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Vom Kriege 클라우제비츠 / 이진우 / 흐름출판 / 1832→2015 / 367p 18,500원
불안정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경쟁은 전쟁과 다를 바 없다. 권력의 핵심이 군사력에서 정치력을 거쳐 경제력으로 옮겨감으로써 전쟁의 수단은 바뀌었을지언정 현실은 여전히 전쟁이다. 변화의 시대에 누구도 특정 상황에 맞는 정답을 알려 줄 수 없다. 다만 모호한 상황 속에서 유용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방향과 질서를 부여하는 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한 역할을 우리는 전략이라고 부른다. 戰爭論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전략이다. 戰爭論은 전쟁과 정치를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이진우. 연세대 독문과. 아우크스부르크大 철학석사/·박사. 계명대 철학과 교수. 同대학 총장.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저서《테크노인문학》《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찾아서》《니체, 실험적 사유와 극단의 사상》《프라이버시의 철학》《지상으로 내려온 철학》《이성정치와 문화민주주의》《이성은 죽었는가》《도덕의 담론》등. 역서《인간의 조건》《전체주의의 기원》《책임의 원칙》《현대성의 철학적 담론》《글로벌 위험사회》《공산당 선언》《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등.
Carl von Clausewitz(1781~1831). 프로이센 태생의 장군. 12살에 수습사관으로 군대에 입대, 13살에 최초의 전투 경험. 15살에 소위로 임관. 21살에 베를린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샤른호스트를 만나게 된다. 23살에 군사학교 수석 졸업하고 아우구스트 왕자의 전속부관이 되었다. 1812년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군대에 들어갔다가 1814년에 프로이센으로 복귀하했다. 이듬해 제3군단 참모장이 되었다. 1818~1830년까지 12년간 베를린의 군사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이때『전쟁론』을 집필한다. 1831년 콜레라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머리말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전략과 전술의 기본과 전쟁의 근본원리에 관한 포괄적인 철학을 담고 있다.
진정한 고전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프롤로그 - 왜 지금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는가?
"전쟁은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의 위협을 알기 전에는 보통 그 위험을 무섭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흥분에 빠져 질풍처럼 적진으로 밀고 들어갈 때 누가 총알과 쓰러지는 자들의 수를 헤아리겠는가?"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의 수단은 바뀌었지만 전쟁은 계속된다. 전 세계가 자본주의 시장으로 결합되면서 돈과 자본은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
21세기의 전쟁은 총성 없는 경제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상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권력이 있는 곳에선 항상 전쟁이 벌어진다.
총성이 있든 없든, 피를 흘리든 흘리지 않든, 전쟁은 언제나 폭력적이다. 누가 경제전쟁이 군사전쟁만큼 폭력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업이 경쟁에서 패배해 도산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국가가 파산하면 국민은 무기를 박탈당한 실업자로 전락한다.
경제와 경영에는 전쟁에는 없는 고객이 있다면, 전쟁은 경영이나 무역과는 달리 적의 전멸을 목적으로 한다.
전쟁은 파괴를 추구하지만, 경영은 창조를 지향한다. 비즈니스가 전쟁이라면 그것은 창조적 전쟁이다.
비즈니스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고객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21세기의 경제전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은 그것이 창조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통용될 규칙들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에게 전략적 마인드를 요구한다.
<손자병법>이 직관에 호소하는 것과는 달리, <전쟁론>은 분석과 추론을 요구한다. 두 책은 상보적이다.
<전쟁론>을 꿰고 있는 실마리는 전략이다. 전략 이론은 근본적으로 불안정과 불확실성의 본질 자체를 꿰뚫어야 한다.
변화하지 않는 경직된 이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전략 이론은 변화하는 현실과 함께 유연하게 탄력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 때만 생명력을 갖는다.
만약 모든 이론이 태생적으로 경직되는 경향을 갖고 있다면, 전략 이론은 본디 이론으로 불리기보다는 전략 사상으로 불러야 한다.
당대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클라우제비츠는 평화보다는 전쟁이 정상 상태라고 여겼다.
"전쟁은 단순히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계속 하는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을 읽는다고 해서 전쟁 찬양자인 것은 아닌 것처럼, 전쟁의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전쟁 찬양자인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 사상의 핵심은 바로 전략적 마인드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는 결코 전략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
크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장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의 힘으로 1792년 12세의 나이로 수습사관으로 입대한다.
13세에 프랑스 군대와의 첫 전투에 참여해 승리의 경험을 한다.
16세부터 프랑스대혁명에 관한 당대의 문헌을 읽고 정치,예술,윤리학,논리학에 관한 광범위한 공부를 한다.
이렇게 스스로 독학한 광범위한 교양 교육은 그의 전략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01년 게르하르트 폰 사른호르스트가 설립한 전쟁학교(육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한다.
1803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프로이센 아우구스트 왕자의 부관이 되어, 당시 국가 엘리트 계급과 교류하면서 전략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엘리트 계급만이 가질 수 있었던 지적,문화적 자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고, 훗날 아내가 된 마리 폰 브륄을 알게 된다.
대부분 프로이센 정치지도자들은 국가보다는 가문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장기적 전략적 성공보다는 단기적 개인적 생존을 선호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적 성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프랑스 군대가 1805년 오스트리아,러시아에서 거둔 엄청난 승리에 불안해진 프로이센은 1806년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예나 전투,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대패한 후 프로이센은 결국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고 인구와 영토의 반을 잃게 된다.
프로이센은 이제 프랑스의 위성국가가 된 것이다.
아우구스트 왕자와 베를린으로 송환된 클라우제비츠에게 나폴레옹은 이렇게 질책한다.
"짐은 항상 평화를 원했는데 프로이센은 왜 전쟁을 선포했는지 모르겠다."
이 모욕적인 대화를 클라우제비츠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정복자는 항상 평화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우리 나라 안으로 조용히 들어오려 할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클라우제비츠는 1807년 1년 동안 프랑스에서 포로생활을 한다. 이 기간에 프로이센의 패배원인을 깊이 분석하고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프랑스혁명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은 프랑스 국민의 힘과 에너지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힘을 얻지 않고 국가를 이끌 수 있을까? 구성원의 에너지를 집약시킬 수 없는 사람이 과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이 성공하려면 나폴레옹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810년 클라우제비츠는 소령으로 진급해 샤른호스트의 참모장이 된다. 그는 전략과 전술을 가르쳤고, 프로이센 왕자들을 교육했다.
1812년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돕기 위해 1개 군단을 지원했다.
이렇게 소심하고 용기 없는 리더십에 대해 클라우제비츠는 실망했다. 나폴레옹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그에게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았다.
