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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by 이덕휴-dhleepaul 2019. 8. 16.



01.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

 

 

 

 

 

 

 

9월 초하루 히틀러의 명령 한마디에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고 뒤이어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폐제(廢帝) 카이저는 히틀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충고를 하였다. 6천만 명의 독일 국민을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패전의 책임을 진 채 20년을 해와 달을 벗 삼아 지내는 동안 그는 회오(悔悟)의 한숨이 안 나오는 때가 없었다. 지구에 불을 질렀던 잘못을 그는 해와 달의 말없는 얼굴에서 깨달았다. 그리하여 히틀러에게 '그대는 제 2의 카이저가 되지 말라. 나의 오늘의 생활을 그대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노파심이라면 노파심일 따름이겠으나 대전의 불속에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선배로서 보내는 교훈이라면 후배인 히틀러로서는 응당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나 그는 들은 대꾸도 안 했던 것이다. 다만 카이저에 보내는 대답 대신으로 '진군이다'라는 것을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히틀러는 왜 지구에 불을 질렀는가, 위대한 방화자 히틀러는 무슨 야심으로 방화를 했는가.

 

 

- 1939923일 동아일보 5, 구주전란(歐州戰亂)의 이모저모() : 대전(大戰)의 방화자는 독일, 히틀러는 제 2의 카이저가 될 것인가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의 시작.

 

193991일부터 106일까지 약 1달 동안 나치 독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당시 독일의 괴뢰국),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른 강대국들의 싸움에 가려졌지만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나라 중 하나이며 소련(동부전선)과 중국(중일전쟁)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사망자(민간인과 군인 모두 포함)가 발생했다. 폴란드 인구의 16%'''가 전쟁 기간 중 목숨을 잃었으며 폴란드의 물적 자산의 20%가 파괴되었다.

 

 

2. 배경

 

 

2.1. 영국, 프랑스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된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는 동시에 군비를 무제한으로 늘리겠다고 주장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흠칫했지만, 갓 취임한 히틀러를 그냥 입만 살아 있는 선동가라고 생각했으므로 이런 발언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1934년 히틀러는 대통령과 수상을 합친 직위인 총통에 올라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서 절대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독일에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자마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히틀러의 침략 논리는"독일인이 사는 곳은 모두 독일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비무장지대로 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의 위반이었으나 원래 독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이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에 발끈해서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히틀러는 쥐트티롤을 이탈리아 영토로 인정하여 국경을 확정해 무마했다. 이런 사례 같이 히틀러를 용인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성은 시쳇말로 약한 외교로서 후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하는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30~40대의 대부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참호전을 겪은 참전 용사들이라서 어떻게 해서든 전쟁은 피했으면...하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소극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파악한 히틀러는 이웃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수데텐란트(Sudetenland)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히틀러를 막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를 배신하고 수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떼어 주면서 다시 전쟁을 회피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영불의 대표단에게 "이번만 봐 주면 다시는 안 그러지." 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만에 히틀러는 뮌헨 협정으로 보장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무시하고 체코를 병합, 슬로바키아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괴뢰국으로 만들며 영불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공공연히 다음 목표로 외치고 있는 폴란드의 단치히 회랑(Danzig Corridor) 문제에서 폴란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대독일 전략은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방식의 방어를 공고히 하고, 기타 국가들로 독일의 뒤를 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타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로 모두 프랑스의 전략에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중 폴란드를 빼고 모두가 독일에게 잡아먹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폴란드가 사라지고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후방 안전이 확실히 보장된 독일과의 11 전쟁'은 프랑스에게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고, 그래서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폴란드에 대한 독립 보장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근본적인 배경은 단치히 회랑 문제였다. 독일 통일의 핵심 주역인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동서로 쪼개지고, 그 가운데 회랑 지역을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가 얻게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핵심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Gdańsk)는 단치히 자유시로서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선 동프로이센과 그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월경지가 된 동프로이센 지방과 본국과의 연결은 절실한 문제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대두 이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단치히 회랑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1934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수데텐란트를 접수하더니 19393월에 체코를 합병해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단치히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330일 유사시 폴란드에 대한 군사 원조를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경 지대의 조그마한 땅을 얻기 위해 뮌헨 협정에 가담한 폴란드였던 만큼, 그단스크 문제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주장에 의하면 그단스크의 할양이 폴란드 회랑의 무력화라고 보기 힘들고, 히틀러도 폴란드에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대신 그단스크 25년 자유 이용권을 준다는 것이었으나, 놀이공원이냐 폴란드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미 폴란드 회랑에 그단스크를 대신하여 건설한 그디니아(Gdynia; 독일명 고텐하펜(Gotenhafen))의 물동량이 그단스크를 넘어선 상황이었으므로 그단스크 할양이 폴란드 회랑 할양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독일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외교적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는 것과 폴란드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체코의 문제로 히틀러의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폴란드는 주변 모든 국가에 분쟁을 일으킨 나라답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실제 그단스크 문제는 1938년 후반부터 독일-폴란드 간 외교 교섭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폴란드는 히틀러의 의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거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단스크가 독일이 폴란드에게 원하는 최소한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영토를 강탈한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독일인 전체의 바람이었다. 단지 그 범위가 차이 났을 뿐인데, 그단스크, 폴란드 회랑, 포즈난(Poznań; 독일명 포젠(Posen))의 순으로 중요도를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적인 요구인 그단스크도 폴란드가 거부하면 독일 내부는 히틀러와 나치당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치히 문제에서 폴란드의 거부가 이어지자, 히틀러는 점차 폴란드를 대화 상대로 삼기를 포기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폴란드에 순차적으로 강경한 요구를 꺼내고 대 폴란드 전쟁을 준비했다. 1938년에는 단치히와 회랑 통행권을 요구하던 독일이었으나 1939년 초에는 회랑까지, 19394월부터는 전쟁 계획을, 8월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 침공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여기에 뮌헨 회담과 체코 합병으로 외교적으로 자신감이 생기는 한편 독일의 국력이 강해졌다고 인지하게 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1938년의 제안만으로 독일이 폴란드를 내륙국으로 만들 요구를 했다는 것은 자료의 일부만 보고 말한 것이며, 히틀러가 처음에 요구한 것은 그단스크와 회랑 통행권이라는 것이 당시 독일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만 살펴봐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토적인 면에서 봐도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로 넘어가면 사실상 회랑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영해의 폭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독일뿐 아니라 폴란드도 그단스크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 그단스크에 폴란드의 소규모 군대가 주둔하며 세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대로 하면 독일 영토가 되는 그단스크를 폴란드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된다.

 

 

 

193810월 말에 리벤트로프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를 포함해서 그단스크를 독일에 돌려주고 대신 단치히 지역에서 폴란드에게 무상으로 항구를 제공하고 또 국경선을 공동으로 지키면서 불가침 협정을 25년으로 연장하는 안에 합의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모든 이견을 일거에 해결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 히틀러 평전 2P217, 이언 커쇼

 

 

그리고 통행권은 우습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회랑 통행권을 나치 독일에게 부여하면 앞서 언급한 그디니아를 포함해서 사실상 회랑 전체의 통치권을 상실해 버린다.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철도로 독일 군대와 민간인이 제집 드나들듯이 폴란드 회랑을 드나들 것이 뻔하며 철도 부지가 사실상 독일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도 있다. 새로 건설된 그디니아의 물동량이 그단스크의 그것을 넘어섰다고는 하지만 그단스크는 여전히 폴란드의 무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38년 당시 폴란드 수출에 있어 46.1%의 폴란드 제품이 그디니아를 경유했지만 동시기 그단스크도 전체 수출품의 31.6%가 경유했던 무역항으로 전체 폴란드 수출에 있어 여전히 1/3에 이르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는 그단스크뿐만 아니라 폴란드 회랑 지대를 횡단하는 철도 부지까지 내놓으라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단순 계산상(그디니아+그단스크)으로도 폴란드 수출 물량의 77.7%가 막히게 된다. 이미 독일과의 무역 전쟁과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던 폴란드에게 이런 요구는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치외법권 자체만 따져도 타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해치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대사관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등 매우 좁은 범위만 적용하는데, 위의 인용문을 보면 치외법권 수준이 아니라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중 단치히와 연결되는 것을 통째로 독일에게 할양하라고 적혀 있다. 이러면 독일이 아주 인심을 써서 도로 1개와 철도 1개만 이 주장을 적용했다고 해도 해당 도로와 철도가 폴란드 회랑을 횡단하기 때문에 폴란드 회랑은 말 그대로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이로써 폴란드의 바닷길은 확실하게 차단된다. 이 정도면 칼만 안 들었지 강도 수준이다.

