) 모든 예술과 모든 교리, 모든 행동과 모든 결정은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으로 적절하게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목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활동이고, 다른 것들은 어떤 일이나 그 밖의 것들입니다. 행동 외에 어떤 목표가 있는 곳에서는 그 성격의 것들이 활동보다 훨씬 낫습니다.
행동, 예술 및 과학이 많기 때문에 많은 목표가 있습니다.
치유의 예술의 목표는 건강이고, 조선의 목표는 배이며, 전략의 목표는 승리이며, 경제 예술의 목표는 부입니다. 그러한 활동이 하나의 재산 아래에 있는 경우, 예를 들어, 마구 및 말 제조에 종사하는 기타 거래는 기마술의 기술 아래 있으며, 이러한 활동은 전쟁을 향한 모든 활동과 함께 전략 하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 중에서도 건축의 목표, 즉 관리 활동은 항상 부하의 목표보다 더 우수합니다. 후자는 전자를 위해서만 박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앞서 언급 한 예술의 경우처럼 활동 자체가 행동의 목표를 형성하든 아니면 그 이외의 다른 것을 형성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행동의 한쪽 끝이 있고 다른 쪽 끝은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원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른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문제는 무한정 계속될 것이고 인간의 욕망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끝은 분명히 선하고 최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지식은 또한 삶에 큰 의미를 지니고 고정된 목표를 가진 궁수자리처럼 우리가 더 잘 맞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적어도 개요를 제시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과학이나 재산에 속하는지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가장 권위 있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선도적인 과학에 속하며, 그것은 분명히 정치가입니다. 그것은 어떤 과학이나 예술과 공예가 주에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개인이 어느 정도까지 배워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1094b) 우리는 또한 가장 가치 있는 자산들, 즉 전략, 경제, 수사학이 그것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실용 과학을 그 목적에 봉사하고,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권위 있게 규정하기 때문에, 그 목표는 다른 사람들의 목표를 더 높은 목표로 포함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이 목표는 최고의 인간 선이 될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마찬가지라면, 공동체의 선익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 크고 더 완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참된 선을 위해 돕는다면 매우 만족할 수 있지만, 이것이 사람이나 국가에서 일어난다면 더 아름답고 신성합니다. 이것이 국가 교리의 일부인 현재 규율의 목표입니다.
프레젠테이션에 관한 한, 주어진 자료가 허용하는 확실성의 정도에 도달하면 만족해야합니다. 정확성은 모든 조사에서 동일한 정도로 추구되어서는 안 되며, 예술과 공예의 다양한 제품에서 추구되는 것 이상이어야 합니다.
정치학이 조사하는 도덕적 선과 정의로움은 자연이 아니라 법에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모순과 불변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비슷한 무상함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의해 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다양한 재화와 혜택에 집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부 때문에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용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시가 그러한 목적과 관련이 있고 그러한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경우에는, 진리를 더 거친 골자로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더 일반적인 사건만 다루고 가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또한 그러한 것만을 추론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청취자는 개별 움직임도 녹음해야 합니다. 이것은 감정가에게 문제의 본질에 의해 허용되는 정확성의 정도가 각 분야에서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 주며, 수학자의 확률을 가정하는 것은 평의회 회의에서 연사에게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만 올바르게 판단하며, 이에 대해 좋은 판단자입니다. (1095ᄀ)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그 주제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는 정치학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는 실생활, 주제 및 모든 정치 교육의 전제 조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합니다. 또한 그가 열정을 추구한다면, 그 목적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에이 가르침을 헛되고 쓸데없이 듣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이가 부족하거나 성숙한 성격이 부족하든 상관 없습니다. 부족함은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살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선택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지식은 선을 원하지만 그것을하지 않는 금욕적인 사람들에게만큼이나 쓸모없는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은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합리적으로 정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듣는 사람, 우리가 이해받기를 원하는 방식, 우리가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한 소개로 많은 것이 쓰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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