클라우제비츠는 몇몇의 동료들과 함께 프로이센 군대를 떠나 러시아 장교직을 수용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러시아와의 정전과 프랑스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타우로겐 협약에서 훌륭한 매개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클라우제비츠를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클라우제비츠는 러시아군과 함께 여러 해방전쟁에 참여하다가 1814년에 비로소 육군 대령으로 프로이센 군대에 복귀한다.
클라우제비츠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 3군단장 참모장으로 참여해 나폴레옹 군대의 병력증강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818년 소장으로 진급해 베를린의 일반 전쟁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전쟁론>을 집필한다.
1830년 포병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로이센 동부에 배치된다. 1831년 콜레라에 걸려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클라우제비츠는 동부전선으로 떠나기 전에 전쟁에 관한 미완성 원고를 봉인하고는 다시 열어 보지 못했다.
그의 부인 마리는 클라우제비츠의 유작을 편집해 1832년 자비로 출간했다.
<전쟁론>은 유연성과 탄력성을 생명으로 하는 전략적 사고의 원천이다.
전쟁이 단순한 전투라면 전략은 필요없다. 승리하기 위해 부대를 어떻게 활용해 전투를 수행할 것인지를 분석하고 제시하는 전술만이 있을 것이다.
전략적 사고는 적이 사물이나 기계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행위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요청된다.
적이 한 개인에서 집단,국가로 확대될수록 전쟁의 불확실성은 증대된다.
다양한 관심,이념,권력,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국가는 결코 하나의 행위자로 행동하지 못한다. 예측이 그만큼 어렵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병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정치적,경제적 콘텍스트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단순한 병법이 아니다.
전쟁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인간행위의 특성을 성찰하고, 이를 통해 관계를 미리 예측하고 조정한다는 점에서 전쟁 철학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시대는 이성에 대한 믿음과 함께 삶과 사회의 모든 영역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계몽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까?
우연과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을 성찰하고 예측하는 전략 이론은 과연 가능한가? ☞ 정답은 적용 불가능, 원리로 구성된 솔루션이 필요.
18세기 자연세계는 점점 더 비밀을 드러내고 합리적 인식의 대상이 되었지만, 전쟁은 여전히 불확실한 세계에 속했다.
"모든 학문은 원리와 규칙이 있지만, 오직 전쟁에 관한 학문만은 어떤 원리도 없다." - 모리츠 폰 작센. 18세기 장군, 전쟁이론가.
18세기만 하더라도 전쟁은 어떤 인식과 통찰도 통하지 않는 야만적인 과거의 유물로 여겨졌다. 한편에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전쟁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전쟁조차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하려는 계몽주의적 믿음이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는 국가의 통치업무가 합리적인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면 세계는 영구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군사전문가들은 이런 이상적 견해에 적극 동의하진 않지만, 적어도 전쟁을 과학적으로 하면 피를 덜 흘릴 것이라는 믿음은 갖게 되었다.
지리학적,지형학적 측량, 군수물자와 행군표의 정확한 계산처럼 수학적 엄밀성을 갖고 작전을 수행하면 정말 큰 타격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까? 전략은 과학적 지식의 영향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 금융공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산은 무생물에는 엄밀하게 적용할 수 있다.
지식 자체가 인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형성을 위해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것처럼, 과학적 지식만으로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전략이다. ☞ 전략은 정답이 아니라 솔루션이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선 단순히 주어진 규칙을 배우고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처럼,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기존의 규칙을 새롭게 생각하고 수정하고 혁신할 수 있는 예술이 필요하다.
전략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행위의 규칙을 만들어 가는 전쟁의 예술이다.
<손자병법>의 멋진 구절들을 줄줄이 꿰어도 현실 전투에서 판판이 깨지는 것처럼, 전쟁 철학의 고전인 <전쟁론>도 결코 우리를 직접 승리로 이끌지 않는다. ☞ 정답의 기계적인 적용은 무생물에게나 가능하다.
구체적 현실과 치열하게 싸우고 또한 자신의 시대적 상황을 직시하면서도 승리를 위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전쟁론>의 올바른 독자이다.
<전쟁론>은 스스로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만 구체적 현실과 예리하게 관찰할 수 있는 힘과, 행동하면서도 동시에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제1부. 전쟁이란 무엇인가?
1장. 이상적 전쟁
원문. 전쟁은 확대된 양자 결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의 당면목표는 적을 무너뜨려 차후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폭력은 폭력에 맞서기 위해 기술과 과학의 발명품들로 무장해 왔다. 국제법상의 관례로 폭력의 힘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폭력은 수단이며,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적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것이 전쟁행위의 목표가 된다.
인도주의자들은 지나치게 많은 부상자를 내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적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적을 타도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전쟁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리더라도 이런 오류는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과 같은 위험한 일에서 선량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나쁜 잘못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성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피를 흘려가면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쓰는 쪽은 폭력을 쓰지 않는 쪽보다 우세해질 게 틀림없다. 이로써 양쪽의 폭력은 극에 달할 때까지 상승하게 된다.
전쟁의 야만적 요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는 무익하고 그릇된 노력이 될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온건주의를 전쟁의 철학에 끌어들일 수 없다. ☞ 비즈니스 전쟁에서도 경쟁자에 대한 온정은 금물이다.
인간의 싸움에는 본래 적대적 감정과 적대적 의도라는 두 개의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 후자가 전쟁 개념의 특징이다.
미개민족에게는 감성에 치우친 의도가 지배적이고, 문명민족에게는 이성에 치우친 의도가 주로 나타난다.
하지만 차이는 모든 개별적 경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나타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문명화된 민족간의 싸움도 격렬하게 불타오를 수 있다. 문명민족 간의 전쟁이 정부의 이성적 행위에 기인한 것이라면 전쟁은 물리적 전투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양쪽의 전투력을 비교하는 대수학만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전쟁은 폭력행위이며 폭력의 사용은 무제한적이다. 여기서 개념상 극단으로 치닫는 상호작용이 생긴다.
적의 무장해제가 전쟁행위의 목표다. 그렇지 않으면 적은 기회를 기다리면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 관용은 무장해제 이후의 일이다.
전쟁 당사자가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적의 저항능력은 두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적이 보유한 수단의 규모이며, 다른 하나는 강력한 의지력이다.
적이 보유한 수단은 대게 숫자에 근거하기 때문에 측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의지력을 측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해설. 무릇 모든 행위는 개념과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경쟁관계에 있는 정치집단 간의 장기 무장충돌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전쟁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어쩌면 전쟁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빚은 참상인지도 모른다.
전쟁을 겪었다고 전쟁을 아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잔인성과 참혹함이 느껴질수록 전쟁의 본질은 더욱더 감춰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전쟁의 현상을 보고 그것이 전쟁의 본질이라고 착각한다.