 

원래부터 자국 국경에서의 검문 검색 및 통제권은 국가의 주권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게 무너지면 사실상 영토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의 유럽연합 같이 자국 영토의 통행권을 민간인에 한해 타국에게 부여하는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가능해진 것이며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직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런 주장은 말만 그럴싸했지 땅을 바쳐라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얼토당토 않는 것이 그때까지 독일이 이미 폴란드 회랑 지역의 도로를 계속 사용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요구를 들이민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은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할양하는 것과 더불어 당시 나치가 이끌던 방공 협정(Anti-Comintern Pact)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이때 폴란드는 독일뿐 아니라 동쪽의 소련과도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기에 이는 폴란드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를 독일의 괴뢰국으로 만들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독일은 폴란드를 123년이나 분할 점령 통치한 입장이다. 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인해 간신히 독립한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통행권 요구를 빙자해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명백한 자국 영토를 다시 뜯어가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그 영토가 국가 멸망 전에도 폴란드의 영토였고, 신생 폴란드에게는 유일한 해양 출구인 폴란드 회랑이라 중요성도 크며, 백번 양보해 독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고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이 추가 요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2.3. 독일의 경제 위기

 

 

히틀러와 나치당은 훗날 케인즈식의 경제 정책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치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어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였다. 히틀러는 독일의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쟁 준비에 매달렸다. 군수 산업을 팽창시키고, 효율적인 군수 업무를 위한 사회 인프라에 건설에 매달리다 보니 1930년대 후반에는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미국이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몰빵하여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과는 방향은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나 민간 인프라와는 달리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 방면에만 몰빵한 결과 독일 정부는 재정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 지출을 늘리면서 적자 예산을 편성한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는 누적된 재정 적자로 파산의 그림자가 닥쳐왔다. 히틀러로서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면 전쟁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한몫 단단히 챙겨오지 않는 한은 정부 재정은 붕괴하고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도에 맞게 나치 독일군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우선 그 나라의 중앙은행을 털어서 금괴를 독일로 운송하는 짓을 제일 먼저 하곤 했다. 이렇게 다른 나라로부터 강탈한 금괴가 수백 톤이고, 이것은 전후 '히틀러가 숨겨놓은 비밀 금괴'의 떡밥이 되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입장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영국-프랑스의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침공을 강행하게 된 한 이유였다.

 

 

2.4. 소련-폴란드 국경분쟁

 

 

폴란드는 동쪽의 소련과도 국경분쟁이 있었는데 원래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가 독립할 때쯤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러시아 내전 때문에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반혁명세력(백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친폴란드 백군은 전황이 불리하자 폴란드에 원조요청을 했고 폴란드는 이를 기회로 우크라이나를 먹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출병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집권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직 소련 성립 전이었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소비에트군(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연합으로, 아직 양국이 소비에트 '연방'으로 묶이기 전이다.)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해 온 폴란드군을 격퇴했으나 패주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소비에트군이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근처에서 대패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군은 패퇴했고 반혁명 세력의 창궐로 다른 곳이 다급해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의 1/6과 벨로루시의 절반 정도를 폴란드에 떼어주고 정전 협정을 맺었다.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서부가 폴란드에 합병되자 정교회 성당이 파괴당했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나머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 출범하자 거기에 가입해 소련의 일부분이 된다. 소련의 일부가 된 우크라이나는 이후 미증유의 기아 사태인 홀로도모르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폴란드는 동서로 소련-독일이라는 양대 강대국과 모두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 폴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2.5. 독소 불가침조약

 

 

나치 집권 후에 독일이 노골적으로 반소련 정책을 취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방(영국-프랑스)과의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서방국가들을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으나, 소련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양국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 특히 폴란드는 독일이 침공하더라도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극렬 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과 서방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자신의 침략 전쟁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면 이후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였다. 스탈린도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고, 결국 양 독재자는 의기투합하여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이 전격적으로 폴란드와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를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에 여러 경로로 압력을 넣었다. 19394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맺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잇달아 파기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던 823,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것이 엉클어졌다.

 

히틀러는 소련의 동의를 얻어낸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영불 양국은 1938년에도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군부에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고, 곧 백색 작전(Fall Weiß)이라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원래는 826일 새벽 4시에 침공 작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825일에 폴란드-영국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자 시행이 한 차례 미뤄진 후 91일이 되어서 작전이 개시되었다.

 

 

2.6. 자작극과 개전

 

 

8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의 한 방송국에 폴란드군 소규모 병력이 기습 침투를 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문을 낭독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하였던 알프레드 나우요크스의 지휘로 이루어졌던 독일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 요원들이 쌩쑈를 한 다음, 폴란드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죄수들 시신을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91일 새벽 독일은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폴란드를 기습했다.

 

 

독일군은 전통적인 포위섬멸전 교리에 따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가해 폴란드군의 퇴로를 끊은 다음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자제하고, 대신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여기에 당시 독일의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베르놀락 야전군(Field Army Bernolák)이 남부집단군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여 대규모 공세를 실시, 양군이 비스와 강 유역에서 합류하여 국경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폴란드군이 미처 퇴각하기 전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총 병력 150~180만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이외에도 베르놀락 야전군 소속 5만여 명이 함께 동원되었다(훗날 베르놀락 야전군의 일부인 고속 기동 부대 칼린치악(Kalinčiak)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공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으로, 총 병력은 886천여 명(8, 10, 14)에 이르렀다. 8군과 10군이 폴란드 영토 중앙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결정적인 공세를 가하고 14군은 슬로바키아, 헝가리 국경을 따라 폴란드 영토 남쪽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10군에는 독일군 기갑 세력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폴란드 중앙부의 북동부 지역까지 진격하여 결정적 공세를 가하는, 독일군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주공인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주공이었으니 이 평가는 전혀 아깝지 않다. 특히 10군의 진격로 상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중공업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페르디난트 차틀로시(Ferdinand Čatloš) 지휘 하에 3개 사단으로 편성된 51,306명의 병력을 보유한 친독 슬로바키아군 또한 폴란드 남부 국경으로 진군하여 독일군을 돕게 했다.

 

한편 페도어 폰 보크의 북부집단군(3, 4, 예비 사단 4개로 구성, 총 병력 63만 명) 4군은 단치히 회랑을 관통, 동프로이센과의 육상 교통로를 형성하며, 동프로이센에 있던 3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포위망의 북쪽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들은 비스와 강에서 합류, 바르샤바 서부에서 폴란드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이후 주력이 사라지고 예비군 동원이 채 끝나지 않은 폴란드를 짓밟으며 수도 바르샤바로 곧장 진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폴란드 내부의 독일인들이 제 5열을 형성하여 호응하기로 되어 있었다. 합계 150만의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에 동원되었다. 히틀러는 831일 침공을 91일 오전 445분부터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이 남부 전선을 주공으로 삼은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폴란드 중화학 공업 지대와 탄전이 폴란드 남부 지역에 밀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부 폴란드-독일 국경 지대 중 상() 실롱스크(Górny Śląsk)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폴란드와 독일의 주요 분쟁지역으로, 해당 지역은 탄전과 광산이 밀집,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분쟁을 거쳐 상부 실롱스크는 분할되어 32%는 폴란드에, 68%는 독일에 귀속되었는데 폴란드에 넘어간 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가치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독일 사령부는 폴란드의 남부 국경을 주공 방향으로 잡았다.