전쟁을 극복하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 전쟁을 알기 위해서는 전쟁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전쟁은 상호 경쟁하는 두 집단 사이의 무력충돌이다. 인류 역사상 같은 전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양한 형태로 치러진 전쟁들 속에서 항상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쟁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을까?
클라우제비츠는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해체와 종합의 방법을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 관한 두 개의 명쾌한 정의를 내린다.
1) 전쟁은 확대된 양자 결투에 지나지 않는다.
2)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다.
혼란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은 분명한 상황인식과 방향제시다. 결전의 상황에서는 적이 누구인지 알고, 적에 집중해야 한다.
전쟁 외에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동지와 적을 구별하지 못하면,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상태나 다름없다.
적은 물리적 폭력을 가진 자일 수도 있고, 당신을 고의로 방해하는 자일 수도 있으며, 혼란에 빠진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방향을 상실한다. 우리의 삶은 적을 필요로 한다. 함께 하는 자는 동지요,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적이다.
"정치는 동지와 적의 구별이다." - 칼 슈미트. 독일 정치학자.
적대적 의도는 적을 규정한다. 물리적 폭력보다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힘이 중요해진 사회에서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적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적대적 의도는 결국 그 수단을 늘리고 강화하는 상호작용으로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에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전쟁의 논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간과한다면, 우리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내재하는 폭력의 논리를 알아야 한다. 선량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면, 이보다 더 나쁜 잘못도 없다.
2장. 현실적 전쟁
원문. 전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확대되는 것도 아니다.
양쪽은 대부분 상대방의 현재 상태와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지, 상대방의 미래 모습과 행동에 따라 상대방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절대적 완전성에 이르지 못하며, 양쪽 모두에게 나타나는 이러한 결점이 일종의 온건주의가 되어 나타난다.
인간의 활동 중에 전쟁만큼 끊임없이, 광범위하게 우연과 관련되어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에는 우연,운명,행운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론이 정신을 떠나서 절대적 결론과 법칙 안에서 자족하면서 움직여도 되는가? 그렇다면 그런 이론은 인간의 삶에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론은 인간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고 용기와 대담성, 심지어 무모함도 고려해야 한다.
전쟁 이론은 必須不可缺하며, 모든 발전단계나 변화과정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법칙들만을 세워야 한다.
해설. 전쟁과 놀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쟁은 승리만을 목표로 하는데, 놀이는 과정을 중시한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는데, 전쟁에는 규칙이 없다. 전쟁의 유일한 규칙이라면, 그것은 승리를 위해선 어떤 반칙도 환영하는 無규칙의 규칙이다.
제2부. 전략, 전술, 작전
3장. 전쟁의 삼위일체
해설. 국가는 대문자로 쓰인 개인이다. 어떤 사태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비유로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좋다.
정치적 교류의 목표는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정치적 교류는 일반적으로 외교,협상,협정과 같은 소통의 수단으로 실행되지만, 때로는 폭력의 수단, 즉 전쟁을 사용할 수도 있다.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으로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성격을 갖지 않은 어떤 전쟁도 없었다. 전쟁은 바로 정치다.
정치는 전쟁의 목적을 설정하고, 전쟁은 이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다.
모든 시대는 자신의 고유한 전쟁을 갖고 있다.
전쟁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1) 증오와 적대감을 갖고 있는 국민이 있어야 하고,
2) 우연과 개연성에 따라 전쟁 목표를 수정할 수 있는 지휘관과 군대가 있어야 하며,
3) 전쟁의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
4장. 전략이란 무엇인가?
원문. 전쟁은 무기나 장비의 성격을 규정하고, 무기나 장비는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한 활동 안에 여러 종류의 활동들이 포함되어 있을 때에는 그것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분야에서는 매우 뛰어난 인물이 다른 분야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현학자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만 기억해도 될 것이다.
작전이란 싸움을 배치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싸움이 단 한 번의 행위로 끝나면 작전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싸움은 크고 작은 무수한 행위들, 즉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개별적인 행위들로 이루어 져 있다. 우리는 이 개별적 행위들을 전투라 부르는데, 그것들이 새로운 단위들을 구성한다.
여기에서 완전히 다른 활동들이 생겨난다. 하나는 전투 자체를 배치하고 수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목적을 위해 많은 전투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전자는 전술, 후자는 전략으로 명명된다.
전술이란 전투에서 전투력의 운용에 관한 가르침이고, 전략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투의 운용에 관한 가르침이다.
전략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투를 운용하는 것이다. 전략 이론은 전투력 자체 뿐 아니라 연관된 다른 요소들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전략은 전쟁 행위 전반에 걸쳐 전쟁 목적에 맞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즉 전략은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목표달성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행위를 목표와 연결시킨다. 상황변화에 맞게 지속적으로 작전을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전략은 한순간도 전쟁의 현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전술에서는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결정되어, 행위자는 일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에 맞서 저항하다가는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솟구치는 의혹을 억누른 채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천천히 진행되는 전략에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의심,이의,의견이나 때 아닌 후회를 생각할 여유가 더 많다.
해설. 싸움에서 물리적 힘은 절대적이다. 힘 센 사람이 대부분 이긴다. 물리적 힘은 대부분 양적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숫자는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전쟁이 단순히 숫자놀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싸움은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질도 있고 정신이 필요하다.
게다가 오늘날 물리적 힘의 핵심인 무기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물이지 않은가? 전쟁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신의 활용이 바로 전략이다.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투력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전략이다.
전쟁의 당사자가 어떤 무기를 갖고 있느냐가 전쟁에 영향을 준다면, 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이미 전쟁의 일종이다.
어떤 전투에는 어떤 무기가 적합한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전략이다.
이는 인적자원 활용에도 적용된다. 어느 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도 다른 분야에서는 전혀 쓸모없을 수 있다.
인적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려면 그 사람의 능력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쓰일 수 있는 현장과의 적합성이 더 중요하다.
전략의 세 요소와 단계.
1) 전략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전투를 결합하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전술은 전투를 배치하고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3) 작전은 목적에 맞게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쟁의 수단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군대와 무기다. 무장한 군대가 전투력을 투입해 싸우는 개별적 행위가 전투다. 그러므로 작전이란 전투력의 배치와 수행을 의미한다.
"전략은 전쟁 행위 전반에 걸쳐 전쟁 목적에 맞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략에서 전술을 거쳐 작전으로 내려가는 방향에서는 정신력보다 물리력이 더 요구되지만, 작전에서 전술을 거쳐 전략으로 올라가는 방향에서는 물리력보다는 정신력이 더 중요해진다.