 

당시 4천여 기에 이르렀던 공군기 중 60%2,315기와 전체 기갑 전력의 85%인 전차 2,750대 및 장갑차 1,094, 야포 9,000문을 폴란드 방면으로 배치했으며, 6개 기갑사단이 폴란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 전차 중 3호 전차와 4호 전차는 모두 합쳐 310대뿐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제 LT vz. 35LT vz. 38 역시 각각 120, 57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1호 전차와 2호 전차(1,127)였다. 특히 1호 전차의 경우는 그냥 철판 위에 기관총만 달아 놓은 격이었던 TKS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았지만 7TP와 마주치면 그야말로 학살 수준으로 터져나가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속 터지게 만들었다. 대전 초기 서방 연합국에 비해 빈약했던 독일의 기갑 전력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1939년 당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공군 중 하나로 조종사들의 기량과 항공기의 성능도 수준급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영토 전역에 폭격을 퍼부어 폴란드군의 진격을 방해하고 군수 물자 생산 지역을 파괴할 것이었다. 특히 Ju87 급강하폭격기가 이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군사 작전 이외에 독일군은 폴란드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계획도 짰다. 탄넨베르크 작전(Operation Tannenberg)에 의하면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이후 61천여 명의 폴란드 엘리트들을 처형하기로 되어 있었다. 침공이 시작된 후 독일군은 폴란드 민간인 2만여 명을 처형했으며, 이 중 2천여 명은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독일 내에서 학살된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다.

 

 

 

폴란드군의 계획은 철저한 방어전이었으며 반격은 빨라도 개전 2달 후 예비군 동원이 완료되고 서부전선의 영국군, 프랑스군이 공세전에 나서는 시점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 폴란드가 목표로 했던 것은 절대적인 시간 벌기, 즉 지연전이었다. 독일의 침략이 목전에 다가오자 폴란드는 예비군의 부분 동원령을 선포했다. 당시 폴란드 육군은 숫적으로 100만명의 대군이었지만 이중 상비군은 283천여 명(장교 183백여 명, 부사관 43천여 명 포함)이었으며 70만 이상의 인력은 예비군으로서 전시에 동원될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중앙에 대규모 산업 시설을 건설하여 침략군에 맞설 현대적 무기를 생산할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방어 계획에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전 영토 절대 사수 개념이었다. 폴란드의 방어 계획 핵심은 국경에서의 방어전이었으며 국경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후퇴하여 최종적으로 비스와(Wisła) 강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폴란드군의 주력 부대는 모조리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마주한 국경선 지역이 근본적으로 너무 길었으며(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2,000km에 달했고, 여기에 뮌헨 협정으로 인해 연장된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국경선 800km까지 더하면, 뿐만 아니라 이 국경선은 거의 대부분 드넓은 평야 지대로 제대로 된 자연적 방어선도 없었다) 국경선과 그 부근에는 방어선으로 쓸 만한 지역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비군 동원까지 완료해도 과연 국경선 전체를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이 가는 실정에서 상비군만으로 국경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무리수라는 결론이 나온 지 오래였다.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처럼 국경 지대에 각종 장비를 설치하고 부대를 배치, 기지 설치 등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애초에 국경선이 2,800km에 이르는 데다가 자연적 방어선의 이점도 없이 모든 걸 새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있던 현대적 무기들마저 외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폴란드가 이걸 혼자서 완수하기는 무리였고 방어선이 완성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방 연합군 및 폴란드군 소수파는 국경 방어를 포기하고 비스와 강 동쪽에 주력을 집중시켜 방어하기 용이한 비스와 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략·전술적으론 현명해도 폴란드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이 전략을 채택한다면 폴란드는 자국 최대의 산업 및 광산 지대, 핵심 인구 밀집 지역을 포기해야 하며 그 면적도 국토의 절반이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소련군이 동부 국경선을 공격하지 않았을 때나 유효했으며 비스와 강은 철벽 방어선으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방어선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비스와 강이나 그 외의 다른 폴란드 내륙 지방에 위기상황을 감안해서 방어선 구축이나 요새 건설을 해놓은 것이 거의 없으므로 후퇴해서 방어선을 지킨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었다. 또한 비스와 강을 방어선 삼아도 문제가 되는게 비스와 강 너머에 있는 동프로이센 주둔 독일군이 방어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동프로이센과 폴란드 중심부 사이를 나레프(Narew) 강이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이 나레프 강은 비스와 강보다도 폭이 좁은 강이었다. 폴란드 자체가 국가 방어에 매우 불리한 것이, 폴란드 공업 중심지와 인구 밀집 지역, 광산지역이 서부 지역에 있었고, 폴란드-독일 국경 자체가 바로 이 지역을 둘러싸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의 방어선은 너무 과도하게 독일군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늘어진 감이 있다. 당장 폴란드 회랑도 개전 3일 만에 분단되는 판국이다. 차라리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 지역의 병력을 빼내어 중앙과 남부의 산업 지대를 보호하거나 비스와 강의 방어선을 강화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폴란드는 독일군의 주공이 단치히 회랑 쪽으로 집중될 것으로 오판하고 단치히 및 동프로이센 주변에 주력의 1/3을 집중 배치했다. 사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판단으로 단치히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 만큼 독일이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강점하고 폴란드의 반격 역량을 소멸시키는 선에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 전 영토의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평전을 쓴 이언 커쇼에 따르면 히틀러는 전면적 승리가 확실시된 그 순간까지도 폴란드 처리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치히 회랑과 과거 독일 제국이 지배하던 폴란드 영토만 차지하고 나머지를 괴뢰 독립 국가로 두는 방안도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독일군이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고 다만 전쟁 후에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단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폴란드가 독일의 위협을 제대로 감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군에 대한 현대화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폴란드도 나름대로 독일의 점증하는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개전 3년 전인 1936년부터 전쟁 대비를 계속 진행해 왔다. 하지만 폴란드는 개전 시기를 빨라도 1942년으로 잡아 버렸고 이에 따라 1936~1939년은 공장 건설 및 사회 인프라 확충, 무기 개발의 시기로 1940~1942년은 본격적인 무기 생산 시작 및 규모 확충의 시기로 잡았다. 실제로 당대 독일 군부의 고위 인사 중에서도 1939년을 개전 시기로 잡은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폴란드 군부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꾸 아돌프 히틀러가 보채면서 1942년 이후 개전을 주장하던 전쟁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등을 해고해버려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같은 이유로 국방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도 해고되었다. 그는 1937115일의 면담에서 대외적으로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가 조작된 동성애자 의혹을 받고 갈렸다.