"전략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이 말은 꽤 意味深長하다. 전술에서는 이기고 전략적으로 실패해 전쟁에서 지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전략은 전쟁의 목적을 위해 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해서는 안 될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수단을 투입하지 않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전략은 이처럼 목적 달성을 위해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
손자는 謨攻 편에서 승리의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 싸워야 할 때와 싸워서는 안 될 때를 아는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피하고, 이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전략이다.
2) 병력이 많고 적음에 따라 용병술을 변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전술은 항상 전투에 투입되는 병력과 무기에 맞춰져야 한다.
3) 상하의 일치단결이다. 일치단결은 모두가 똑같은 것을 원하고 추구할 때에만 가능하다. 공동의 비전이 필요하다.
4) 싸울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것이다. 무기의 개발과 전술의 계획이 여기에 속한다.
5) 장수는 유능하고 군주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분야는 물론 전투와 전술이다. 전투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수행하는가는 전쟁의 현장에서 움직이는 장수의 몫이다. 훌륭한 군주는 장수에게 전투를 맡기되, 전쟁의 목적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줄 알아야 한다.
지도자가 무엇에 개입하고, 개입해서는 안 되는지를 구별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제3부. 전략의 공간
5정. 의지의 마찰과 창조의 의지
원문. 전쟁은 기술이나 학문의 영역이 아닌 사회생활의 영역이다. ☞ 퀴즈의 세계가 아니라 미스터리의 세계다.
전쟁은 커다란 이해관계의 충돌이며, 이 충돌은 피를 흘려야 해결된다.
전쟁은 장사와 잘 비교된다. 장사도 인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그런데 장사와 훨씬 더 가까운 것은 정치다.
정치는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장사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치는 전쟁을 일으키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은 기술처럼 무생물을 상대로 한 의지의 활동도 아니고, 관념예술에서처럼 인간정신이나 감정 같은 대상에게 표출되는 의지의 활동도 아니다.
전쟁은 살아 있으며 반응을 하는 대상에 대한 의지의 활동이다. 이런 활동에 기술이나 학문의 도식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부적합한지는 자명하다.
동시에 전쟁활동에서 무생물의 세계에서나 발전시킬 수 있는 법칙을 찾으려는 노력이 늘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전쟁술이 모방하려 한 것이 바로 이런 기계기술이다. 관념예술에서는 당연히 모방이 금지된다.
사실 군사적 기계인 군대에 속하는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단순해 다루기 쉽게 보인다.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것이 어렵다. ☞ 예측치 못한 다양한 변수들의 저항 때문이다.
계획을 세울 때 고려할 수 없었던 수많은 소소한 상황들이 영향을 미쳐서 능률이 저하되고 결국 목표에 훨씬 못 미치게 된다.
관념상의 모든 과정과 허위는 전쟁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하찮은 병사라도 우연한 기회에 대대의 기동을 정체시키거나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안개나 비 또는 추위가 대대의 기동을 세 배로 지체시킬 수도 있다. 모든 전쟁에는 암초가 가득 찬 미지의 바다 같다.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은 거의 습관이 된 재치있는 판단력을 통해 늘 적절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오직 전쟁을 경험한 장교만이 전쟁의 맥박이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건에서 늘 적절하게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쉽게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전쟁에서 자주 허점을 드러내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의 토대는 흔들리고 극히 위험하게 된다.
확실한 정보만 믿어야 하고 정보는 일단 의심해야 한다고 모든 책에 쓰여 있지만, 그건 책이 주는 초라한 위로에 불과하며 체계적인 개론서의 저자들이 더 나은 체계를 쓰지 못해 도피해 버리는 가르침에 불과하다.
전쟁에서 얻는 정보의 많은 부분은 서로 모순되고 더 많은 부분은 거짓이며 훨씬 더 많은 부분은 상당히 불확실하다.
그래서 장교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는 전문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그리고 판단력이 줄 수 있다.
평범함으로는 충분치 않다.
해설.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 막스 베버.
우리의 삶과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마찰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실 속에서도 이 마찰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까?
전쟁도 이 충돌의 법칙을 따르는 것인가? 이러한 마찰이 관성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서로 충돌하는 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정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독자적인 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사람을 주체라고 부른다.
"전쟁은 살아 있으며 반응을 하는 대상에 대한 의지의 활동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단순하지만, 가장 단순한 것이 어렵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여기서 가장 단순하다고 한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집단이 마찰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는 승리 혹은 패배다.
이 마찰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이 아닌 사람의 충돌이라는 점이다.
전쟁은 저항을 받으며 하는 운동과 같다. 전쟁의 충돌이 사물간의 물리적 충돌과 같지 않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저항 때문이다.
적군, 다양한 환경, 시시각각 변하는 형세, 믿을 수 없는 감정, 즉 물리적 저항과 심리적 저항은 전쟁의 마찰을 계속 따라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마찰을 극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수많은 경험을 통해 마찰을 알아야 한다.
클라우제비츠가 제시하는 마찰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1) 마찰은 살아 있는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한다. 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알고 있는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2) 마찰은 물리적 역학에서처럼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연과 만나는 곳에는 항상 마찰이 있다. 예기치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3) 마찰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은 마찰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훈련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배워야 한다.
전쟁이 정신적 힘과 전략이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훌륭한 지휘관은 경험과 강한 의지 외에 '다른 독특한 정신적 특성'을 필요로 한다.
좋은 인재는 어떤 사람인가?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스펙을 쌓은 사람이 좋은 인재인가?
혹시 추상적 이론과 지식으로 무장한 이런 인재들은 탁상전쟁에서만 탁월하고 현실전쟁에서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마찰 때문에 그것을 적용할 수 없을지 모른다.
전쟁에서 정확한 지식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 승부의 세계, 예술의 세계, 성취의 세계에는 정답이 아니라 솔루션이 필요하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연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특정한 것을 고집하면 잘못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어떤 과제와 과정의 결과가 여러 가지일 수 있을 때는 계획이 상세할수록 실패할 개연성이 크다.
여기선 어떤 법칙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현실과의 마찰을 통해 현실에 맞게 법칙을 수정할 수 있는 탄력적 융통성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마찰에 대한 판단력을 기를 수는 없는 것인가? 반복적인 경험과 훈련만이 이런 판단력을 길러 준다. → 습관화된 판단력.
"싸움이란 원칙으로 맞서고 변칙으로 이기는 법이다." - 손자.
사물의 마찰이 아니라 사람의 마찰인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그 정반대로 변할 수 있다.
6장. 전략의 정신적 조건
원문. 천재는 특정 활동을 위한 고도의 정신력이다.
이성의 판단력으로 진실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 섬세하고 예리한 이성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곳이 바로 전쟁이다.
정신이 예상차 못한 일과의 끊임없는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두 가지 자질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
1)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진리로 이끄는 내면의 불빛의 흔적들인 이성이다. 이는 통찰력이다.
2) 이성을 따르는 용기다. 이는 결단력이다.
신속하고 정확한 결단이라는 개념은 먼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판단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후 단지 정확한 안목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다.
통찰력이란 진실을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 진실은 평범한 정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오래 관찰하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결단력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용기의 행동이고, 그것이 성격적 특징이 되면 정신의 습관이다.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의 결단력에 관해 말할 필요가 없다.
최고지휘관은 정치가가 되지만, 한순간도 자신이 최고지휘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그는 국가정세를 한눈에 파악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수중에 있는 수단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지휘관이 진리를 예감하는 정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단번에 파악하지 못하면 관찰과 생각들이 뒤엉켜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정신력에게 요구되는 것은 경이로운 정신의 눈으로 향상된 통합력과 판단력이다. ☞ 입체적 사고.
최고지휘관의 높은 정신과 감성의 활동이 행동의 성공으로 나타나지 않고 단지 성실과 신념의 형태로만 드러난다면, 역사에 남기 힘들 것이다.
우리가 전쟁에서 형제와 아이들의 안녕, 조국의 명예와 안전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치밀하고 포괄적이며 냉정한 사람이다.
해설. 싸움을 잘하려면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싸움은 근본적으로 속임수다.
목적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적을 속이는 것은 전략이다.
머리를 쓰지 않고 무턱대고 일만 하는 사람을 보고 '개념없이 일한다'고 말한다. 머리를 쓰지 않는 사람들에겐 대개 전략이 없다.
전쟁은 우연이 지배하는 불확실성의 세계다. 불확실성은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인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천재지변처럼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은 전쟁의 불확실성을 높인다.
당사자들의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서로 만나고 부딪힐 때에도 불확실성은 생겨난다.
정보가 많아지면 불확실성은 그만큼 줄어들까?
"믿음은 좋다. 그러나 통제는 더욱 좋다." - 레닌.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 비행기가 몇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륙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이성적 통제가 반드시 감정적 믿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레닌과는 반대로 "통제는 좋다. 그러나 믿음은 더욱 좋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수많은 합리적 정보들을 믿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성의 판단력으로 진실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 섬세하고 예리한 이성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곳이 바로 전쟁이다.
지도자들에겐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균형감각 있는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이는 지적 집중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변하지 않는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사태에 대한 판단력, 그것이 균형감각 있는 정확한 판단력이다. ☞ 입체적 사고.
변화하지 않는 사물을 보아서 분별할 수 있는 식견을 안목이라고 부른다. 古미술품에 대한 안목이 높다는 표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태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는 능력은 통찰력이라고 한다. 바로 신속하고 정확판 판단을 의미하는 통찰력이다.
지식은 많지만 판단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방 끈이 길다고 판단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의 덕성은 신속하고 정확한 통찰력을 토대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전쟁의 천재는 통찰력이라는 이성과 결단력이라는 감성이 결합된 독특한 자질이다.
"전쟁을 잘하는 장수는 勢에서 답을 구하고,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 손자.
7장. 전략의 이론과 실천
원문. 이론적 연구의 모든 실증적 결과, 즉 원칙,규칙,방법은 교리화될수록 점점 더 보편성과 절대적 진리의 성격을 잃게 된다.
원칙,규칙,방법은 사용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 적절성 여부는 판단에 맡겨야 한다.
확고한 지점도 없고 뚜렷한 법칙도 없는 의견의 소용돌이는 분명 인간의 정신이 극히 혐오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작전에 관한 원칙,규칙,체계를 정립하려는 노력이 생겨났다.
작전의 진행은 거의 모든 면에서 한계를 정할 수 없다. 그러나 체계나 학설은 종합이라는 제한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수적 우세는 물질적 요인이다. 승리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 중 이것을 골라낸 까닭은 시간과 공간의 조합을 통해 수의 우세에 수학의 법칙성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상황은 교전 중인 양쪽에게 동일하게 작용해서 중립적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서 무시하려 했다.
수적 우세를 유일한 법칙으로 간주하고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우위를 확보한다는 공식에 전쟁술의 모든 비결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은 현실세계의 힘에 맞설 수 없는 편협한 생각이다.
편협한 관찰에서 얻은 이런 빈약한 교훈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학문의 울타리 밖에 놓이게 되었고, 규칙을 초월한 천재의 영역이 되었다.
규칙 사이를 구걸하듯 기어 다녀야 하는 병사들이여, 슬프도다!
규칙은 천재에게 너무나 나쁘며 천재는 규칙을 고상하게 무시하며 필요하다면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다.
천재가 하는 것이 바로 가장 멋진 규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론이란 어떻게, 왜 그런지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전쟁의 본질이 위와 같다면, 지휘관에게 언제 어디서나 외적인 발판을 제공할 수 있는 실증적 학문체계로 전쟁술을 정비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지휘관은 실증적 학문체계의 밖에 있게 되고 그와 모순적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 학문체계 안에 아무리 전쟁의 다양한 측면들에 관해 논의가 이루어진다 해도, 항상 다음의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그 결과란 재능있는 사람과 천재는 법칙 밖에서 행동하고 이론은 현실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이론은 책을 통해 전쟁에 정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된다. 즉 이론은 그의 길을 밝혀 주고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며 판단력을 길러 주고 함정에 빠지지 않게 지켜 준다.
이론은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새로 정리하고 연구할 필요없이 이미 정리되고 밝혀진 상태에서 그 문제를 만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론은 미래의 지휘관의 정신을 길러 주거나 스스로 자기교육을 할 수 있게 안내해야 하지만, 전쟁터까지 따라가서는 안 된다.
이는 현명한 교육자가 청소년의 정신발달을 지도하고 도와주지만, 한평생 그의 손에 끈을 묶어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것과 같다.
해설. 이론에 강한 사람은 대체로 실전에 약하다. 경제학 교수가 증권투자에 성공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고, 권력이론에 정통한 정치학 교수가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살아 남았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연애론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일수록 연애를 잘하지 못하고, 소통이론의 전문가라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럴까? 사람은 끊임없이 변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관계 역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독립적이고 불변적인 사물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분석해 예측할 수 있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쉽게 계산할 수 없다.
인간사는 상호 의존적이고 가변적인 사람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 퀴즈의 세계와 미스터리의 세계를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인간사가 불확실할수록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더욱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 한다. 정보를 모으고 일관성 있는 상관관계를 만들어 낸다.