 

 

3.2.1. 폴란드 육군

 

 

무기와 장비, 병력에 있어서의 열세 또한 현격했다. 장교, 부사관들의 자질 및 병사의 훈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상비군은 30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지휘관들의 이해는 충실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그 장교들이 필요로 하는 기갑 전력이 빈약했다. 전차만 봐도 도합 2750대에 달하는 기갑 전력을 동원한 독일 육군에 비해 폴란드 육군이 보유한 전차는 1040여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575대가 TK-3, TKS 계열의 탱켓이었다(그나마 위력적인 신형 20mm 기관포를 장착한 TKS가 존재했지만 그 수량이 24대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무기로 구식화가 심각한 르노 FT-17 102(더욱이 이중 일부는 연철로 제작된 훈련용 전차(일명 FT-17 CWS)라 장갑 방어력이 사실상 없는 물건들이었다)1선 전차 전력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전체 1,040대의 전차 중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던 전차 숫자는 7TP 단포탑형 110, 르노 R35 50, 호치키스 H35 3, 비커스 Mk. E 단포탑형 22(전체 수량 38대 중 22대는 47mm 포 장착 단포탑형, 나머지 16대는 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2포탑형), 20mm 기관포 장착 TKS 24, 경량형 자주포 TKS-D 2(1937TKS-B 프로토타입 및 C2P 견인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된 자주포 형식의 TKS 프로토타입으로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무장으로 장착했다. 실제 양산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기존에 제작되어 테스트를 거친 2대는 또다른 자주포 프로토타입인 TKD 4(연철로 제작된 TK-3 초기생산분 차체에 47mm wz.25 보병포를 장착한 모델)와 함께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소속되어 1938년 뮌헨 협정 때 톄신 합병 당시에 동원되었으며 이듬해 9월 전역에서도 개전 초기 독일군을 상대로 사용되다 손실되었다. 다른 자주포 모델인 TKD는 바르샤바 방어전에 투입되었다가 손실되었다고 전해지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를 합쳐 211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구식이거나 무장과 방어력이 너무 빈약했다. 반면에 독일 육군의 실질적인 기갑 전력이라 할 만한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 35(t) 전차와 38(t) 전차는 합계 1,614대 정도로 단순 숫자로는 2.5, 질적으로는 7.5배의 차이가 났다. 폴란드 육군의 야포 보유 수량은 4,300여 대였지만 이것도 독일 육군 야포 보유량의 절반에 못 미쳤다.

 

 

폴란드 육군의 7TP 경전차. 사실 이 경전차는 차기 전차 개발기간 동안 전력 공백을 메꿀 임시방편용으로 개발된 전차였다.

 

폴란드 육군의 정예 기갑 전력인 7TP 전차(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장착하고 세계 최초의 잠망경인 군들라흐 잠망경(Gundlach periscope)을 장착하는 등 그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신적인 전차였다)는 상대편인 독일 육군의 1호 전차와 2호 전차를 질적으로 능가했지만 수량이 132대에 불과하여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7TP의 개량형인 9TP(공식적으로는 9TP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고 단순히 '강화형 7TP(7TP wzmocniony)'라고 불렸다)는 침공 직전인 193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토타입 제작이 계획되던 상황이었고(개량형 전차에 사용될 엔진 등의 테스트는 새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기존의 17667TP 전차에 임시로 장착되어 19385월에 시행되었다) 그조차 독일의 침공으로 개발 및 양산이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외에 새로운 순항전차 모델인 10TP14TP, 기타 20/25TP(정식 명칭은 아니고 당시 전차를 발주했던 여러 폴란드 회사에서 22, 23, 25톤급 등의 다양한 계획을 제출했기에 편의상 20/25톤급이라고 불렀다)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중 10TP만이 1938년에 와서야 프로토타입이 1대 만들어져 시운전을 거쳤을 뿐이고(또 다른 모델인 14TP1938년에 프로토타입 제작이 시작되었으나 19399월 시점에서는 미완성이었다. 여기에 정찰용 경전차로 계획된 4TP(또는 PZInż.140), 수륙양용 경전차 PZInż.130 등의 프로토타입도 1기씩 존재했지만 양산이 기각되었고 만들어 놓은 프로토타입 또한 무장이 부착되지 않은 상태라 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TKS를 기반으로 한 경량형 자주포나 대전차포 모델도 개발을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나머지는 시간 부족으로 그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 밖에 기병여단에 배치된 비커스 Mk. E 경전차 38대와 프랑스에서 수입한 르노 R35 50, 100대의 장갑차(경장갑차 wz.34 87대와 wz.28 3, 중장갑차 wz.29 우르수스(Ursus) 10), 14대의 트럭 탑재형 자주포(원형은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개발한 물건으로 75mm mle 1897 기반 대공포를 디용 부통(De Dion-Bouton) 75CV 차체에 얹은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립 후 전간기 시기에 14대 분량을 프랑스에게서 순차적으로 구매했는데, 폴란드군 내에서 형식명은 따로 없고 단순히 '75mm 자주포'라고 불렸으며 이 중 일부는 나중에 PF-621L 트럭 기반 차체로 바뀌었다. 이 자주대공포들은 개전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에 투입되어 실제로 전투기 격추 등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고, 살아남은 차량은 918일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루마니아로 탈출했다)가 있었지만 개중 일부는 부대 편성 미완 등의 문제로 인해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일부 기병여단들의 경우 차량화와 기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지만(10차량화기병여단(10.BK(mot))과 바르샤바 차량화-기갑여단(WBP-M)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인 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미진하여 말이나 수레 같은 재래식 수단에 병력 및 물자의 수송을 상당 부분 의지해야 했고(그런데 독일군 또한 군 전체의 기계화는 이루어지지 않아 수송을 군마에 의존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물론 폴란드군에 비하면 장비의 전반적인 수준이 훨씬 양호했다) 소총이나 기관총, 야포 등의 화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의 물건도 일부 섞여 있었다.

 

R35 전차에 관해 첨언하자면 원래 폴란드군은 R35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더 우수한 소뮈아 S35를 구입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부하면서 결국 R35 100대를 주문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침공이 발발했을 시점에는 이 물량의 절반인 50대와 테스트 목적으로 같이 구입한 호치키스 H35 전차 3(차체는 H39 형식이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만이 폴란드에 들어와 있었고 그나마도 후방에서 부대 편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전차들은 전쟁 발발 직후 제21경전차대대에 소속된 채 폴란드 총사령부 예하 예비대로 남아있다가 917일 소련군의 침공 이후 34대 분량이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폴란드를 탈출했고, 6대는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 지금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랑킵스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Ivano-Frankivsk))에서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새로 배속되어 그 중 3대 분량이 헝가리로 넘어갔다. 나머지 전차들은 본토에 남아 전역 말미 독일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소진되었다(폴란드에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50R35 전차들의 행방에 대해선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루마니아에 전달되었다가 루마니아군에 흡수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보내졌다는 추측도 있으며, 10월 경에 목적지를 바꿔 시리아로 향하여 그곳에 남아있다 종전 후 그 중 일부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군에 의해 전투에 동원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개전 시점에서 폴란드의 기갑 병력은 2개 차량화여단, 3개 독립 경전차대대(1, 2 경전차대대(7TP)와 제 21 경전차대대(R35). 단 제 21 경전차대대는 침공 발발 시점에서 부대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다) 3개 경전차중대(FT-17), TK-3, TKS 혹은 장갑차로 구성되어 각 보병사단과 기병여단에 배치된 11개 기갑대대 및 15개 정찰전차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9399월 독일의 침공 당시 급히 조직되어 전선에 나간 기갑 병력도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 3개 경전차중대(중대당 전차 11대가 배속되고 각각 7TP 단일 포탑형, 7TP 2포탑형, TKS로 편성) 및 두브노(Dubno) 집단 소속 반()개 중대(R35, H35 각각 3대씩으로 편성), 그 밖에 각종 구식전차와 TKS, 장갑차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있었다. 한편 폴란드는 16량의 장갑열차를 방어전에 투입하여 침략해 온 독일군을 상대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폴란드 전역 말미에는 그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일부는 독일군의 손에 노획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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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 먼나라 이웃나라
管韻 | 조회 98 |추천 0 | 2019.03.10. 15:00


01.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

 

 

 

 

 

 

 

9월 초하루 히틀러의 명령 한마디에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고 뒤이어 영국, 프랑스에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자 폐제(廢帝) 카이저는 히틀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충고를 하였다. 6천만 명의 독일 국민을 죽음으로 돌려보내고 패전의 책임을 진 채 20년을 해와 달을 벗 삼아 지내는 동안 그는 회오(悔悟)의 한숨이 안 나오는 때가 없었다. 지구에 불을 질렀던 잘못을 그는 해와 달의 말없는 얼굴에서 깨달았다. 그리하여 히틀러에게 '그대는 제 2의 카이저가 되지 말라. 나의 오늘의 생활을 그대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간곡한 충고를 하였다. 노파심이라면 노파심일 따름이겠으나 대전의 불속에 직접 들어가서 경험한 선배로서 보내는 교훈이라면 후배인 히틀러로서는 응당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나 그는 들은 대꾸도 안 했던 것이다. 다만 카이저에 보내는 대답 대신으로 '진군이다'라는 것을 부르짖을 따름이었다. 히틀러는 왜 지구에 불을 질렀는가, 위대한 방화자 히틀러는 무슨 야심으로 방화를 했는가.

 

 

- 1939923일 동아일보 5, 구주전란(歐州戰亂)의 이모저모() : 대전(大戰)의 방화자는 독일, 히틀러는 제 2의 카이저가 될 것인가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의 시작.

 

193991일부터 106일까지 약 1달 동안 나치 독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당시 독일의 괴뢰국), 소련과 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다른 강대국들의 싸움에 가려졌지만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나라 중 하나이며 소련(동부전선)과 중국(중일전쟁)에 이어 3번째로 많은 사망자(민간인과 군인 모두 포함)가 발생했다. 폴란드 인구의 16%'''가 전쟁 기간 중 목숨을 잃었으며 폴란드의 물적 자산의 20%가 파괴되었다.

 

 

2. 배경

 

 

2.1. 영국, 프랑스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된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독일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는 동시에 군비를 무제한으로 늘리겠다고 주장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흠칫했지만, 갓 취임한 히틀러를 그냥 입만 살아 있는 선동가라고 생각했으므로 이런 발언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1934년 히틀러는 대통령과 수상을 합친 직위인 총통에 올라 나치당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서 절대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독일에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자마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히틀러의 침략 논리는"독일인이 사는 곳은 모두 독일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비무장지대로 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의 위반이었으나 원래 독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이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에 발끈해서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히틀러는 쥐트티롤을 이탈리아 영토로 인정하여 국경을 확정해 무마했다. 이런 사례 같이 히틀러를 용인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성은 시쳇말로 약한 외교로서 후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하는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30~40대의 대부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참호전을 겪은 참전 용사들이라서 어떻게 해서든 전쟁은 피했으면...하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소극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파악한 히틀러는 이웃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수데텐란트(Sudetenland)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히틀러를 막아 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를 배신하고 수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떼어 주면서 다시 전쟁을 회피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영불의 대표단에게 "이번만 봐 주면 다시는 안 그러지." 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불과 반 년 만에 히틀러는 뮌헨 협정으로 보장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무시하고 체코를 병합, 슬로바키아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란 괴뢰국으로 만들며 영불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공공연히 다음 목표로 외치고 있는 폴란드의 단치히 회랑(Danzig Corridor) 문제에서 폴란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대독일 전략은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방식의 방어를 공고히 하고, 기타 국가들로 독일의 뒤를 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타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로 모두 프랑스의 전략에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중 폴란드를 빼고 모두가 독일에게 잡아먹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폴란드가 사라지고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후방 안전이 확실히 보장된 독일과의 11 전쟁'은 프랑스에게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었고, 그래서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폴란드에 대한 독립 보장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근본적인 배경은 단치히 회랑 문제였다. 독일 통일의 핵심 주역인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종료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동서로 쪼개지고, 그 가운데 회랑 지역을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가 얻게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핵심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Gdańsk)는 단치히 자유시로서 사실상의 독립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선 동프로이센과 그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월경지가 된 동프로이센 지방과 본국과의 연결은 절실한 문제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대두 이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단치히 회랑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1934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수데텐란트를 접수하더니 19393월에 체코를 합병해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단치히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330일 유사시 폴란드에 대한 군사 원조를 보장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경 지대의 조그마한 땅을 얻기 위해 뮌헨 협정에 가담한 폴란드였던 만큼, 그단스크 문제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주장에 의하면 그단스크의 할양이 폴란드 회랑의 무력화라고 보기 힘들고, 히틀러도 폴란드에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대신 그단스크 25년 자유 이용권을 준다는 것이었으나, 놀이공원이냐 폴란드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미 폴란드 회랑에 그단스크를 대신하여 건설한 그디니아(Gdynia; 독일명 고텐하펜(Gotenhafen))의 물동량이 그단스크를 넘어선 상황이었으므로 그단스크 할양이 폴란드 회랑 할양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독일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외교적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는 것과 폴란드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체코의 문제로 히틀러의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폴란드는 주변 모든 국가에 분쟁을 일으킨 나라답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실제 그단스크 문제는 1938년 후반부터 독일-폴란드 간 외교 교섭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폴란드는 히틀러의 의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거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단스크가 독일이 폴란드에게 원하는 최소한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영토를 강탈한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독일인 전체의 바람이었다. 단지 그 범위가 차이 났을 뿐인데, 그단스크, 폴란드 회랑, 포즈난(Poznań; 독일명 포젠(Posen))의 순으로 중요도를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적인 요구인 그단스크도 폴란드가 거부하면 독일 내부는 히틀러와 나치당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치히 문제에서 폴란드의 거부가 이어지자, 히틀러는 점차 폴란드를 대화 상대로 삼기를 포기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폴란드에 순차적으로 강경한 요구를 꺼내고 대 폴란드 전쟁을 준비했다. 1938년에는 단치히와 회랑 통행권을 요구하던 독일이었으나 1939년 초에는 회랑까지, 19394월부터는 전쟁 계획을, 8월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 침공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여기에 뮌헨 회담과 체코 합병으로 외교적으로 자신감이 생기는 한편 독일의 국력이 강해졌다고 인지하게 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1938년의 제안만으로 독일이 폴란드를 내륙국으로 만들 요구를 했다는 것은 자료의 일부만 보고 말한 것이며, 히틀러가 처음에 요구한 것은 그단스크와 회랑 통행권이라는 것이 당시 독일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만 살펴봐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토적인 면에서 봐도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로 넘어가면 사실상 회랑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영해의 폭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독일뿐 아니라 폴란드도 그단스크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 그단스크에 폴란드의 소규모 군대가 주둔하며 세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대로 하면 독일 영토가 되는 그단스크를 폴란드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된다.

 

 

 

193810월 말에 리벤트로프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를 포함해서 그단스크를 독일에 돌려주고 대신 단치히 지역에서 폴란드에게 무상으로 항구를 제공하고 또 국경선을 공동으로 지키면서 불가침 협정을 25년으로 연장하는 안에 합의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모든 이견을 일거에 해결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 히틀러 평전 2P217, 이언 커쇼

 

 

그리고 통행권은 우습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회랑 통행권을 나치 독일에게 부여하면 앞서 언급한 그디니아를 포함해서 사실상 회랑 전체의 통치권을 상실해 버린다.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철도로 독일 군대와 민간인이 제집 드나들듯이 폴란드 회랑을 드나들 것이 뻔하며 철도 부지가 사실상 독일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도 있다. 새로 건설된 그디니아의 물동량이 그단스크의 그것을 넘어섰다고는 하지만 그단스크는 여전히 폴란드의 무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38년 당시 폴란드 수출에 있어 46.1%의 폴란드 제품이 그디니아를 경유했지만 동시기 그단스크도 전체 수출품의 31.6%가 경유했던 무역항으로 전체 폴란드 수출에 있어 여전히 1/3에 이르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요구는 그단스크뿐만 아니라 폴란드 회랑 지대를 횡단하는 철도 부지까지 내놓으라는 것으로 이렇게 되면 단순 계산상(그디니아+그단스크)으로도 폴란드 수출 물량의 77.7%가 막히게 된다. 이미 독일과의 무역 전쟁과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난에 시달리던 폴란드에게 이런 요구는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치외법권 자체만 따져도 타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해치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대사관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등 매우 좁은 범위만 적용하는데, 위의 인용문을 보면 치외법권 수준이 아니라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중 단치히와 연결되는 것을 통째로 독일에게 할양하라고 적혀 있다. 이러면 독일이 아주 인심을 써서 도로 1개와 철도 1개만 이 주장을 적용했다고 해도 해당 도로와 철도가 폴란드 회랑을 횡단하기 때문에 폴란드 회랑은 말 그대로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이로써 폴란드의 바닷길은 확실하게 차단된다. 이 정도면 칼만 안 들었지 강도 수준이다.