인간 관련 이론들은 이렇게 경험적 관찰과 분석에서 시작하지만, 이론이 체계화될수록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현실로부터 더 멀어질 수 있다.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략 이론은 이런 점에서 모순적이다. 실전에서 직접 사용될 수 있는 전략은 그 자체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이론화될 수 없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있는 전략(이론)을 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략 '이론'을 고집하면 '전략' 자체가 실패할 수 있다. 현실을 무시하는 이론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전쟁이론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비스듬히 행진하기,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 등의 법칙과 같은 불변법칙을 가진 전쟁과학을 신봉하는 군사이론가들, 퓨얼과 그의 신봉자들은 전쟁의 유사이론에 의해 정의된 정확한 법칙에 맞게 나라의 가장 먼 곳까지 후퇴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야만과 무지, 심지어는 악으로 보았다."
톨스토이가 풍자하는 전쟁이론가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현실은 모르고 지도와 계산기로만 전략을 짜는 '계산기 전략 이론가'들이다.
계산기 전략 이론가들은 확실하고 실증적인 것만을 다루려고 하고, 불확실하고 우연적인 것은 배제한다. 전쟁은 우연이고 불확실성인데도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계산기 전략 이론가들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것처럼 "계산할 수 있는 것만을 고집하려 한다."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전쟁술이나 전쟁학은 항상 물질적인 것과 관련된 지식으로 이해되었다.
무기의 생산과 사용, 요새와 진지의 건설, 군대의 조직과 기동과 관련된 지식이 전략이론인 것처럼 여겨졌다.
오늘날 화폐와 금융에 대한 계량경제학자의 계산이 경제운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현실은 항상 계산을 배반한다. 현실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수적 우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패배한 수많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경제영역에서도 대마불사라는 규모의 논리는 현실적 진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자기보존의 전략에 불과하지 않은가?
수적 우세를 유일한 법칙으로 간주한다면, 양을 압도할 수 있는 다양한 질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기지는 분명 군대,병참,통신의 거점을 형성한다. 급변하는 전황에서 기지는 비교적 고정적이다. 쉽게 옮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지 중심의 전략은 움직이는 기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유목민 부대가 움직이는 것을 그만두고 한 곳에 정주하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전쟁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변화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도 다르게 그리고 빠르게 변화한다. 이런 전쟁에서 이론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원칙이나 규칙 또는 방법은 교리화될수록 점점 더 보편성과 절대적 진리의 성격을 잃게 된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우리는 흔히 계산과 판단(평가)을 혼동한다. 계산은 정해진 법칙을 주어진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은 불변의 계산 법칙이다. 그렇다면 인간사에서도 이런 불변의 계산 법칙이 통할까?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공공의 관심으로 모이면 시너지를 얻게 된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 이상의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적대적 관계가 형성된다면, 하나에 하나를 더한 결과가 마이너스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판단(평가)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은 엄밀한 의미에서 특정한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보기에는 화합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지만, 모이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계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도자와 지휘관은 이런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경영계에서는 파괴적 혁신이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기존의 법칙을 고수하면 정체되거나 망하기 때문에 기업은 과거의 틀을 깨고 새로운 규칙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게임의 룰을 도입함으로써 기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제 혁신 전략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기업의 성상파괴운동은 항상 새로운 기술적 표준을 만들거나 새로운 기업 모델을 창조했다.
구글,애플,페이스북 등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혜성처럼 등장한 글로벌 기업들은 대개 이런 창조적 파괴자들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비판의 일차적 대상은 이론과 그 실천자들이다.
시대가 바뀌면 이론도 바뀌어야 하는데 여전히 기존 이론을 고수한다면 성공할 수 없다. 그들은 기존의 규칙들을 마치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처럼 법전화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론의 가변성을 망각하고 기존의 규칙들을 적용하는 데만 익숙해진다.
좋은 이론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파악하고 예측하려고 애쓴다.
좋은 전략은 이처럼 새로운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기존의 규칙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재능있는 사람과 천재는 법칙 밖에서 행동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바로 파괴적 혁신의 뜻을 말해준다.
이론은 전략적 정신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지, 결코 전쟁터까지 따라가서는 안 된다.
"현명한 군주와 장수가 군대를 움직여 이기고 적보다 공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먼저 알기 때문이다." - <손자> 용간 편.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첩자와 정보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의 내부에 침투해 기밀을 알아내야 한다.
전략의 출발점은 두말할 나위없이 미리 아는 것이다. 어떻게 먼저 알 수 있는가? 손자는 네 가지로 대답한다.
1) 귀신의 도움으로는 알 수 없다. 신적 직관력, 즉 신통력은 전략적 지식이 아니다.
2) 사물의 표면적 현상으로도 알 수 없다. 사물에 대한 경험적 지식은 전략적 지식이 아니다.
3) 실험이나 추측으로도 알 수 없다.
4) 그러므로 먼저 알려면 반드시 사람에게서 얻어야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물론 적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첩자를 가리킨다. 물론 일반적인 인간본성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적이든 아군이든 전쟁을 계획하고 일으키고 수행하는 데는 사람의 본성,성격,의지,욕망이 깊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먼저 알아야 하는가?
원칙이나 규칙은 사용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화될수록 점점 더 진리의 성격을 잃는다.
재능있는 사람과 천재는 법칙 밖에서 행동하고, 이론은 현실과 대립한다.
이론의 역할은 판단력을 길러 주고 함정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는 것이다.
제4부. 전략적 공격과 방어
8장. 전략적 방어: 방어하면서 공격을 생각하라.
원문. 관점의 변화는 문제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만든다. 이는 공격과 방어에 새로운 이해의 빛을 던져 줄 뿐 아니라 사상체계를 보완해 준다.
"Beati sunt possidentes. 소유한 자는 행복할지니..." - 라틴 속담.
침략자는 (보나파르트 자신이 늘 주장하듯이) 언제나 평화를 사랑하며, 그는 아주 조용히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싶어했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원해야 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방어를 해야 하는 약한 쪽은 늘 무장하고 있어야 하고 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쟁술이 이를 요구한다.
해설. 공격은 최상의 방어다. 이 말은 공격과 방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대변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기대와는 정반대다. 공격과 방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의 두 명제로 압축된다.
1) 방어는 공격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투 형식이다.
2) 전쟁은 침략하는 쪽보다 방어하는 쪽에 존재한다.
전쟁에서 공격은 방어보다 훨씬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방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없는 평화시기에 전쟁을 대비해야 평화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방어를 할 때에는 다음의 공격을 생각하고 또 공격할 때에도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결전을 치루는 데 무엇이 더 유용한가를 계산 및 판단하는 것이다.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에는 기습, 지형의 장점, 여러 방면에서의 공격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공격과 방어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략적 이익에 달려 있는 것이다.
"비록 전쟁에서 공격하고 취하여 승리했더라도 얻은 이익이 없다면 헛일이다." - 손자.
"옛날부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에게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달렸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 - 손자.
적의 힘과 대응전략을 완벽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격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적의 수에 말려들 수 있고, 무모해질 수 있다. 그래서 전쟁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한다.
9장. 전략적 공격 : 승리 효과를 높여라.
해설. 전쟁은 공격과 방어의 끊임없는 교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의 목표는 적을 꺾는 것이고, 전쟁의 수단은 적의 전투력 파괴다. 이 점은 방어에서도 그렇고 공격에서도 그렇다.
경제적 공격은 시장점령이다. 공격은 시장을 확보할 때까지 계속되고, 한 시장을 점령해 공격을 멈추면 그 때부터 방어를 시작하게 된다.
경제전쟁에서 방어전략은 결정적 무기의 연구개발이다. 시장에서 패배한 적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반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과 상품을 준비한다.
제5부. 전략의 덕성
10장. 전략의 정신적 요소
원문. 정신적 요소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정신은 숫자나 등급으로 나타낼 수 없고 보고 느껴야 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책을 통해서만 얻는 지식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전쟁에 관한 책에서 정신에 대해 지금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았지만, 정신 문제는 전쟁의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전쟁술의 이론에 속하는 문제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요소의 중요성을 가장 잘 증명하고 그 영향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역사다.
이는 최고 지휘관의 정신이 역사에서 끌어내는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영양분이다.
영혼에 열매를 맺는 지혜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감각이나 전체적 인상 또는 순간적으로 빛나는 정신의 불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포화 속에서 평소의 규율을 유지하는 군대, 압도적인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현실적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군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패배의 절망감 한가운데서도 복종심을 잃지 않으며 지휘관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잃지 않는 군대, 결핍과 고통으로 단련되어 운동선수의 근육처럼 체력이 강해진 군대, 고통을 군대의 깃발에 꽂힌 저주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보는 군대, 그리고 이 모든 의무와 덕성을 군대의 명예라는 생각에 대한 짧은 교리문답을 통해 생각해내는 군대, 이런 군대야말로 전쟁정신으로 충만한 군대다.
어두운 방에서 인간의 눈은 동공을 확대하여 작은 빛을 받아들여 사물을 조금씩 분간하고 마침내 전체를 잘 보게 된다.
훈련된 군인은 전쟁에서 이와 같다. 반면 신병은 칠흑같은 밤만 보게 될 것이다.
해설. 싸움의 명분은 대부분 도덕적이고 이상적이지만, 전쟁의 수행 과정은 대체적으로 비도덕적이다.
평화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때론 전쟁이라는 나쁜 수단도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과 도덕은 일반적으로 서로 대립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하고, 도덕적 규범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현실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
전쟁은 행위를 요구한다. 어떻게 행위해 목적에 도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전략이다.
전략에는 필연적으로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정신력을 고려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1) 정신적 요소 - 정신적 특성과 심리적 효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전투 병사와 부대의 정신적 태도는 전투수행에서 결정적 요소다.
2) 물리적 요소 - 전투력의 규모와 편성, 무기의 비율 등을 포괄한다.
3) 수학적 요소 - 전투력을 직접 투입하는 작전의 형식과 모양을 결정한다. 집중할 것인가, 분산할 것인가의 문제는 모두 수학적 문제이다.
4) 지리적 요소 - 강,숲,도로와 같은 지형적 영향은 지리적 요소에 속한다.
5) 통계학적 요소 - 병참은 통계적 요소에 속한다.
정신력은 물리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 물리적 전투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의지와 정신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비겁한 병사의 손에 쥐어 주면 쓸모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물리적인 것은 나무로 된 칼자루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인 것은 귀금속으로서 번쩍번쩍 갈아 놓은 실제의 무기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위대한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날카로운 통찰력과 전체를 꿰뚫어 보는 직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인문학의 필요성이 여기서 대두된다.
☞ 과학은 부국강병과 관련이 깊다. 과학을 공부하려면 최근 서적을 보고 최신 지식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은 행복을 신경 쓰지 않는다. 가치를 평가하지도 못한다. 정신력과 의지를 키워 주지도 못한다. 인내심과 자제력을 줄 수도 없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지도 못한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을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최근 서적이나 최신 지식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2천 년 전의 인문학도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문고전을 읽거나 얘기하면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다. 역사와 철학은 고대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상고사를 공부하는 것은 바로 오늘과 내일을 공부하는 것이다. 고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현대철학을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가치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나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지금 읽는다면 이는 진짜 고리타분한 것이 된다. 그러나 <논어>나 <국가론>을 읽는다고 고리타분하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다.
군인은 함께 싸우는 사람들과의 특별한 유대를 가져야 한다. 전쟁은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설령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싸울 때에도 항상 스스로를 집단의 일원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와 함께 싸우는지가 분명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잘 싸운다.
11장. 균형의 힘
원문. 위험, 육체적 고통, 불확실성, 우연 등 전쟁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네 요소들 속에서 轉戰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힘과 감성의 힘이 필요하다.
전쟁처럼 의견 차가 크게 벌어지는 것도 없고,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는 인상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가장 둔중한 이성조차 그 흐름에 대항해 자신을 지킬 수 없는데, 그것은 그 인상이 너무 강하고 활발해 한 번에 감성에 밀어닥치기 때문이다.
맑고 깊은 신념만이 전쟁을 더 높은 관점에서 지휘하게 만드는 일반적 원칙과 견해를 낳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개별적 경우에 관한 생각이 일반적 원칙과 견해에 닻을 내릴 수 있다.
해설. 에너지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일을 함께 하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어떤 사회가 활력이 넘치는 사회인가? 에너지가 넘쳐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이다.
인간문명의 동력은 두말할 나위없이 에너지다. 전쟁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축적된 에너지의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행동의 에너지는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동기의 강도를 나타낸다고 말함으로써 동기를 강조한다.
우리의 행위동기는 이성적 확신 아니면 감성적 자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감성이 없다면 결코 강한 힘을 생산할 수 없다.
힘을 표현하는 데는 반드시 감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득되었더라도 감정이 따라 주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한데,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에 임하는 전쟁터에서는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의 덕성을 키우기 위해 무엇보다 이성과 감정을 결합해 행위를 유발할 수 있는 독특한 감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
명예욕과 정신력을 연결시킴으로써 명예욕이 강한 감성을 배양할 수 있는 커다란 동기가 될 수 있다.
이성이 없는 감정은 맹목적이고, 감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 행위와 관련해서는 이성은 반드시 감정과 결합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감성에 무게를 더 둔다. 강한 감성 없이는 결코 훌륭한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야기를 할 때든 글을 쓸 때든, 주장이나 설명의 나열보다는 사례나 이야기를 병행해야 한다.
강한 감성이란 격한 감정이 아니다. 열정은 결코 강한 감성이 아니다.
두 사람이 싸운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한다.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인다.