 

원래부터 자국 국경에서의 검문 검색 및 통제권은 국가의 주권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이게 무너지면 사실상 영토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의 유럽연합 같이 자국 영토의 통행권을 민간인에 한해 타국에게 부여하는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가능해진 것이며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직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런 주장은 말만 그럴싸했지 땅을 바쳐라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얼토당토 않는 것이 그때까지 독일이 이미 폴란드 회랑 지역의 도로를 계속 사용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요구를 들이민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은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을 할양하는 것과 더불어 당시 나치가 이끌던 방공 협정(Anti-Comintern Pact)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이때 폴란드는 독일뿐 아니라 동쪽의 소련과도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기에 이는 폴란드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를 독일의 괴뢰국으로 만들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독일은 폴란드를 123년이나 분할 점령 통치한 입장이다. 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인해 간신히 독립한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통행권 요구를 빙자해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명백한 자국 영토를 다시 뜯어가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그 영토가 국가 멸망 전에도 폴란드의 영토였고, 신생 폴란드에게는 유일한 해양 출구인 폴란드 회랑이라 중요성도 크며, 백번 양보해 독일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고 해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이 추가 요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2.3. 독일의 경제 위기

 

 

히틀러와 나치당은 훗날 케인즈식의 경제 정책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치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어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였다. 히틀러는 독일의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쟁 준비에 매달렸다. 군수 산업을 팽창시키고, 효율적인 군수 업무를 위한 사회 인프라에 건설에 매달리다 보니 1930년대 후반에는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미국이 뉴딜 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몰빵하여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과는 방향은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나 민간 인프라와는 달리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 방면에만 몰빵한 결과 독일 정부는 재정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 지출을 늘리면서 적자 예산을 편성한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는 누적된 재정 적자로 파산의 그림자가 닥쳐왔다. 히틀러로서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면 전쟁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한몫 단단히 챙겨오지 않는 한은 정부 재정은 붕괴하고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도에 맞게 나치 독일군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우선 그 나라의 중앙은행을 털어서 금괴를 독일로 운송하는 짓을 제일 먼저 하곤 했다. 이렇게 다른 나라로부터 강탈한 금괴가 수백 톤이고, 이것은 전후 '히틀러가 숨겨놓은 비밀 금괴'의 떡밥이 되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입장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영국-프랑스의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침공을 강행하게 된 한 이유였다.

 

 

2.4. 소련-폴란드 국경분쟁

 

 

폴란드는 동쪽의 소련과도 국경분쟁이 있었는데 원래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가 독립할 때쯤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에 뒤이은 러시아 내전 때문에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반혁명세력(백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친폴란드 백군은 전황이 불리하자 폴란드에 원조요청을 했고 폴란드는 이를 기회로 우크라이나를 먹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출병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집권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직 소련 성립 전이었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소비에트군(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연합으로, 아직 양국이 소비에트 '연방'으로 묶이기 전이다.)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해 온 폴란드군을 격퇴했으나 패주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소비에트군이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근처에서 대패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비에트군은 패퇴했고 반혁명 세력의 창궐로 다른 곳이 다급해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의 1/6과 벨로루시의 절반 정도를 폴란드에 떼어주고 정전 협정을 맺었다.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서부가 폴란드에 합병되자 정교회 성당이 파괴당했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나머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 출범하자 거기에 가입해 소련의 일부분이 된다. 소련의 일부가 된 우크라이나는 이후 미증유의 기아 사태인 홀로도모르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폴란드는 동서로 소련-독일이라는 양대 강대국과 모두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 폴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2.5. 독소 불가침조약

 

 

나치 집권 후에 독일이 노골적으로 반소련 정책을 취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방(영국-프랑스)과의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서방국가들을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으나, 소련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양국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 특히 폴란드는 독일이 침공하더라도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극렬 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과 서방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자신의 침략 전쟁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면 이후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였다. 스탈린도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이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고, 결국 양 독재자는 의기투합하여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이 전격적으로 폴란드와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체결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를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에 여러 경로로 압력을 넣었다. 19394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한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맺은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잇달아 파기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던 823,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것이 엉클어졌다.

 

히틀러는 소련의 동의를 얻어낸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영불 양국은 1938년에도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군부에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고, 곧 백색 작전(Fall Weiß)이라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원래는 826일 새벽 4시에 침공 작전에 돌입할 예정이었으나, 825일에 폴란드-영국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자 시행이 한 차례 미뤄진 후 91일이 되어서 작전이 개시되었다.

 

 

2.6. 자작극과 개전

 

 

8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Gleiwitz)의 한 방송국에 폴란드군 소규모 병력이 기습 침투를 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독일에 대한 전쟁 선언문을 낭독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부하였던 알프레드 나우요크스의 지휘로 이루어졌던 독일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 요원들이 쌩쑈를 한 다음, 폴란드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죄수들 시신을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91일 새벽 독일은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폴란드를 기습했다.

 

 

독일군은 전통적인 포위섬멸전 교리에 따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가해 폴란드군의 퇴로를 끊은 다음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자제하고, 대신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여기에 당시 독일의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베르놀락 야전군(Field Army Bernolák)이 남부집단군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여 대규모 공세를 실시, 양군이 비스와 강 유역에서 합류하여 국경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폴란드군이 미처 퇴각하기 전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총 병력 150~180만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이외에도 베르놀락 야전군 소속 5만여 명이 함께 동원되었다(훗날 베르놀락 야전군의 일부인 고속 기동 부대 칼린치악(Kalinčiak)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주공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으로, 총 병력은 886천여 명(8, 10, 14)에 이르렀다. 8군과 10군이 폴란드 영토 중앙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결정적인 공세를 가하고 14군은 슬로바키아, 헝가리 국경을 따라 폴란드 영토 남쪽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특히 10군에는 독일군 기갑 세력이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폴란드 중앙부의 북동부 지역까지 진격하여 결정적 공세를 가하는, 독일군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주공인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주공이었으니 이 평가는 전혀 아깝지 않다. 특히 10군의 진격로 상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중공업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페르디난트 차틀로시(Ferdinand Čatloš) 지휘 하에 3개 사단으로 편성된 51,306명의 병력을 보유한 친독 슬로바키아군 또한 폴란드 남부 국경으로 진군하여 독일군을 돕게 했다.

 

한편 페도어 폰 보크의 북부집단군(3, 4, 예비 사단 4개로 구성, 총 병력 63만 명) 4군은 단치히 회랑을 관통, 동프로이센과의 육상 교통로를 형성하며, 동프로이센에 있던 3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포위망의 북쪽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들은 비스와 강에서 합류, 바르샤바 서부에서 폴란드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 이후 주력이 사라지고 예비군 동원이 채 끝나지 않은 폴란드를 짓밟으며 수도 바르샤바로 곧장 진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폴란드 내부의 독일인들이 제 5열을 형성하여 호응하기로 되어 있었다. 합계 150만의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에 동원되었다. 히틀러는 831일 침공을 91일 오전 445분부터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이 남부 전선을 주공으로 삼은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폴란드 중화학 공업 지대와 탄전이 폴란드 남부 지역에 밀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부 폴란드-독일 국경 지대 중 상() 실롱스크(Górny Śląsk)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폴란드와 독일의 주요 분쟁지역으로, 해당 지역은 탄전과 광산이 밀집,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분쟁을 거쳐 상부 실롱스크는 분할되어 32%는 폴란드에, 68%는 독일에 귀속되었는데 폴란드에 넘어간 지역이 경제적으로 더 가치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이유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독일 사령부는 폴란드의 남부 국경을 주공 방향으로 잡았다.