다른 사람은 차분하게 대응한다. 상대방이 큰 소리로 말하면, 그만큼 더 목소리를 낮춘다.
어떤 사람이 이길까?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자기 분을 못 이겨 스스로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
강한 감성, 강한 정신력은 강렬한 자극이나 격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따르는 능력이다. 강한 감성은 결코 감정의 강한 폭발이 아니다.
매우 흥분한 순간에도 이성을 따르는 힘은 바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자제력이다.
흥분할 때에도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자제력을 키울 수 있는가? ☞ 확고한 지식과 역량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성으로 통제하라는 말이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좋은 리더십은 강한 감성을 전제한다. 강한 감성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감성은 수많은 상황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태도,성격으로 발전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기려면 적을 믿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는 것은 전략의 진리이다. 어떤 싸움에서도 이기려면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뛰어난 정신력에 요구되는 것은 일관성과 판단력이다. ☞ 입체적 관점과 평가능력.
제6부. 전략의 경제학과 역학
12장. 전략의 경제학
해설. 전투에서는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는 경우가 있다. 전투의 대가가 너무 커 패배와 다름없는 승리를 흔히 피로스의 승리라고 한다. ☞ 단기투자는 결국 기껏해야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기 마련이다.
무릇 전쟁은 경제적으로 치러야 한다. 승리를 경영할 줄 모르면 비용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증가한다. ☞ 승리를 제대로 경영한 사례는 영국과 일본을 들 수 있다. 17~19세기 일본은 과학혁명 중인 서유럽과의 해상교역을 통해 근대화의 눈을 떴고, 메이지유신으로 입헌군주체제로 변화, 근대화, 청일전쟁으로 4.5년의 예산에 해당되는 엄청난 배상금 수령, 산업화와 전쟁준비, 러일전쟁, 조선병합, 만주사변, 상해사변, 태평양전쟁 등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의 초기부터 열강과 함께 중국침탈, 전쟁배상금 등을 확실히 챙겼기에 가능했다. 그 이전에 영국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전략은 어느 때, 어느 지점에서, 어느 전투력으로 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포기해 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결국 가장 중요한 곳이 남기 마련이다. ☞ 평가역량이 있어야 가능하다.
"무릇 싸움터에 먼저 자리를 잡고 적을 기다리면 편안하다... 싸움을 잘하는 장수는 적을 끌어들이지, 적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다... 적이 반드시 달려갈 곳으로 나아가고,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달려가라." - 손자.
적을 드러나게 하고, 아군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전략의 경제학의 핵심이다.
언제나 작은 것은 큰 것에 달려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중요한 것에 달려 있으며, 우연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 ☞ 그래서 미시적 우연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필연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13장. 전략의 역학
해설. 전략은 먼저 움직이는 힘이다.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미리 예측하고 이 기대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적이 예측할 수 있는 전술을 쓰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적군이 가장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 가장 큰 성공을 안겨 준다.
기원전 216년 여름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왜 로마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그가 로마 공격을 하지 않은 데 대한 카르타고 장군 마르하발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니발, 당신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승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 영국,일본.
상대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먼저 행동함으로써 게임을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하는 것을 통상 선도자의 이점이라고 한다.
먼저 움직여 상대가 정신 못 차리게 행동함으로써 우세를 확보하는 전략의 역학은 힘의 중심, 기습, 동맹, 긴장, 승리의 장점의 5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모든 승리가 영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승리 자체를 경영할 줄 알아야 한다.
"시대를 통틀어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간접 전략을 수행하지 않고 효과적인 전과를 거두는 예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간접성은 통상 물리적인 것이었지만, 언제나 심리적인 것이기도 했다. 전략상으로는 목적에 대한 가장 먼 우회로가 때때로 최단 경로일 수도 있다." - 리델 하트.
제7부 절대전쟁
14장. 주력 전투
원문. 주력 전투는 피를 가장 많이 흘리는 해결방식이다. 학살은 주력 전투의 특징이다.
해설. "누가 날카로운 칼을 갖고 나타나서 우리의 팔을 베어 버릴 때까지 자기가 지닌 칼을 인정 때문에 점차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주력 전투는 정의상 승리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전투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승리를 바랄 수는 없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려면 점진적 개혁을 통해 그리스 동맹의 지배권을 강화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적들이 대항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재정복했다.
그리스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페르시아를 적국으로 정의했고, 행동을 개시했다. 36,000의 군사를 이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자, 가져온 160척의 3단 노선을 불태워 버렸다. 퇴로와 병참로를 차단해, 정복지에서 물자와 병사를 조달할 것을 명령했다. 정복 아니면 죽음 뿐이었다.
페르시아가 강한 해군을 피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육상 전투를 벌였다. 적들이 처음 보는 작전을 통해 대응할 만한 대책이 없도록 만들었다.
백전백승의 조건은 적군과 아군의 전력을 모두 알고, 기후와 지형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결정적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15장. 절대전쟁과 전략의 목적
원문. 전쟁계획은 모든 전쟁활동을 포괄하며, 전쟁활동은 전쟁계획 때문에 개별적인 행동이 되고, 개별적인 행동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일체의 특별한 목표들은 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해소된다.
해설.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의 양식이 나폴레옹을 통해 혁명적으로 변화했다. 이때부터 전쟁은 적의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진행되었고,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수단에 한계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총체적 전쟁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정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손자에 의하면, 전쟁을 시작하려면 전쟁으로 얻을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익에 부합하면 싸우지만 이익이 안 되면 그만 둬야 한다.
군주는 노엽다고 군대를 일으켜서는 안 되고, 장수는 화가 난다는 이유로 싸우려 들면 안 된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독특한 전쟁을 갖고 있다.
에필로그 - 손자병법과 전쟁론.
전쟁이 일어나는 역사적 상황, 정치 사회적 환경, 전쟁수행의 군사적 형태와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승리하려는 전쟁의 본질은 항상 똑같다.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전개되는 경험적 현상에서 그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서 전쟁을 분석하고 성찰했던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는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론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연구이며, 대상을 정확히 알게 해준다. ☞ 그러나 물리적 대상에 대한 이론을 의지를 가진 유기체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전쟁이론을 필요로 한다. 춘추전국시대와 나폴레옹의 시대에는 주체,무기,전략,전술이 모두 달랐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우회와 기습 등 간접전략이 주효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직접전략에서의 우위가 결과를 좌우했다.
손자에겐 전쟁은 속임수였지만,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에서 상대방을 속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음을 이해했다. 기만은 예외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관이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전쟁에 관한 기본 입장은 똑같다. 전쟁이 벌어지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승리해야 한다.
이론은 현실과 자주 모순에 빠진다. ☞ 그러기에 이론을 정답으로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솔루션으로 작동하는 이론이어야 정당한 이론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151011日 安晋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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