 

당시 4천여 기에 이르렀던 공군기 중 60%2,315기와 전체 기갑 전력의 85%인 전차 2,750대 및 장갑차 1,094, 야포 9,000문을 폴란드 방면으로 배치했으며, 6개 기갑사단이 폴란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 전차 중 3호 전차와 4호 전차는 모두 합쳐 310대뿐이었고 체코슬로바키아제 LT vz. 35LT vz. 38 역시 각각 120, 57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1호 전차와 2호 전차(1,127)였다. 특히 1호 전차의 경우는 그냥 철판 위에 기관총만 달아 놓은 격이었던 TKS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았지만 7TP와 마주치면 그야말로 학살 수준으로 터져나가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속 터지게 만들었다. 대전 초기 서방 연합국에 비해 빈약했던 독일의 기갑 전력을 보여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1939년 당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공군 중 하나로 조종사들의 기량과 항공기의 성능도 수준급이었다. 이들은 폴란드 영토 전역에 폭격을 퍼부어 폴란드군의 진격을 방해하고 군수 물자 생산 지역을 파괴할 것이었다. 특히 Ju87 급강하폭격기가 이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군사 작전 이외에 독일군은 폴란드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계획도 짰다. 탄넨베르크 작전(Operation Tannenberg)에 의하면 독일군은 폴란드 침공 이후 61천여 명의 폴란드 엘리트들을 처형하기로 되어 있었다. 침공이 시작된 후 독일군은 폴란드 민간인 2만여 명을 처형했으며, 이 중 2천여 명은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독일 내에서 학살된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다.

 

 

 

폴란드군의 계획은 철저한 방어전이었으며 반격은 빨라도 개전 2달 후 예비군 동원이 완료되고 서부전선의 영국군, 프랑스군이 공세전에 나서는 시점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 폴란드가 목표로 했던 것은 절대적인 시간 벌기, 즉 지연전이었다. 독일의 침략이 목전에 다가오자 폴란드는 예비군의 부분 동원령을 선포했다. 당시 폴란드 육군은 숫적으로 100만명의 대군이었지만 이중 상비군은 283천여 명(장교 183백여 명, 부사관 43천여 명 포함)이었으며 70만 이상의 인력은 예비군으로서 전시에 동원될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중앙에 대규모 산업 시설을 건설하여 침략군에 맞설 현대적 무기를 생산할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방어 계획에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전 영토 절대 사수 개념이었다. 폴란드의 방어 계획 핵심은 국경에서의 방어전이었으며 국경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후퇴하여 최종적으로 비스와(Wisła) 강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폴란드군의 주력 부대는 모조리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마주한 국경선 지역이 근본적으로 너무 길었으며(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2,000km에 달했고, 여기에 뮌헨 협정으로 인해 연장된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국경선 800km까지 더하면, 뿐만 아니라 이 국경선은 거의 대부분 드넓은 평야 지대로 제대로 된 자연적 방어선도 없었다) 국경선과 그 부근에는 방어선으로 쓸 만한 지역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비군 동원까지 완료해도 과연 국경선 전체를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이 가는 실정에서 상비군만으로 국경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무리수라는 결론이 나온 지 오래였다.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처럼 국경 지대에 각종 장비를 설치하고 부대를 배치, 기지 설치 등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애초에 국경선이 2,800km에 이르는 데다가 자연적 방어선의 이점도 없이 모든 걸 새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있던 현대적 무기들마저 외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폴란드가 이걸 혼자서 완수하기는 무리였고 방어선이 완성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서방 연합군 및 폴란드군 소수파는 국경 방어를 포기하고 비스와 강 동쪽에 주력을 집중시켜 방어하기 용이한 비스와 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략·전술적으론 현명해도 폴란드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이 전략을 채택한다면 폴란드는 자국 최대의 산업 및 광산 지대, 핵심 인구 밀집 지역을 포기해야 하며 그 면적도 국토의 절반이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소련군이 동부 국경선을 공격하지 않았을 때나 유효했으며 비스와 강은 철벽 방어선으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방어선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비스와 강이나 그 외의 다른 폴란드 내륙 지방에 위기상황을 감안해서 방어선 구축이나 요새 건설을 해놓은 것이 거의 없으므로 후퇴해서 방어선을 지킨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었다. 또한 비스와 강을 방어선 삼아도 문제가 되는게 비스와 강 너머에 있는 동프로이센 주둔 독일군이 방어선의 후방으로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동프로이센과 폴란드 중심부 사이를 나레프(Narew) 강이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이 나레프 강은 비스와 강보다도 폭이 좁은 강이었다. 폴란드 자체가 국가 방어에 매우 불리한 것이, 폴란드 공업 중심지와 인구 밀집 지역, 광산지역이 서부 지역에 있었고, 폴란드-독일 국경 자체가 바로 이 지역을 둘러싸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의 방어선은 너무 과도하게 독일군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늘어진 감이 있다. 당장 폴란드 회랑도 개전 3일 만에 분단되는 판국이다. 차라리 폴란드 회랑과 대()폴란드 지역의 병력을 빼내어 중앙과 남부의 산업 지대를 보호하거나 비스와 강의 방어선을 강화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폴란드는 독일군의 주공이 단치히 회랑 쪽으로 집중될 것으로 오판하고 단치히 및 동프로이센 주변에 주력의 1/3을 집중 배치했다. 사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판단으로 단치히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 만큼 독일이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강점하고 폴란드의 반격 역량을 소멸시키는 선에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 전 영토의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평전을 쓴 이언 커쇼에 따르면 히틀러는 전면적 승리가 확실시된 그 순간까지도 폴란드 처리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치히 회랑과 과거 독일 제국이 지배하던 폴란드 영토만 차지하고 나머지를 괴뢰 독립 국가로 두는 방안도 고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독일군이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고 다만 전쟁 후에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단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폴란드가 독일의 위협을 제대로 감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군에 대한 현대화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폴란드도 나름대로 독일의 점증하는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개전 3년 전인 1936년부터 전쟁 대비를 계속 진행해 왔다. 하지만 폴란드는 개전 시기를 빨라도 1942년으로 잡아 버렸고 이에 따라 1936~1939년은 공장 건설 및 사회 인프라 확충, 무기 개발의 시기로 1940~1942년은 본격적인 무기 생산 시작 및 규모 확충의 시기로 잡았다. 실제로 당대 독일 군부의 고위 인사 중에서도 1939년을 개전 시기로 잡은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폴란드 군부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꾸 아돌프 히틀러가 보채면서 1942년 이후 개전을 주장하던 전쟁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등을 해고해버려 히틀러의 나치당이 독일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같은 이유로 국방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도 해고되었다. 그는 1937115일의 면담에서 대외적으로 좀 더 조신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가 조작된 동성애자 의혹을 받고 갈렸다.

 

 

3.2.1. 폴란드 육군

 

 

무기와 장비, 병력에 있어서의 열세 또한 현격했다. 장교, 부사관들의 자질 및 병사의 훈련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상비군은 30만 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지휘관들의 이해는 충실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그 장교들이 필요로 하는 기갑 전력이 빈약했다. 전차만 봐도 도합 2750대에 달하는 기갑 전력을 동원한 독일 육군에 비해 폴란드 육군이 보유한 전차는 1040여대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575대가 TK-3, TKS 계열의 탱켓이었다(그나마 위력적인 신형 20mm 기관포를 장착한 TKS가 존재했지만 그 수량이 24대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무기로 구식화가 심각한 르노 FT-17 102(더욱이 이중 일부는 연철로 제작된 훈련용 전차(일명 FT-17 CWS)라 장갑 방어력이 사실상 없는 물건들이었다)1선 전차 전력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다.

 

전체 1,040대의 전차 중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던 전차 숫자는 7TP 단포탑형 110, 르노 R35 50, 호치키스 H35 3, 비커스 Mk. E 단포탑형 22(전체 수량 38대 중 22대는 47mm 포 장착 단포탑형, 나머지 16대는 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2포탑형), 20mm 기관포 장착 TKS 24, 경량형 자주포 TKS-D 2(1937TKS-B 프로토타입 및 C2P 견인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제작된 자주포 형식의 TKS 프로토타입으로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무장으로 장착했다. 실제 양산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기존에 제작되어 테스트를 거친 2대는 또다른 자주포 프로토타입인 TKD 4(연철로 제작된 TK-3 초기생산분 차체에 47mm wz.25 보병포를 장착한 모델)와 함께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소속되어 1938년 뮌헨 협정 때 톄신 합병 당시에 동원되었으며 이듬해 9월 전역에서도 개전 초기 독일군을 상대로 사용되다 손실되었다. 다른 자주포 모델인 TKD는 바르샤바 방어전에 투입되었다가 손실되었다고 전해지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를 합쳐 211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너무 구식이거나 무장과 방어력이 너무 빈약했다. 반면에 독일 육군의 실질적인 기갑 전력이라 할 만한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 35(t) 전차와 38(t) 전차는 합계 1,614대 정도로 단순 숫자로는 2.5, 질적으로는 7.5배의 차이가 났다. 폴란드 육군의 야포 보유 수량은 4,300여 대였지만 이것도 독일 육군 야포 보유량의 절반에 못 미쳤다.

 

 

폴란드 육군의 7TP 경전차. 사실 이 경전차는 차기 전차 개발기간 동안 전력 공백을 메꿀 임시방편용으로 개발된 전차였다.

 

폴란드 육군의 정예 기갑 전력인 7TP 전차(세계 최초로 디젤 엔진을 장착하고 세계 최초의 잠망경인 군들라흐 잠망경(Gundlach periscope)을 장착하는 등 그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신적인 전차였다)는 상대편인 독일 육군의 1호 전차와 2호 전차를 질적으로 능가했지만 수량이 132대에 불과하여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7TP의 개량형인 9TP(공식적으로는 9TP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고 단순히 '강화형 7TP(7TP wzmocniony)'라고 불렸다)는 침공 직전인 193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토타입 제작이 계획되던 상황이었고(개량형 전차에 사용될 엔진 등의 테스트는 새로 제작된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기존의 17667TP 전차에 임시로 장착되어 19385월에 시행되었다) 그조차 독일의 침공으로 개발 및 양산이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외에 새로운 순항전차 모델인 10TP14TP, 기타 20/25TP(정식 명칭은 아니고 당시 전차를 발주했던 여러 폴란드 회사에서 22, 23, 25톤급 등의 다양한 계획을 제출했기에 편의상 20/25톤급이라고 불렀다)도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중 10TP만이 1938년에 와서야 프로토타입이 1대 만들어져 시운전을 거쳤을 뿐이고(또 다른 모델인 14TP1938년에 프로토타입 제작이 시작되었으나 19399월 시점에서는 미완성이었다. 여기에 정찰용 경전차로 계획된 4TP(또는 PZInż.140), 수륙양용 경전차 PZInż.130 등의 프로토타입도 1기씩 존재했지만 양산이 기각되었고 만들어 놓은 프로토타입 또한 무장이 부착되지 않은 상태라 전투에는 투입되지 못했다. 그 외에도 폴란드는 TKS를 기반으로 한 경량형 자주포나 대전차포 모델도 개발을 진행 중이었지만 독일의 침공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나머지는 시간 부족으로 그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 밖에 기병여단에 배치된 비커스 Mk. E 경전차 38대와 프랑스에서 수입한 르노 R35 50, 100대의 장갑차(경장갑차 wz.34 87대와 wz.28 3, 중장갑차 wz.29 우르수스(Ursus) 10), 14대의 트럭 탑재형 자주포(원형은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개발한 물건으로 75mm mle 1897 기반 대공포를 디용 부통(De Dion-Bouton) 75CV 차체에 얹은 것이었다. 폴란드는 독립 후 전간기 시기에 14대 분량을 프랑스에게서 순차적으로 구매했는데, 폴란드군 내에서 형식명은 따로 없고 단순히 '75mm 자주포'라고 불렸으며 이 중 일부는 나중에 PF-621L 트럭 기반 차체로 바뀌었다. 이 자주대공포들은 개전 이후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에 투입되어 실제로 전투기 격추 등의 전과를 거두기도 했고, 살아남은 차량은 918일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루마니아로 탈출했다)가 있었지만 개중 일부는 부대 편성 미완 등의 문제로 인해 아예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일부 기병여단들의 경우 차량화와 기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지만(10차량화기병여단(10.BK(mot))과 바르샤바 차량화-기갑여단(WBP-M)이 대표적이다) 전체적인 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미진하여 말이나 수레 같은 재래식 수단에 병력 및 물자의 수송을 상당 부분 의지해야 했고(그런데 독일군 또한 군 전체의 기계화는 이루어지지 않아 수송을 군마에 의존하는 비율이 꽤 높았다. 물론 폴란드군에 비하면 장비의 전반적인 수준이 훨씬 양호했다) 소총이나 기관총, 야포 등의 화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의 물건도 일부 섞여 있었다.

 

R35 전차에 관해 첨언하자면 원래 폴란드군은 R35의 성능에 만족하지 못하고 질적으로 더 우수한 소뮈아 S35를 구입하고자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부하면서 결국 R35 100대를 주문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침공이 발발했을 시점에는 이 물량의 절반인 50대와 테스트 목적으로 같이 구입한 호치키스 H35 전차 3(차체는 H39 형식이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만이 폴란드에 들어와 있었고 그나마도 후방에서 부대 편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전차들은 전쟁 발발 직후 제21경전차대대에 소속된 채 폴란드 총사령부 예하 예비대로 남아있다가 917일 소련군의 침공 이후 34대 분량이 루마니아 교두보를 통해 폴란드를 탈출했고, 6대는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 지금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랑킵스크(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 Ivano-Frankivsk))에서 제10차량화기병여단에 새로 배속되어 그 중 3대 분량이 헝가리로 넘어갔다. 나머지 전차들은 본토에 남아 전역 말미 독일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소진되었다(폴란드에 들어오지 못한 나머지 50R35 전차들의 행방에 대해선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루마니아에 전달되었다가 루마니아군에 흡수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로 보내졌다는 추측도 있으며, 10월 경에 목적지를 바꿔 시리아로 향하여 그곳에 남아있다 종전 후 그 중 일부가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시리아군에 의해 전투에 동원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개전 시점에서 폴란드의 기갑 병력은 2개 차량화여단, 3개 독립 경전차대대(1, 2 경전차대대(7TP)와 제 21 경전차대대(R35). 단 제 21 경전차대대는 침공 발발 시점에서 부대 편성이 완료되지 않았다) 3개 경전차중대(FT-17), TK-3, TKS 혹은 장갑차로 구성되어 각 보병사단과 기병여단에 배치된 11개 기갑대대 및 15개 정찰전차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9399월 독일의 침공 당시 급히 조직되어 전선에 나간 기갑 병력도 있었는데,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 3개 경전차중대(중대당 전차 11대가 배속되고 각각 7TP 단일 포탑형, 7TP 2포탑형, TKS로 편성) 및 두브노(Dubno) 집단 소속 반()개 중대(R35, H35 각각 3대씩으로 편성), 그 밖에 각종 구식전차와 TKS, 장갑차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있었다. 한편 폴란드는 16량의 장갑열차를 방어전에 투입하여 침략해 온 독일군을 상대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폴란드 전역 말미에는 그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일부는 독일군의 손에 노획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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